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오래된 기도 (5)
희고 투명한 눈송이. 그 정결하고 고유한 문양과 살갗에 닿는 순간 녹아 사라지는 한시적인 아름다움. 차정주의 이름으로 반복한 서른한 번의 체스 경기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논외의 존재’를 부르는 이름은 매번 달라졌다. 가장 먼저 어떤 시간선에 머무르는지에 따라 분류되었고, 그 안에서도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지에 따라 그의 존재를 정의하는 단어가 부여되었다.
물론 지금껏 ‘논외의 존재’는 그의 정체를 정의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 붉은 그림자를 거두며 사라졌다. 때때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집단을 이루며 살기도 했으나 돌아서는 발걸음에 아쉬움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후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는 삶이라고 부르기에는 대체로 단편적이고, 짧은 유희라고 하기에는 깊고 농밀한 기억을 수집하며 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이름은 이곳에서 얻은 것이었다.
또한 이곳은 ‘논외의 존재’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시간선이기도 했다. 그가 이토록 긴 시간 동안 하나의 시간선에 머무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어느 시간선에 머무를지 결정하는 기준은 간단했다. 그 시간선 내의 세계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뒤바뀔 징조가 보일 때였다. 무한한 우주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시간선과 각각의 세계는 언제가 됐든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기 마련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재난이 몰아칠 때. ‘논외의 존재’는 게이트 시대가 시작되던 순간에 이곳으로 침투했다.
‘논외의 존재’가 길고 긴 일생에서 잊지 못할 단 한 사람을 만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뭇 사람들은 그날을 전국을 뒤덮었던 눈보라와 하얗게 물든 도시를 다시 붉게 뒤덮은 핏빛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타난 건 ‘논외의 존재’가 차정주의 곁을 맴돌며 그를 지켜본 지 한참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무너진 도로변에 쓰러진 채 힘겹게 숨을 고르던 차정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한 시간도 안 돼서 얼어 죽을 거예요. 내 손 잡고 일어나요.’
차정주는 거세게 흩날리는 눈발 속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그녀에게 한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정주가 곧게 뻗은 손을 맞잡고 일어나는 순간, ‘논외의 존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논외의 존재’가 차정주의 곁을 맴돌던 건 새로운 시간선에서 숙주 삼을 만한 적당한 인간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가 계속 지켜보고 있던 차정주는 그가 자신이 원하는 기준을 충분히 충족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논외의 존재’는 잠시 결정을 유보한 채로 차정주와 곁에 선 그녀를 계속 지켜봤다.
불현듯 느낀 이끌림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차정주와 함께 혼란이 불거진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사람들을 구출하고 탈출구를 모색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내놓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곧 있으면 이 근방에 괴물이 나타날 거예요. 지금 당장 피해야 살 수 있어요.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어서요!’
그때 차정주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바로 그때, 차정주가 가지고 있던 비열하고 음습한 욕망이 더욱 진해졌던 그 순간. ‘논외의 존재’는 차정주의 몸을 빼앗을 수 있었다.
‘논외의 존재’는 천성이 청렴하고 결백한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자체가 읍습하고 불길한 기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그의 저력을 막힘 없이 펼치기 위해서는 자신과 상성이 맞는 존재를 찾아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차정주는 숙주로서 더욱 적합한 존재였다. 물론 차정주를 택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정주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것처럼 ‘논외의 존재’ 또한 그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던 터였다. 그대로 떠나보내기에는 무척 아까운 재목이었다.
이 시간선이라면, 이 여자라면 자신이 잠시 머물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이토록 간절하게 지키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처절하게 만드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던 ‘논외의 존재’가 어렴풋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그 순간의 그녀가 무엇을 믿고 단언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차진명의 상대로 도해월을 붙여 놓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해월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녀 또한 전투 설계 능력과 버프 스킬을 가진 헌터였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는 처음부터 S급으로 각성했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나타난 S급 각성 헌터는 차정주가 아닌 그녀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그쪽도 빨리 따라와요!’
이윽고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몸을 얻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기억 속의 그녀는 게이트 시대가 시작된 뒤 수많은 현장을 활보하며 명성을 쌓아 올렸다. 세간에서는 그녀가 던전 내부를 하나의 판처럼 내다보며 수를 전개한다고 하여 ‘설계 기사(棋士)’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시에 그녀는 ‘논외의 존재’의 완벽한 조력자였다. 이후 두 사람은 던전 바깥에서도 그와 호흡을 맞추며 헌터 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던전 바깥에서도 사람의 쓸모와 쓰임새를 명확하게 판별할 줄 알았던 그녀 덕분에 모든 과정이 수월했다.
물론 그녀 역시 아직 ‘논외의 존재’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판에 올라간 장기 말에 불과했다. 자신이 침투한 시간선에서의 기억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수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차정주가 그녀에게 부여한 역할은 체스의 가장 강력한 기물인 ‘퀸’이었다.
쿵―
쿵! 쿵!
그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벽면을 가격하는 듯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간신히 시선을 튼 ‘논외의 존재’는 마지막 순간을 조금 더 유예하기 위해 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조금 더 음미하고 싶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머지않아 ‘논외의 존재’는 유일무이한 ‘퀸’을 잃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를 잃게 된 건 우연이었다. 분명 우연이었으나 회귀를 거듭한다고 한들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연스러운 수순대로라면 ‘논외의 존재’는 그즈음에서 다른 시간선으로 옮겨 가야 했다.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논외의 존재’는 아직 그녀에 대해서 궁금한 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이 시간선을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시간선을 떠나는 대신 제 어미를 꼭 빼닮았으나 어떤 능력도 지니지 못한 차진명을 새롭게 설계한 판 위에 올렸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잖아. 무슨 짓을 해도 난 어머니처럼 될 수 없다는 거. 그런데 대체 왜 나를 이렇게…….’
지난 서른한 번의 경기를 진행하는 동안 차진명은 매번 같은 시점에서 자신에게 질문했다. 게니우스의 창에 깃든 힘을 이용하여 강제 각성을 성공시키기 직전의 일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차진명의 기억 속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지웠건만, 매번 같은 시기에 질문하는 걸 보면 이 또한 성물에 깃든 강력한 힘이 빚어낸 변수인 듯했다.
‘논외의 존재’는 그 질문에 매번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회귀를 거듭할수록 실험의 강도 또한 끔찍한 고문 수준으로 심화되었으나 차진명의 모습을 지켜보는 검은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결국 차진명은 고대의 수호신 게니우스의 권능을 빌려 세상을 멸망시켰다. 다른 한편에서 ‘시간’이라는 이름의 초월자는 자신이 선택한 예언자를 통해 시간을 되돌렸다. 그즈음에서 입술을 달싹이던 ‘논외의 존재’가 탄식 같은 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그래야만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것이 그녀를 빼닮은 차진명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차진명은 그녀와 무척 닮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 차진명의 말마따나 무슨 수를 써도 그녀의 대체품이 되지 못했다. 그 맞은편에서 차진명의 상대가 되었던 도해월 또한 그녀를 대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였지, 결국.”
차정주의 눈앞에 멈춘 눈송이는 여전히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녹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는 결정을 응시하던 차정주는 이곳에 머물렀던 도해월의 모습을 떠올렸다.
도해월은 일부러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 같았다. ‘논외의 존재’가 떠나게 되더라도 그가 쌓은 죗값은 이 몸의 본래의 주인인 차정주를 통해 치르게 하려는 속셈일 듯했다. 아니면 갱생의 기회를 주려는 건가.
과연 선택된 예언자다운 처사였다. 그동안 차정주의 영혼은 ‘논외의 존재’의 절대적인 힘에 짓눌려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영혼은 기나긴 시간 동안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며 시시때때로 절규했다. ‘논외의 존재’는 지금껏 영혼의 발악을 손쉽게 제압해 왔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논외의 존재’는 몸을 되찾은 차정주가 어떻게 행동할지 가늠해 보았다. 차정주는 분명 그동안 ‘논외의 존재’가 일군 부와 명예를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을 터였다. 앞으로는 ‘논외의 존재’가 아닌 다른 이들을 상대로 끝없는 저항을 이어 나갈 테다. 그는 차정주가 비로소 제 몸을 되찾는 미래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뭐,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다만……. 그것 하나는 못내 아쉽군.”
잠시 뒤 누구도 듣지 못할 중얼거림이 하얀 입김과 함께 울려 퍼졌다. 그건 언젠가 이곳에서 홀로 체스를 두던 ‘논외의 존재’가 ‘퀸’을 떠올리며 스스로 건넸던 질문의 대답이었다.
이내 그는 입가에 감돌던 희미한 미소를 거두면서 눈을 감았다. 그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내려앉더니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 * *
같은 시각, 눈앞을 뒤덮은 환한 빛이 걷히면서 또 다른 풍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회의실인 듯했다. 정면으로 트인 직사각형의 거대한 창을 마주한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서 다행일 망정이지.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남몰래 푸념한 뒤 후들거리던 무릎을 세우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집요하게 쫓았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드디어 얻게 되었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래,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회귀의 굴레를 끊어 놓을 단서를 곱씹던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차정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눈에 비쳤던 기이한 붉은빛을 상기하고 있을 무렵, 전신을 휘감고 있던 황금빛 기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차정주에게 반격하기 직전, 눈앞에 떠오른 푸른 활자를 곱씹어 보았다. 그 문구와 함께 나타난 기체는 전투 내내 나와 함께하며 무의식 속으로 수많은 장면을 흘려보냈다.
당시에는 전투에만 집중하느라 그 장면을 골똘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창문 너머에 시선을 두고 찬찬히 생각해 보니 나에게 흘러온 기억은 ‘오래된 예언’에 얽힌 진실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렇게 보았던 기억 속 장면들은 앞으로 내가 이행할 계획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 안에서도 나와 같은 ‘폰’들이 한꺼번에 모여…….
덜컥―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돌아왔구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에는 설연호가 서 있었다. 이내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