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3
243화. 예언자의 행마 (1)
설연호는 내 팔목을 덥석 쥐고 온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금세 안도하면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늦어져서 걱정했어. 머리고 옷이고 다 엉망인 걸 보니 차정주 후보랑 제대로 한 판 붙고 왔나 보네. 아무렴 차 후보가 널 괜히 거기까지 불렀을 리가 없지.”
나는 차분한 음성을 들으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말을 듣고 옷차림을 살펴보니 말끔하던 정장이 군데군데 찢기고 흰 셔츠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꼴이 좀 우습긴 한데, 몸은 멀쩡해. 차 후보를 만나러 가기 직전에 정점을 찍기도 했고.”
“정점을 찍었다고? 너 설마…….”
이어서 고개를 기울이면서 되묻는 말에 입매를 올려 웃으면서 대꾸했다.
“맞아. 조만간 등급 측정부터 다시 해야겠어. 결과에 S급이라고 뜨기만 해도 괜찮은 뉴스 거리가 될 테니까. 그럼 여론도 어느 정도 정리되겠지. 일단 앉자, 선배.”
그 말을 듣던 설연호는 팔목을 고쳐 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야트막한 빛이 퍼지면서 전신에 남아 있던 상흔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래, 후천적으로 성장한 S급 헌터가 나타났다는데 다른 게 뭐가 중요하겠어. 아, 그리고 이따 희찬이도 올 거야. 공규호 의원이랑 만나서 대화한 게 의외로 잘 풀린 것 같더라. 그쪽에서 받은 자료가 하나 있대. 다시 돌아오면 바로 보여 주겠다고 해서 같이 기다리고 있었어.”
설연호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문을 맺었다. 나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희찬 선배 오기 전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결과부터 말하자면 차정주 후보한테는 성물이 없었고, 다른 무언가가 그 사람 몸에 기생하고 있던 것 같았어.”
곧장 입을 연 나는 설연호에게 차정주와의 대치에서 보았던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설연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얼마 전에 나디아랑 화상 통화하면서 차정주 후보랑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전에 그때 말했던 자료가 도착해서 대강 훑어보기만 했거든. 자세한 건 다시 읽어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그 자료에 기록된 부분이랑 네가 방금 얘기한 것들이 일치하는 것 같아.”
이어서 설연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일단 차 후보 몸에 기생하던 무언가는 사라진 거고, 진짜 차 후보만 남은 거지? 그럼 차 후보는 기억을 잃은 채로 깨어나는 건가? 아까 보니까 그 부분에 관한 것도 기록이 있는 것 같기는 했는데…….”
덜컥―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공희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희찬은 나와 설연호를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어깨를 덥석 쥐었다.
“야, 너 살아 있냐? 살아 있는 거 맞지? 하여튼 겁대가리 없는 자식. 넌 거기가 어디라고 오라고 부른다고 쫄래쫄래 따라가냐? 뭔 똥개 새끼냐고, 네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채 공희찬을 외면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잔소리를 퍼붓던 그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빈 의자의 등받이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됐고, 이것부터 봐.”
뒤이어 공희찬이 들고 있던 파일철을 테이블 위로 툭 내려놓았다. 이내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와 설연호를 돌아보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공희찬이 펼쳐 놓은 자료에서 손을 거둔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맞은편에서 나를 힐긋거리던 설연호가 공희찬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자료들, 전부 사본인 것 같은데. 원본은 어디 있어? 그건 아직 공규호 의원한테 있는 거야?”
나 또한 궁금했던 부분이라 약지로 눈가를 문지르며 공희찬을 돌아보았다. 직전까지 들여다보고 있던 자료 속에는 게이트 시대가 시작되기 전, 정부 부처에서 7급 공무원으로 분하던 차정주가 저질렀던 크고 작은 비리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너 지금 나 의심하냐? 원본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쪽 수석 보좌관 통해서 받아 뒀어. 혹시 몰라서 일부러 사본으로 뽑아 온 거야. 저기, 저쪽에 있는 자료는 원본의 유무가 특히 더 중요하기도 하고.”
빈 의자의 등받이에 팔목을 걸친 채 거만하게 앉아 있던 공희찬이 자료를 턱짓하며 말했다.
“공규호 의원한테 저런 카드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저 자료는 어떻게 입수한 거래? 내부자 소행인가?”
설연호가 이어서 질문하는 동안 나는 그의 근처에 놓인 자료를 끌어와 다시 들여다보았다. 두 번째로 확인한 자료 속에는 한국대학교 교수였던 박호재가 한국마력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등급 측정 기구를 개발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당 기구가 전국적으로 상용화되는 과정에서 차정주가 자신의 등급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정황을 담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버지가 사람 매수하는 건 전문이거든. 우리 아버지 언변이 어떤지 말 안 해도 알지? 그 양반이 입만 놀리면 안 넘어오는 사람이 없어.”
공희찬은 심드렁한 기색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공규호 의원에게 이 자료는 차정주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카드이지만, 막상 그 카드를 내보이는 건 너무도 위험한 도박이기에 묻어 두고 있던 것이었다고.
그런 그의 음성에 집중하면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머릿속에서는 낯선 들판에서 접점을 벌였던 차정주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와 검을 맞대면서 느꼈던 예감이 사실이 이로써 증명된 셈이었다.
이제는 차정주의 몸에 기생하던 존재까지 사라졌으니 그가 다시 등급 측정을 진행한다면 A급이 나올 터였다. 물론 그 결과를 세간에 공개하진 않을 테다. 그런 와중에 내가 S급으로 상승했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그쪽에서도 분명 위기감을 느낄 것이었다. 일단 기생하던 존재가 사라진 차정주가 어떻게 나오려나. 이 부분은 어떤 생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 정보가 부족하다.
얼마 뒤, 설명을 끝낸 공희찬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너 거기서 어떻게 살아서 돌아온 거냐? 꼴만 보면 무슨 검으로 싸운 것 같은……. 뭐냐? 너 차 후보랑 검으로 싸웠어? 너 검 못 다루잖아. 뭔데?”
공희찬은 일순 당혹스러워하면서 계속 질문했다. 나는 그에게 어디서부터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전부터 계속 염려했던 것 같기도 하고, 눈앞에 있는 자료 또한 공희찬이 가져온 것이니 쓰임새를 결정하려면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게 나을 듯했다.
“보다시피 멀쩡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지금부터 설명해 줄게.”
짧은 고민을 끝낸 뒤 공희찬을 향해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어 보였다. 차정주를 만나서 벌어졌던 일을 그에게도 상세하게 설명하되, 성물에 관한 건 제외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그런 다음에는 차정주를 만나고 돌아온 뒤 새롭게 떠오른 계책을 그들에게 설명한 뒤 의견을 구할 생각이었다.
* * *
같은 시각, 제주도.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되찾은 차정주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건 온몸의 근육이 뒤틀린 것처럼 찌뿌둥한 감각이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서 비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후보님.”
그는 영혼 상태로 갇혀 있던 차정주가 긴 세월 동안 계속해서 곁을 지킨 인물이기도 했다. ‘논외의 존재’의 시야 너머로 엿보던 그의 모습을 맨눈으로 마주 보고 있으니 비로소 몸을 되찾았다는 실감이 선명해졌으나 그럼에도 어색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신체를 가누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상체를 세워 앉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을 뿐인데도 그 묵직한 느낌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굳이 셈하자면 영혼인 채로 수백 년도 넘게 갇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차정주는 직접 숨을 쉬어 보면서 초점을 다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불거졌다.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비서가 다급하게 물었다. 차정주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그에게 손을 내저었다.
“물 한 잔만 가져다주게. 그거면 충분하니.”
잠시 뒤 비서가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내어 왔다. 그에게 잔을 받아서 물을 마시는 순간 정신이 한층 또렷해졌다. 입술을 적신 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너무나도 생경했다.
“잠시 쉬어야겠어. 자네는 나가서 대기하게.”
그 말을 들은 비서는 사사로운 질문을 건네지 않고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홀로 남은 차정주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면서 자신을 살려 놓은 도해월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베푼 관용인지 모르겠지만, 난 어떤 것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자신의 몸을 차지했던 ‘논외의 존재’가 마지막으로 실행하려던 새로운 작전을 떠올렸다. 조만간 그 작전이 개시되고 나면 도해월은 자신을 살려 놓은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뭐, 다 죽어 가는 마당에 그런 감상을 품을 여력은 없겠지만.”
이어서 그는 들고 있던 잔을 입술에 대고 천천히 기울였다. 그 틈으로 흘러드는 물을 삼키면서 도해월을 처리한 뒤 그가 얻게 될 것을 상상해 보았다. 이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탐욕으로 목이 말랐다.
* * *
나는 앞선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차정주를 그곳에 살려 두고 온 이유를 설명했다. 거기까지 듣던 공희찬이 인상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뭐, 기회를 준다고? 너 진짜 정신 나갔냐?”
그런 그의 뒤로 힘없이 밀린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마를 턱 짚으면서 고개를 내젓던 그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 후보는 오랫동안 몸을 빼앗겼던 사람이야. 본래의 영혼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지켜보고, 만약 이전이랑 달라진 게 없다면 예정대로 손을 써야지. 재단 쪽은 다 준비됐다고 했지?”
태연하게 팔짱을 끼우던 나는 설연호에게 질했다. 설연호 또한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오늘 오전에 오한빈 기자랑 통화했어. 전부 준비됐고, 보도 날짜만 정하면 된대. 주해나 헌터가 우리 길드에 심어 놓은 심복이 누군지 며칠 전에 확정돼서 계속 지켜보는 중이야. 정인이 말로는 오늘 내로 그 사람들이 정보를 어디로 빼내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했고, 그것까지 정리되면 바로 넘겨주겠대.”
한편 근처에 선 공희찬은 나와 설연호를 부릅뜬 눈으로 빤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등급 측정은 이틀 뒤에 바로 진행할 수 있게 준비해 줘. 혹시라도 한마연 쪽에서 결과에 손대는 일이 없게 길드 내부에 소식을 퍼뜨려 두고. 홍보 팀 쪽에도 결과 나오는 대로 기사 나갈 수 있게 보도 자료 미리 준비하라고 해.”
그 말을 듣고 있던 공희찬은 결국 허공에 삿대질하면서 소리쳤다.
“야, 그래서 차 후보는 어쩔 건데. 그쪽에서 입장 표명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다른 사람들 몰래 따로 모아 놓은 팀은 또 어쩌려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공희찬을 먼저 자리에 앉혔다. 이윽고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선배도 알다시피 한마연은 조만간 우리 길드 관할 던전을 거점 삼아서 던전 브레이크를 터뜨릴 생각일 거야. 만약 차 후보의 생각이 바뀌었다면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겠지. 반대로 예상대로 일이 터진다면……. 그때는 예정대로 차 후보부터 단죄해야지. 그다음은 차진명이고.”
창문 바깥을 내다보면서 말을 잇던 나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차 후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지금 바로 확인할 수 있어. 설마 내가 여기서 망부석처럼 기다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뒤이어 눈을 감고 스킬을 전개하는 순간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그와 동시에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