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4
244화. 예언자의 행마 (2)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 어느덧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몸을 되찾은 차정주의 선택은 파도처럼 몰아치는 시간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레 드러났다.
일찌감치 예상했던 대로 그는 갱생의 기회를 마다하고 이전과 같은 행보를 보였다. 그 내막을 전부 알고 지켜보는 나의 눈에는 그의 간절한 모습이 처절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더불어 눈에 띄는 변화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에덴 길드와 차정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본래의 몸을 되찾은 차정주는 과거 ‘논외의 존재’가 직접 세운 전태무 이사장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인지 노환으로 알려진 에덴의 마스터 또한 부길드장인 주해나 대신 전태무를 후대 마스터로 지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주해나는 우리 길드에 심어 놓은 세작을 통해 나를 해칠 계획을 꾸리려는 듯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즈음에서 상념을 걷어 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검푸른 심해처럼 물든 이곳은 몇 시간 전, 던전에 입장한 설연호가 아티팩트를 사용해 개방한 아공간의 내부였다.
정원 전자의 이성욱 부회장이 개발에 직접 참여한 이 아티팩트는 그가 몇 달 전에 설연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정예 팀을 꾸릴 때부터 유용하게 사용해 왔었다.
내가 아공간 내부에 들어온 건 처음이지만, 이미 설연호를 비롯한 정예 팀 소속 헌터들은 주기적으로 이곳에 모여 전술 구상을 포함한 작전 관련 회의를 진행해 왔었다. 며칠 전, 설연호는 세작들의 눈과 귀를 완전히 피하는 데 이만큼 적합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신기해? 아, 맞아. 해월이 네가 여기 들어오는 건 처음이지? 큼, 큼. 마스터님, 아공간에 들어온 소감이 어떠십니까? 만족스러우십니까?”
그때 홍원하가 내부를 가만히 둘러보던 나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장난스럽게 치대는 그를 힐긋거리다가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직접 보니 느낌이 다르네.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공간은 물건이나 무기를 보관할 수 있는 것 정도였으니까. 사람이 이렇게 많이 들어가 있는데도 이렇게 안정적인 상태로 외부랑 차단될 수 있는 걸 보니 앞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이성욱이 설연호에게 아티팩트를 선물해 주며 덧붙인 설명에 따르면 해당 아티팩트는 더 이상 생산할 계획이 없는 귀한 물건이라고 했다. 상용화되고 나면 물건을 남용할 가능성이 상승할지도 모른다는 예측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설연호에게 팔찌를 선물한 건 그의 절친인 나디아에게 무기와 아티팩트를 제공하던 일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 덕분에 정원 전자와 도해 길드의 관계가 여전히 우호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세간에도 자연스레 전할 수 있었다.
그즈음에서 생각을 멈추고 홍원하를 제자리로 보낸 뒤 비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몇 달 전에 꾸린 정예 팀 소속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긴장된 표정을 지으면서 저마다 대화하는 이들의 이목을 모으기 위해 손뼉을 부딪쳤다.
“입구 개방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열리면 바로 던전 공략과 함께 작전에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작전에 관해 다시 한번 설명하도록 하죠. 오늘 우리의 목적은 폭발을 앞둔 던전의 최종 보스를 공략하여 이곳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지 못하도록 막아 내는 겁니다.”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가는 동안 곳곳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동안 스킬을 사용하여 미래의 일을 수도 없이 내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이 사태를 계획한 차정주의 의도 또한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작전에 실패한다면 전생의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처럼 남산타워가 무너지고 용산구 전역이 쑥대밭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 책임은 던전의 관리 책임이 있는 우리 길드와 내가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었다. 또한 전생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곳에서 벌어질 사태가 던전 관리 소홀로 인해 벌어진 재난이라고 매도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보는 것으로 알려진 내 능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냐며 몰아갈 것이기도 했다.
“이제 곧 입구가 열릴 겁니다. 던전에 진입하고 나면 부길드장의 안내를 따라 움직이세요. 세작들이 여러분을 발견하고 나면 곧바로 반격할 가능성이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도록 합니다. 사전에 공지했던 대로 저는 추후에 다시 합류하겠습니다.”
쉬이익―
뒤이어 덧붙인 설명을 끝으로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아공간의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 백모래로 뒤덮인 사막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던전에 남아 있던 설연호는 거센 돌풍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모두 이쪽으로 집결하세요. 사전에 고지했던 대로 세작들은 이 던전을 순찰하기 위해 모였다고 인지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전, 세작들의 통신 기기를 통해 확인해 보니 던전이 폭발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부를 점검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더군요.”
설연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던전 내부에 진입했다. 지난 석 달 동안 정예 팀과 함께 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내다본 미래에 따르면 이곳에서 내가 막아야 하는 변수는 단 하나였다. 그 변수를 막고 나면 작전의 목적을 무리 없이 달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부탁할게, 선배. 이따 보자.”
잠시 설연호의 곁에 다가간 나는 그의 귓가에 짧게 속삭였다. 이내 헌터들을 데리고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둔 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같은 시각, 오한빈은 리포트 현장을 둘러보면서 호흡을 골랐다. 상공에서는 길었던 겨울의 끝을 알리는 봄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여전히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면서 시야가 한층 선명해졌다.
이곳은 효신 그룹 주가 조작 사건 리포트를 시작으로 현재는 사망한 강효서와 얽힌 후속 보도를 위해 조사하던 공장 건물 앞이었다. 현재는 오한빈과 취재 팀에게 뒤를 밟힌 공장 관리자가 내뺀 상태였다. 물론 그들에게는 이곳에서 마석이 대량으로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자료가 충분히 있었다.
머지않아 진행될 리포팅은 총선을 목적지로 삼은 긴 여정의 신호탄이 될 터였다. 오늘 오후에 뉴스가 방영되고 난 뒤 곧바로 후속 보도를 터뜨리며 총선 직전까지 몰아붙일 예정이었다. 그러다 차정주 후보가 속한 정당에서도 그와의 절연을 선언하게 되면 계획했던 대로 차 후보는 자연스레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었다.
금세 표정을 가다듬은 오한빈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앞에 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준비되셨으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 너머에 있던 누군가 오한빈을 보면서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메라의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머지않아 카메라에서 붉은빛이 떠올랐다.
“인적이 드문 어느 공장 건물. 누군가 다급하게 도망친 듯 내부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과거 검찰 조사 도중 사망한 헌터 강모씨가 관리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량의 마석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불법으로 보관된 마석의 사용지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오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리포트를 시작했다.
* * *
한편 주해나는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예민하게 가늠하고 있었다. ‘비가시화’ 스킬을 사용하여 모습을 감춘 뒤 자신이 심어 놓은 세작들과 함께 던전 내부에 들어온 그녀는 외따로이 남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막 지형의 던전인 탓에 사박이는 모래알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휘이익―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돌풍이 계속해서 불어오는 중이었다. 몬스터의 기척마저 느껴지지 않는 사막의 벌판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머릿속에서 잡념이 불어났다. 그러다 결국에는 어젯밤 에덴 길드 사무실에서 만났던 전태무의 모습이 떠올랐다.
깊은 밤, 어두워진 사무실에 홀로 남아 분노를 삼키고 있던 주해나를 찾아온 건 전태무였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그는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넌 나한테 안 돼, 주해나. 그러게, 그 옛날에 네가 날 거절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볼래? 그럼 내가 마스터 자리에 올랐을 때 널 내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면서 주먹에 힘이 실렸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지?’
주해나는 곰곰이 상황을 되짚었다.
차정주 후보는 어느 순간부터 마스터와 숱한 만남을 갖더니 끝내는 마스터를 제 뜻대로 설득한 듯했다. 노환의 마스터는 주해나가 최성일 보육원장을 놓친 날부터 그녀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더니 끝내 자신의 후임 마스터로 전태무를 지목했다. 그 과정에서 차정주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몇 달 전부터 그녀가 이전에 알던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는 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도해월을 그의 개인 공간으로 초대했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을 때가 변화의 시작점인 듯했다.
‘도해월 그 자식은 차 후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도해월, 모든 것은 도해월을 만났던 그때부터 시작됐다. 십수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던 간담회 자리에서부터 지금까지 지긋지긋할 만큼 지독하게 그와 엮이고 있었다.
그중에서 그녀를 가장 분노하게 하는 건 도해월은 계속해서 자신을 모른 척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그동안의 주해나를 무척 괴롭게 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그 녀석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끝내 탄식과 함께 중얼거릴 무렵 근처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는 듯했다.
‘역시 도해월인가?’
거센 바람으로 인해 멀리서 나타난 형상이 누구인지 쉽사리 구분할 수 없었다. 주해나가 이곳에서 도해월을 기다리고 있던 건 그가 스킬을 통해 미래를 확인하고,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를 마주할 기회를 더는 만들 수 없게 되리라는 예감 때문이기도 했다.
얼마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도해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해나는 스킬을 사용하여 세운 막 너머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말랐다.
후임 마스터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전태무에게 패배한 이상, 그녀는 더는 에덴에 남아 있지 못하게 될 터였다.
주해나와 그녀의 측근들이 에덴에서 정리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새 마스터를 향한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공고히 하고 세력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건 현 마스터가 직접 정한 규칙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주해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전태무라면 날 내보내는 데서 그치지 않을 거야. 그 긴 시간 동안 경쟁하면서 서로를 죽이려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번에도 먼저 수를 쓰려고 하겠지. 행여 죽이지 않더라도 헌터 사회에 더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능력 자체를 꺾어 놓으려고 할 수도 있고.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보고 가자. 지금이 아니면 더는 대화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생각을 이어 나가던 주해나는 스킬을 풀고 도해월 앞에 몸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요, 도해월 마스터.”
길었던 상념과 별개로 주해나가 내놓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탓이기도 했다.
이대로 등이 떠밀려야 한다면, 그 등을 떠미는 사람은 에덴의 마스터도 전태무도 아닌 도해월이기를 바랐다. 그것만큼은 자신의 의지로 택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