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 예언자의 행마 (3)
일순 눈앞의 풍경이 불안정하게 일렁이더니 막이 걷히면서 주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요, 도해월 마스터.”
비로소 마주한 주해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는 걸 보니 울컥 치솟은 감정을 삼키려 애쓰고 있던 듯했다.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게 벌써 몇 년 전이죠, 우리? 간담회에서 잠깐 마주쳤던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꽤 오래됐네요.”
담담하게 말을 잇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 길드 내부에 파견한 세작을 통해 내부 정보를 빼내는 것으로 모자라 던전 중심부에 S급 마석까지 심어 놓도록 유도했으면서 인사가 나오는 건가? 의문을 품던 나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면서 입을 열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겁니까?”
그렇게 묻는 순간 분노가 차츰 치솟았다. 이내 그녀와 거리를 좁히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차정주 후보와 함께 도해를 무너뜨리려고 기를 쓰던 주해나 부길드장을 왜 여기서 마주쳐야 하는 거죠? 설마 내가 여기서 어떻게 죽는지 직관이라도 하러 온 건지요. 이 던전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 당신이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주해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간담회에서 그녀를 마주쳤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언젠가 우리가 마주친 적 있지 않냐고 묻던 그녀의 질문을 부정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삼켜 왔던 사사로운 감정, 특히 미련과 후회 같은 것이 고개를 들까 싶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반대편에 서서 대치하는 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불쑥 끼어들고 나면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계획을 그르칠 가능성이 존재했고, 나는 그런 감정을 일찍이 차단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그녀를 마주하고 있으니 쉴 새 없이 부는 돌풍과 함께 잠들어 있던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동안 주해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눈을 깊이 감으면서 입을 열었다.
“최근에 전태무 이사장이 에덴의 후임 마스터로 낙점됐다는 소문이 돌았던 건 이미 알고 있겠죠. 아마 내일쯤이면 에덴 쪽에서 공식 발표를 내놓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 처지도 위태로워지겠죠.”
주해나는 그즈음에서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에덴에서의 내 입지는 완전히 추락했어요. 에덴에서 머무르기는커녕 전태무의 손속에 자비를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죠. 뭐, 전태무 이사장이라면 날 이런 던전에 묻어 버리려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가 여기 들어온 걸 알게 됐을 때 가장 좋아할 사람은 전태무 이사장이려나.”
내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몇 번이고 붙잡는 걸 뿌리치고 혼자 잘 살겠다고 뛰쳐나갔으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로서는 그녀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 정말 어이가 없군요. 내가 만약 주해나 부길드장이었다면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바로 도망쳤을 겁니다. 여기서 날 보고 주절거릴 게 아니라! 대체 왜 이런 위험한 곳에 들어온 겁니까? 아니, 지금 제정신이긴 한 겁니까?”
한바탕 몰아붙이고 난 뒤에도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각성자 등급이 S급으로 상승한 이상 원한다면 이곳에서 최대 적수 중 한 명인 그녀를 직접 처리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주해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내 내 멱살을 힘껏 쥐면서 소리쳤다.
“이봐요, 도해월 마스터. 말이면 다인 줄 알아요?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내가 뭘 위해서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날 모르는 척한다고?”
“지금 뭐 하는 겁니…….”
그대로 주해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문을 닫기도 전에 그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도해월 마스터를 내 손으로 직접 죽이기 위해서였어요. 도해월 마스터가 여기 들어온 이상 이 던전은 공략에 성공할 거고, 그렇게 되면 내가 세운 계획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있으니 오래전에 맡았던 라일락 향기가 느껴졌다.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들어 볼 속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사라지고 난 뒤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미래를 보는 사람이 없어졌으니 이 던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속수무책으로 다 죽어 버리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상황이 다시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돌아설 테고, 그럼 마스터의 결정도 뒤바꿀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일순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쥐고 있던 멱살을 툭 놓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주 오래전에, 보육원에서 도망치려던 날 붙잡았던 도해월 마스터의 말을 들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무작정 도망치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여기서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던 말을 들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내몰리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강준희를 그토록 허무하게 보내고 나서 계속해서 곱씹었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만약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강준희에게도 지난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랬다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간절한 물음이 힘없이 탄식하듯 쏟아 내는 주해나의 모습과 문득 겹쳐 보였다.
“네가 날 모른다고 대답하고 돌아섰던 날부터 널 계속 원망했어. 그러면서도 보란 듯이 날 엿 먹일 때마다 죽을 만큼 미웠고. 결국에는 내 손으로 널 죽여야만 속이 시원하겠다고, 우리 사이에 남은 건 그런 지저분한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평생 꿈꿔 왔던 목표가 무너지고 결국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주해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주해나가 꿈꿔 왔던 평생의 목표. 그건 에덴의 마스터가 되는 것일 터였다. 나는 문득 주해나가 지나온 서른 번의 삶을 되짚어 보았다.
그녀가 에덴의 마스터 자리에서 밀려난 건 이번 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물꼬를 틔웠다.
그녀는 나의 멱살을 놓고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보육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찬찬히 재생되는 듯한 환영이 그려졌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더 오래전으로 회귀했다면 지금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니,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주해나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 거라면, 그 말이 사실이라면 또 다른 미래로 나아갈 여지를 마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강준희처럼 허무하게 죽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면…….
그러한 가정 앞에서 내가 그녀에게 제시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 비가시화 스킬, 효력이 정확히 어떻게 되죠?”
짧은 고민을 끝으로 되묻는 순간 주해나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 *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지형을 가로질러 던전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그러다 익숙한 무리를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수많은 헌터들이 던전의 최종 보스인 거미 형태의 몬스터와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쉬익―
사람 몸집보다 열 배는 거대한 녀석은 쉴 새 없이 거미줄을 뿜어내고 있었다. 웬만한 밧줄보다 두껍고 단단한 그것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순간 묵직한 바람 소리와 함께 헌터들의 총성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탕! 탕!
“최보윤 헌터! 당장 반대편으로 피하세요! 뒤쪽에서…….”
“이번에는 제가 나서겠습……. 다른 분들은 어서……. 이동하세요!”
돌풍으로 인해 차림새가 엉망이 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현장에서 활보하는 헌터들을 살펴보았다. 이내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정면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이윽고 대열의 끝에서 헌터들을 서포트하던 설연호가 날 발견하고 재빨리 달려왔다. 그는 혼자서 돌아온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 왔구나. 그, 잘 해결한 거야?”
우선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헌터들의 모습을 마저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애초에 살아서 나가겠다는 기대 없이 들어온 것 같았어. 그건 그렇고, 세작들은 어떻게 됐어?”
“전부 기절시킨 다음에 속박 스킬까지 걸어서 아공간에 넣어 뒀어. 뭔가 이상이 생기면 이걸로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설연호는 자신이 착용한 팔찌를 내보이면서 말했다. 은색 팔찌 가운데 박힌 보석이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무언가 변화가 생긴다면 그 보석은 붉게 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휘이익―!
방심한 사이 다시 한번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눈대중으로 봐도 몸집이 족히 팔 미터는 넘어 보이는 최종 보스는 굴하지 않고 헌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설연호는 곧바로 대열에 합류했다.
“지금부터 현장은 제가 지휘합니다. 부상 인원은 곧장 뒤쪽으로 이동하세요. 녀석의 기세가 절반쯤 꺾인 듯하니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귓가에 꽂은 통신 기기를 통해 지시를 내리는 순간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마저도 잠시, 뒤쪽에서 대기하던 설연호가 다시 한번 스킬을 전개하여 치유 필드를 생성했다.
부상 인원이 하나둘씩 그의 근처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뒤 눈을 감고 모든 헌터들을 대상으로 ‘체력 증진’ 스킬을 전개했다. 그런 다음 최종 보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렇게 짧은 숨 고르기가 지나고 허공을 가르는 총성과 함께 전투가 재개되었다. 장총을 고쳐 쥔 안진영이 근처에 선 나를 보며 씩 웃더니 그 또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발목을 감싸는 모래의 열기는 무척 뜨거웠으나 움직임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들판을 자유자재로 활보하며 전투에 임했다. S급으로 상승한 뒤, 갑작스레 치솟은 마력을 온전하게 컨트롤하기 위해 훈련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전투에 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탕!
이 느낌을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한 발의 총성만으로 최종 보스가 휘청일 만한 타격을 줄 만큼의 위압감이 손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헌터들의 대열을 흩뜨리지 않으면서 그들의 전술을 지휘해 나갔다.
그렇게 헌터들의 도움을 마지막 공격을 감행한 순간.
끄극. 끅. 꺼걱!
거동을 멈춘 거미가 잔털이 박힌 검은 다리를 파들거리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계속해서 거미줄이 뿜어져 나왔으나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축 늘어지기만 했다.
쿠궁.
쿵.
그때 거대한 굉음과 함께 몬스터의 다리마다 힘이 풀리면서 거대한 몸체가 지면에 내려앉았다.
탕!
마지막으로 장총을 거머쥔 안진영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최종 보스의 숨이 멎으면서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던전 의 최종 보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사막의 풍경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준희를 허무하게 떠나보낸 내가 주해나에게 할 수 있는 건 제 삶의 방향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결정은 그녀의 몫이었다.
이윽고 눈앞으로 환한 빛이 퍼지면서 주위의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끝내 주해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거센 바람에도 씻기지 않는 라일락 향기만 맴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