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7
247화. 예언자의 행마 (5)
한편 어두운 방에 앉아 있던 차진명은 노트북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서는 테이블의 중심을 차지한 현선민과 ‘한국마력연구소 임상시험 피해자 유가족 협의회’ 소속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양옆에 착석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저걸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금수를 살려 두니 별꼴을 다 보네.”
현선민을 뚫어질 것처럼 응시하던 차진명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차진명이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몇 년 전, 그녀가 성문의 비리를 폭로한 뒤 자신의 행보에 제약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녀가 강효서와 어릴 적 친분이 있었던 것을 빌미로 효신 그룹의 주가 조작 뉴스를 터뜨리는 데 일조해 자신의 조력자를 앗아 간 일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도해월과 손을 잡고 자신이 숨겨 왔던 비밀을 낱낱이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치솟는 분노에 이를 갈던 차진명은 전날 저녁에 NBS에서 보도된 뉴스를 곱씹어 보았다. 오래전, 강효서와 관련하여 적당히 묻어 두었던 의혹들을 다시 들춘 건 예상대로 오한빈 기자였다.
오한빈의 뉴스가 쏘아 올린 신호탄은 자연스레 한국마력연구소의 박호재 소장과 그와 오랜 친우인 차정주에게 향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단연 차정주가 속한 바른미래당 정당이었다. 정당 소속 의원들과 총선 선거 캠프 관계자들은 차정주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그는 아직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중이었다.
차진명은 얼마 전 차정주의 측근을 통해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뉴스가 터지고 난 뒤 그는 자신의 저택에 기거하면서 사태를 해결할 창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변인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정당마저 슬슬 손을 뗄 기미를 보이는 터라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은 듯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있다지. 똥개처럼 부려도 시원찮을 어린 녀석한테 휘둘리고 있다는 건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나 보군.’
더는 차정주에게 밑질 게 없어서일까. 아니면 세상에 남은 미련이 없어서일까. 아버지인 차정주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차진명은 이제 더는 아쉬울 게 없었다.
이내 자세를 바로잡은 차진명은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화면 속 현선민이 한국마력연구소에서 진행된 실험에 비각성자까지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녀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극악무도하고 비윤리적인 실험의 총책임자는 박호재 연구소장이 맞습니다. 하지만 해당 실험을 실질적으로 전개한 인물은 바른미래당 소속 차정주 후보였습니다.
이윽고 숨을 고른 현선민이 발언을 이어 나가는 순간 쉴 새 없이 터지던 셔터 서리가 일제히 정지하면서 회견장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실험을 진두지휘했던 건 차정주 후보가 아닙니다. 차정주 후보와 박호재 연구소장의 자격을 이어받은 두 인물의 이름을 밝히기 전에, 이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화면 속의 현선민은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말을 이었다.
―차정주 후보가 기획한 실험의 목적은 비각성자를 강제로 각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차진명은 그즈음에서 노트북의 전원을 껐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곧이어 자신과 성민주의 이름이 거론될 차례인 듯했다.
이어질 내용이 예상되는 순간, 불쾌한 감정이 전신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놈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진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건 사라질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녀석 뜻대로 돌아가는 꼴을 순순히 지켜볼 수는 없지. 예정일을 앞당겨야겠어.”
뒤이어 홀로 중얼거리던 차진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어둠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그의 눈동자가 짙은 분노로 형형하게 빛났다.
* * *
노트북 화면 속 현선민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야위어 있었다. 그럼에도 목소리만큼은 여느 때처럼 단단했고 그 안에는 짙은 호소력이 깃들어 있었다.
―이능단속관리본부 소속 차진명 헌터 또한 차정주 후보가 기획한 실험에 참여했으며, 그 실험에서 유일하게 강제 각성에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차분하게 진행을 이어 나가던 현선민이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실을 언급하는 순간 회견장 내부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잠시, 주변에서 대기하던 길드 연합 소속 헌터들에 의해 분위기가 정리되면서 현선민이 마저 말을 이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질의응답을 진행한 뒤 유가족 협의회가 정부에 요청하는 사안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기자회견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결국 이런 날이 오긴 하는구나.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마냥 통쾌하지는 않네. 그래도 끝까지 가 보면 달라지겠지?”
그때 기자회견 내내 침묵하던 설연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선배 말대로 이제 시작이니까. 그럼 이것부터 마저 확인해 볼까. 아마도 라이벌이었던 전태무 이사장에 관한 게 나오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한숨에 흘려보낸 뒤 주해나가 남긴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이어서 뒤쪽에 박혀 있던 유에스비를 분리한 뒤 노트북 옆면에 꽂아 넣었다.
뒤이어 화면에 나타난 건 예측대로 전태무의 행적과 관련한 자료들이었다. 수십 개의 폴더로 분류된 목록을 확인해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전태무가 이사장으로 부임한 뒤 특별반 학부모들에게 받았던 비자금 명단이었다.
이어서 확인해 보니 비자금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저지른 폭력과 강요 등 전태무가 저지른 비리들이 담겨 있었다. 차분하게 목록을 훑던 나는 주해나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텍스트 파일을 클릭해 보았다.
[선악과를 네 손에 넘길게.]과연 그녀답게 군더더기 없는 짧은 문장만 남아 있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나는 목걸이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우선 이건 그대로 취합해서 오한빈 기자한테 넘겨 줘. 한마연에서 각성자 등급 측정 기구를 건드린 사안은 아직 보도 전이니 이 자료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야.”
주해나가 남긴 메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희찬이한테 듣기로 그쪽도 피해자가 생각보다 많다고 하더라. 네 말대로 이것까지 있으면 불씨는 확실하게 붙겠어.”
지잉―
그때 근처에 놓인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나디아였다.
―접니다, 도해월 마스터. 급하게 전할 얘기가 있어서 연락했어요. 혹시 지금 설연호 부길드장도 함께 있나요?
“네, 바로 말씀하시죠.”
나디아의 음성은 무척 다급해 보였다. 나는 설연호도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방금 방패가 반응하면서 이상한 장면을 봤어요. 장소는 숲 지형의 던전이었고, 중심부에 심긴 거대한 나무 가운데 게니우스의 창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진명 헌터가 그 창을 쥐고 강력한 마력을 흘려보내더군요.
잠시 숨을 고른 나디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방패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무언가 불길한 일을 앞두고 강하게 경고하는 듯하니 우리도 서둘러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던전이 터져 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두 분도 당연히 동의하시겠죠?
나디아의 말마따나 방패가 반응한 건 일종의 경고일 터였다. 결전의 날이 앞당겨졌으니 서둘러 대비하라는 전언이기도 할 테고.
“하지만 아직 해당 던전의 위치가 확보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뉴욕 연구소 쪽에서도 거기까지는…….”
그때 휴대전화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설연호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저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던전 위치가 확보되는 대로 기별을 전하도록 하죠.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듣던 중 다행이네요. 그럼 우리 쪽에서도 준비되는 대로 한국으로 넘어갈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디아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설연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거야? 방패가 보여 준 장면이 던전 내부인 걸 생각하면 천리안 스킬로도 확인이 어려울 것 같은데.”
가만히 손을 쥐었다가 펼쳐 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에 집결된 마력의 흐름을 가늠하면서 짧은 고민을 끝내고 그에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긴 한데, 걱정할 건 없어. 제주도에서 차 후보를 만나고 왔던 날에 괜찮은 방법을 하나 찾았거든.”
뒤이어 태블릿을 가져와 현선민이 일전에 공유해 준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앞으로의 일정을 확인해 보니 일주일 뒤에는 한국마력연구소 측에 진상 규명을 요청하고 차정주의 후보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위로 전용 펜슬로 그 위에 붉은 표식을 남겨 두었다.
* * *
일주일 뒤, 광화문광장.
지난 한 주 동안 수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릴 만한 사건들이 연달아 수면에 떠올랐다. 그리고 원치 않게 그 중심에 선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국마력연구소에서 벌인 임상 시험에 강제 동원된 뒤 끝내 고통스럽게 사망한 어느 비각성자의 아버지였다.
드넓은 광장에는 스크린과 무대가 설치된 거대한 트럭이 놓여 있었다. 가림막처럼 놓여 있는 트럭 뒤에서 대기하던 남자는 잠시 고개를 빼고 바깥을 확인해 보았다.
[학살자에게 국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차정주 후보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피해자의 짓밟힌 존엄을 회복하라!] [독립적 진상조사기구를 구성하라!]시위가 시작된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으나 사람들의 열기는 식지 않고 있었다. 하나같이 결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남자는 뒤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숙였다. 현선민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앉아 있을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죠?”
그때 근처에 있던 안지유가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는 서둘러 눈가를 훔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가출인으로 신고된 딸의 행방을 알려 주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해 준 이들이 바로 안지유를 포함한 재단 소속 헌터들이었다.
“그러네요. 그런데 혹시……. 오늘 그분도 이 자리에 오시는 겁니까?”
“네? 그분이요? 아, 도해월 마스터 말씀하시는 거죠? 음, 잠깐 다녀갈 거라는 말은 전해 들었어요. 그런데 오늘 사람이 많이 몰려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예요.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그쪽도 지금 여러모로 시끄러워서요.”
남자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자신의 자유 발언 순서를 기다리며 원고를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으로는 도해월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현선민의 말에 따르면 이때껏 자신을 도운 건 재단 소속 헌터들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죄인들의 행각을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거센 파도처럼 밀어붙인 건 도해월 마스터였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도해월은 지난 몇 달 동안 형편이 어려운 자신을 길드 차원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숱하게 있었던 위협을 막아 준 것도 그가 중심이 되어 세운 길드 연합 소속 헌터들이었다. 안지유에게 공연히 질문했던 것도 자신의 또 다른 은인과 다름없는 그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이제 올라가실게요.”
그때 안지유가 다시 다가와 그를 무대 위로 안내했다. 남자는 거동이 불편한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무대로 올라갔다.
그 순간 수많은 사람과 일제히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딸이 사망하기 전,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적어 놓았다던 문장이 떠올랐다.
[결국 나한테 남은 것은 무엇일까. ……. 뭐든 기억할 수 있어야 그런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어? 모르겠다. 세상이 끝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남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죄인들의 손에 휘말린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낱낱이 고할 생각이었다. 뉴스와 기자회견 자리에서 차마 전하지 못했던 그 고통의 진상이 이곳에서 드러날 터였다.
남자는 자신의 은인이 광장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믿으며 현선민이 건넨 마이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