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예언으로 거듭난 기도 (1)
광화문광장에서 진상 규명 요구 시위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린 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는 위치에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현장에는 수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있었으나 모두가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정면에 놓인 트럭 무대에 오른 남자가 발언을 이어 나가는 동안 모두가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이따금 눈가를 훔치거나 주먹을 힘껏 움켜쥐며 분노를 삼키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재단 소속 헌터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유가족 협의회가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내고 난 뒤부터 그들 단체에 후원금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국회 청원만 해도 다섯 개가 넘게 올라왔다고 했다.
오한빈이 터뜨린 뉴스의 여파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흘 전, 한국마력연구소 측에서 등급 측정 결과를 임의로 조작한 경우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NBS에서 단독으로 보도한 뒤 다시 한번 거센 파동이 일어났다.
오한빈의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마력연구소는 그동안 몇몇 고위층 인사에게 거액의 비자금을 받고 본인 혹은 타인의 등급 측정 결과를 멋대로 조작했다고 했다. 해당 사태에 휘말린 피해자들은 전생의 내가 겪었던 것과 흡사한 경험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 모두 유의미한 신체 변화를 감지했으나 연구소에서 측정한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은 물론 그들이 속한 집단의 멸시를 받으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고, 그중에는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도 존재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반면 논란의 중심에 선 한국마력연구소는 밝힐 입장이 없다면서 침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성의한 대응을 보면서 깊은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이트 시대가 시작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헌터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연구소가 숨긴 추악한 비밀에 경악하며 오늘 이 자리에 이토록 많은 이들을 불러냈다.
한편 무대에서는 자신을 임상 실험 피해자 중 비각성자였던 한 여성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남자가 발언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마이크를 쥐고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심호흡하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딸이 떠나기 전에 자기가 쓰던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적어 두었더군요. 뭐든 기억할 수 있어야 자신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셈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약물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었거든요, 우리 딸이. 모쪼록 제 딸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적어도 이곳에 계신 분들만큼은 그 아이가 남겨 놓은 생생한 고통의 기록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형 스크린 화면에 비친 그는 나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딸이 적어 놓은 것처럼 기억할 수 없으면, 기억하지 않으면 모든 게 속수무책으로 잊히고 말 테니까요. 저도 이곳에서 함께 목소리를 보태 주신 여러분을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잔혹한 학살이 지나가고 난 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에게 남은 건 바다처럼 나날이 깊어져 가는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방대한 파도가 되어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밀려갔다. 나는 남자와 함께 공명하며 그가 느끼는 감정을 제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소중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그때 남자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현선민이 입을 열었다. 이내 굳은 얼굴로 발언을 이어 나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맞은편에 모인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아 보았다.
오늘 내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천리안’ 스킬을 사용하여 앞으로 벌어질 미래의 일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 장소로 광장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내가 실행할 작전의 목적이 세상의 멸망을 막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그 이후의 미래로 나아가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손끝에 마력을 응집시키는 순간 차정주와 전투를 벌이던 때에 나타났던 황금빛 기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현선민의 유도를 따라 각자 들고 있던 피켓에 적힌 문구를 외치기 시작했다.
“학살자에게 국민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차정주 후보는 사퇴하라!”
“사퇴하라! 사퇴하라! 사퇴하라!”
이윽고 손가락 사이를 맴돌던 황금빛 기체가 한목소리로 외치는 사람들 사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몸집을 불리던 기체는 이내 부드럽게 굽이치며 허공을 유유히 흘러 다녔다.
손가락 사이에서 가느다란 실처럼 피어올랐던 황금빛 기체는 사람들의 염원을 흡수하기라도 한 듯 커다란 구름처럼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이윽고 눈앞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손아귀 안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시간의 행렬이 스쳐 지나는 것이 느껴졌다. 상공에서 구름처럼 떠다니던 황금빛 기체 또한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건지 주변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감돌았다.
* * *
같은 시각, 저택의 거실에 앉아 있던 차정주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거칠게 던져 버렸다. 태블릿의 모서리가 바닥과 부딪히면서 뭉툭한 소음이 일었다.
―피해자의 짓밟힌 존엄을 회복하라! 회복하라! 회복하라! 회복하라!
영상이 여전히 재생 중이었던 건지 태블릿에서는 광화문광장 시위 현장의 음성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직전까지 그 현장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차정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을 뒹굴던 태블릿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내가 어떻게 되찾은 몸인데. 어떻게 되찾은 삶인데! 고작 그따위 녀석 때문에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는 꼴을 멍청하게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제기랄!”
이내 온몸을 떨면서 분노하던 차정주가 허공에 대고 부르짖었다. 무엇이든 손에 집히는 대로 던져 버리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기물들이 나뒹굴며 난장판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집안이 이렇게 된 건 몇 시간 전, 비서가 전한 소식 때문이었다. 굳은 얼굴로 나타난 비서는 자신이 정당에서 제명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왔다.
차정주의 손을 놓은 건 정당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능청 승격을 위한 물밑 작업의 일환으로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기업과 국가 기관의 고위층 인사들 모두가 그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그 사실이 결정된 순간 곧바로 해외로 도피하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출국 금지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고발이 시작된 순간에만 해도 끝까지 차정주의 편에 서려고 했던 이들이 하나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한 건 황선규 의원과 저택 바깥에서 활개 치는 벌레 같은 작자들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도해의 뒷배를 봐주던 황선규는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리며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명 ‘한국마력연구소 임상 실험 피해자 유가족 협의회’라고 불리는 이들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차정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현선민의 주도하에 모인 이들의 요구는 명확했다. 불법 마석 가공물 강제 섭취 후 부작용을 호소하는 생존자들을 위한 해독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해독제를 먼저 넘기는 게 어떠십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후보님의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혐의를 인정하고 재기를 도모하시는 게…….’
이윽고 삼십여 분 전, 비서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비서가 건넨 말은 곧 그 또한 차정주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차정주는 이때껏 스스로 죄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서의 숨겨진 진심을 마주하는 순간 겨우 진정시켰던 분노가 다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서는 더는 의견을 더하지 않고 서둘러 모습을 감췄다.
이대로 자신의 말로가 형편없이 고꾸라지는 꼴을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되찾은 삶을 순순히 빼앗길 거였다면 이때까지 버티지도 않았을 테다.
“시궁창에서 뒹굴어야 할 것들이 기어이 판을 뒤집으려 들다니.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지.”
같은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짓씹듯 내뱉던 차정주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 * *
광화문광장에서 시작된 첫 번째 시위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닷새가 지난 오늘은 오한빈이 뉴스 룸에서 앵커와 직접 대화하며 리포트를 진행하는 날이었다.
주해나가 남긴 자료를 확인한 그는 이것만 있다면 에덴의 후임 마스터인 전태무까지 단번에 끌어내릴 수 있다고 전해 왔다.
나날이 거세지는 열풍에 검찰 측에서는 현선민과 유가족 협의회가 한국마력연구소를 상대로 청구한 소송 건에 관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현재는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문제가 한 가지 발생했다. 그건 바로…….
“오늘 오전에도 방패를 통해 다시 확인해 보니 차진명 헌터가 던전 안에서 기거하고 있더군요. 근처에 한 여성의 시신이 놓여 있었고, 확인해 보니 도해월 마스터가 일전에 알려 준 성민주 헌터였던 것 같습니다.”
닷새 전, 차진명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포털 앞에 선 나디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어느 시점부터 그가 불현듯 사라졌던 걸 생각하면 그는 매번 세상이 멸망하는 날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던전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듯했다.
“그럼 더 고민할 건 없을 듯한데. 어서 들어가도록 하지.”
그때 근처에 서 있던 정건후가 말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한도일도 포털을 힐긋거리면서 끄덕였다. 이윽고 포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눈앞에 환한 빛이 번지면서 주변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던전 입장을 시도합니다.] [던전 입장 인원을 확인합니다.] [던전 에 입장을 완료하였습니다.]머지않아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검게 물든 숲의 전경을 휘영청 떠오른 달빛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마저도 잠시, 어디선가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은 멀고도 험했다. 진입 지점에서 쏟아지던 달빛은 걸음을 옮길수록 차츰 희미해지면서 시야를 어둡게 물들였다.
“궤멸이라는 건 이토록 어둡고 고요하게 밀려오는 거군요.”
머지않아 침묵을 깨뜨린 건 나디아였다. 곁눈으로 저마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상기하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진행하는 작전의 목적은 명확했다. 던전의 중심부에서 폭주를 앞둔 성물을 제거하고 그로써 세상의 멸망을 막는 것이었다.
설연호는 작전 브리핑 직전까지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했었다. 반면 나는 우리의 목적을 명확하게 알리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예상대로 대부분 처음에는 무척 놀라는 듯했으나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돌이켜 보면 이런 고요는 찰나에 불과했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특히 담담했던 건 방금 입을 뗀 정건후였다. 그는 차진명이 성물을 들고 던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던 순간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면서 일전의 상황을 상기해 보았다. 던전 입장 직후 게이트 근처에서 ‘천리안’ 스킬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았으나 그 안에서 보이는 장면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건 바로 세상의 멸망이었다.
그러한 미래는 전생에서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에 보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고로 이번 작전의 진정한 목적은 ‘천리안’으로도 내다보지 못했던 단 하나의 미래, 즉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미래를 직접 쟁취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