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예언으로 거듭난 기도 (2)
칠흑 같은 어둠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던전의 중심부였다. 어느 순간 시야에 들어찬 거대한 나무는 일전에 느꼈던 것과 상응하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나디아의 방패를 통해 확인했던 대로 몸통 가운데 게니우스의 창이 일자로 꽂혀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검게 타 버린 나무 몸통에 창이 꽂힌 것뿐이었으나 그 주변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관통시킨 것처럼 붉고 끈적한 액체가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니 나무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차진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생김새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안녕?”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손등 위로 굵직한 혈관이 툭 불거져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거뭇한 빛을 내는 그것들은 이따금 울컥거리기도 했다.
뒤이어 시선을 낮추고 보니 그의 발치에서 맥없이 늘어진 시체 한 구가 눈에 띄었다. 피떡이 들러붙은 이목구비를 확인해 보니 아무래도 성민주인 듯했다.
“차진명, 너…….-”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차진명의 손이 붉게 물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고개를 반쯤 꺾고 나를 바라보던 그와 눈이 마주치는 찰나 온몸에 한기가 돋아나면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눈앞에 선 차진명은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뱀처럼 샛노랗게 물든 눈동자가 그 방증이었다.
“부르지도 않는 손님을 대동하는 건 반칙이지.”
파스슥―
스슥.
그때 어둠에 잠겨 있던 지면이 물살처럼 일렁이더니 곳곳에 퍼져 있던 나무뿌리가 몬스터의 촉수처럼 솟구치면서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발목을 낚아챘다. 나디아와 한도일은 물론이고 정건후마저 속수무책으로 결박된 채 지면에 처박혔다.
“선생님!”
정건후를 향한 외침이 무색하도록 지면에 강제로 드러눕혀진 세 사람은 빠른 속도로 파묻히기 시작했다. 저마다 안간힘을 써 벗어나려 애썼으나 검게 타 버린 나무뿌리가 저항하는 세 사람의 사지를 더욱 단단하게 옭아맸다.
“오랜만이네요, 정건후 선생님? 선생님이 제일 아끼는 제자가 어떻게 죽는지 뜬 눈으로 보고 싶다면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게 싫으면 뭐, 먼저 가셔도 되고. 어차피 다 죽을 건데 순서 좀 앞당겨 간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요?”
끽. 끼긱.
차진명이 말문을 맺으면서 고개를 양옆으로 꺾자 쇳덩이가 마찰하는 듯한 기이한 소음이 일었다. 이내 그는 나무의 몸통에 꽂혀 있던 창을 힘껏 잡아당겨 분리해 냈다. 창을 거머쥔 그가 나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직접 확인해 보자고. 신이 누구의 손을 들어 줄지. 아니, 두 수호신 중에 어떤 신이 더 막강한지.”
그 순간 나무 몸통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솟구치더니 아주 느린 속도로 지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대로 긴 시간이 경과된다면 뿌리 속에 파묻힌 세 사람이 질식하게 될지도 몰랐다.
지잉―
나는 머릿속으로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소요될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천리안’ 스킬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불과 반나절 내로 던전이 폭발하며 세상의 멸망이 시작될 터였다.
그 외의 다른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수천 번을 훌쩍 뛰어넘는 전투 경험이 존재했다. 천 리 밖을 내다보는 눈으로도 내가 바라던 미래를 확인할 수 없다면 그동안 경험했던 시간의 총합을 발휘하여 전술을 구상하면 될 터.
[미개방 스킬 ‘선택된 예언자’의 해금이 완료되었습니다.]짧은 다짐을 끝으로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전술 구상을 마무리하던 찰나.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모쪼록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스킬로 확인한 시간은 고작 반나절 정도였다. 거기다 차진명이 성물의 힘을 얼마나 끌어낼 수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으니 짧게나마 그의 전술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듯했다.
더불어 차진명에게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나는 그즈음에서 상념을 끊어 내고 검을 소환한 뒤 정면으로 내달렸다.
비로소 다가온 결전의 날. 머지않아 길고 지난했던 체스 경기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는 순간 칼자루를 쥔 손아귀에 열기가 감돌았다. 회귀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차진명을 어찌나 죽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에게서 모든 걸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멸망시킨 그를 단죄하기 위해 달려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칭―
창과 검이 십자로 부딪치는 동시에 그의 샛노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이제는 검은 동공 또한 짐승처럼 기다랗게 변모한 상태였다.
칭! 칭!
연이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서슬 퍼런 칼날 위로 무수한 감정이 깃들었다. 어느새 나무가 토해낸 검붉은 액체로 인해 발목이 축축해질 때까지 이어진 전투는 아직도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기를 잡는 건 쉽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뒤로 물러선 나는 거칠게 숨을 고르면서 차진명과 눈을 마주쳤다. 반면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차진명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멀끔했다.
“너무 힘 빼지 마. 네가 아무리 악을 써도 이미 정해진 결말을 바꿀 순 없을 테니까.”
바로 그때 맞은편에서 나를 주시하던 차진명이 내가 방심한 틈을 노려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이어서 목덜미에 창날을 겨누더니 나를 나무 근처까지 순식간에 밀어붙였다.
쿵!
나무의 몸통에 등이 부딪히는 순간 옷자락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등과 맞닿아 있는 나무에서는 계속해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 전신을 빠르게 휘감기 시작했다. 이대로 중독되면 나 또한 차진명처럼 변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다 괴물처럼 변한 건가 했더니. 역시 이 나무가 근원이었어.
간신히 숨을 고르던 나는 시선을 낮춘 뒤 여전히 뿌리에 속박된 이들을 바라보았다. 나무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액체로 인해 세 사람의 하반신이 잠겨 있는 상태였다. 나디아와 한도일은 이미 의식을 잃고 눈을 감은 상태였다. 한편 정건후는…….
푹―
“그러게.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바로 잡았어야지. 나였다면 널 지금보다 더 명예로운 자리에 앉힐 수 있었을 텐데.”
정건후를 살피기도 전에 차진명의 창이 복부를 꿰뚫었다. 장기를 관통한 창날이 다시 나무에 꽂히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전신으로 퍼지는 동안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차진명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끝을 알 수 없는 악의였다. 그가 품고 있는 악의는 세상을 멸망시킬 만큼 강력했으나 막상 더는 인간의 몰골을 하고 있지 않은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두려움이 배가되기는커녕 어딘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설마……. 전생에서 이능청을 내팽개쳐 두고 사라졌을 때도 이딴 꼴로 멸망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복부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쏟아지고 전신을 들쑤시는 통증은 점점 선명해지면서 머리통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의 의식은 맞은편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차진명에게 향해 있었다.
“이능청?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맞은편에 있던 차진명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어느 시절의 나는 스스로 차진명의 개가 되기를 자처하고 싶을 만큼 그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제는 그랬던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무수한 선택지 중에서 끝내 가장 악하고 악한 길만 택하고, 그리하여 모두를 죽음으로 떠밀기 위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문득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녀석 때문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삶을 다 바치면서 나를 망쳐 왔단 말인가.
“쿨럭, 쿨럭.”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목울대가 울컥거리더니 입안에서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등허리를 적시는 검붉은 액체와 내가 흘린 피로 전신이 엉망이 되어 가는 가운데, 입가에서는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내가 이따위 금수만도 못한 놈과 닮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니.
“여기서 나가면 그런 재수 없는 나를 견뎌 줘서 고맙다고 한 명, 한 명 손 붙잡고 인사라도 해야겠네.”
약간의 자조가 섞인 농담을 중얼거리는 순간 차진명이 속뜻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진흙에 파묻혀 있던 발로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찬 뒤 비틀거리면서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듣고 싶었던 얘기는 다 들었으니 탐색전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이미 정해진 결말은 바꿀 수 없다고?
진작에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는지 차진명이 선심 쓰듯 던진 한마디에 전투를 이어 가는 내내 머릿속으로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복부의 통증을 잊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차진명과 거리를 두고 선 채로 나무 주변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 보았다.
검은 나무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액체가 쉼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흘린 피를 연상시키는 저 액체는 빠른 속도로 차올라 뿌리 밑에 묶인 세 사람의 숨을 거두어 가고, 머지않아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죽음의 해일이 되어 만물을 뒤덮을 것이었다.
이 순간에도 시간의 행렬은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던전은 이미 차진명의 지배하에 들어온 터.
게니우스가 지배하고 있는 던전 안에서는 유스티티아의 검 또한 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니, 어떻게든 세상의 멸망을 유예한 뒤 게니우스의 영향력을 벗어나 또 다른 전장으로 그를 이끌어야 한다.
“허튼 수를 벌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기어코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넌 내 손바닥 안이니까.”
그때 맞은편에 서 있던 차진명이 창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비슷한 논조의 말을 차정주에게서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과연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군.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고 있으니 차진명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내 창날을 겨누고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칭!
잠시 뒤 다시 한번 검과 창이 십자로 교차했다. 악에 받쳐 이글거리는 샛노란 눈빛이 나를 잡아먹을 듯 맹렬하게 쏟아지던 바로 그때.
나는 차진명이 거머쥔 창을 맨손으로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손아귀에 불씨가 옮겨붙은 듯한 통증이 불거졌으나 이를 악물면서 참아 냈다.
[선택된 예언자가 지정한 ‘언약의 무지개’ 아이템이 발동됩니다.]이윽고 눈앞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동시에 눈앞에서 환한 빛이 번지더니 허공에 발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주변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 * *
환한 빛이 걷히면서 드러난 건 던전의 내부도 아니고 그 바깥도 아닌 제삼의 공간이었다. 나는 손에 들린 검을 고쳐 쥐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창을 붙들었던 손바닥에는 여전히 홧홧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사용자가 시간의 궤도를 이탈하여 초월자의 피안(彼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만화경 내부의 규칙과 대칭의 원리를 이해한 뒤 의 설계를 완성하면 바라던 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뒤이어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그 너머에 선 차진명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주춤거리던 것도 잠시,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뜨면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