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지령 (3)
아이템을 착용하고 정상을 향해 내달린 지 어느새 한 시간 정도 되었을까.
두 발은 여전히 가벼웠으나 경사를 타고 휩쓸려 내려오는 눈발을 거스르기 쉽지 않았다.
두꺼운 파도처럼 밀려오는 눈을 가르며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토했다.
“대체,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거야.”
음절마다 짓씹듯이 뱉으면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어 넘겼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설산을 오르는 일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고 있었다.
현장 실습에서 입장했던 C등급의 던전이 극악의 지형이라고 불리는 것은 독성이 담긴 해무를 뚫고 바다를 직접 항해하며 몬스터와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이 던전은 E등급이기는 했으나 지형 자체는 그와 상응할 정도로 험난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곳이 E등급으로 책정된 이유는 굳이 설산에 오르지 않아도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에서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상에 기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최종 보스의 등급도 그리 높지 않을 것이었다.
강한 몬스터가 나오지도 않고, 지형도 험난하니 높은 등급의 헌터는 굳이 이 던전까지 와서 사냥하진 않겠지. 그래서 이 던전을 택한 건가.
유학을 떠난 차진명이 나타난 건 2027년 겨울이었다. 이듬해 여름에 발생한 용산 던전 브레이크의 여파가 잠잠해질 즈음 그가 다시 모습을 보인 건 우연이었을까.
이전 생에서의 멸망이 쉼 없이 내리는 눈처럼 고요하고 꾸준한 속도로 나아오고 있었다면 그 또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오감으로 흡수한 미래와 전생에서의 경험이 나에게 외치고 있었다. 정상으로 향하라고.
스킬이 보여 주었던 알 수 없는 기운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이 질문의 해답과 이어진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생각보다 광활하고 아득했다.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산맥이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중에 가장 높게 솟아오른 지점에 다다른 나는 터질 것만 같은 허벅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정상에 다다르기 얼마 전부터 ‘천리안’ 스킬을 통해 확인한 이상한 기운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한층 가깝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 또한 점점 굵어졌다.
나는 어느새 홀린 듯이 그것을 향해 손끝을 다시금 뻗어 보았다.
여전히 살갗에 내려앉으면서도 녹지 않고 쌓이는 그것은 예상한 바와 같이 평범한 눈송이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마나를 응집한 채 눈송이로 형상화된 물질이었다.
무릇 던전의 중심 즉 최종 보스가 머무르는 구역은 마나 수치 또한 게이트 근처보다 극렬하게 상승해 있거나 그러할 가능성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거나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한 헌터는 그러한 상태를 오래 버티지 못한다. 주변부의 영향을 받아 체내의 마나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섯 시간 넘게 스킬을 지속하며 계속해서 체력을 소모한 끝에 한계가 다다른 것이었다.
나는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판에서부터 느꼈던 익숙하고 낯선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이건 분명 마석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이었다. 최소 S급 이상의.
보통은 몬스터를 처치한 직후에 전문 짐꾼이 곧바로 마석을 수거하지 않나.
설마 이곳에서 S급 몬스터가 처치되었을까? 아니, 그랬을 리 없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이미 S등급 던전으로 격상되었을 거다.
고작 E등급에 불과한 던전에 S급 마석이 방치되어 있다니.
나는 사태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스킬 ‘천리안’이 발동됩니다.] [‣ 천리안 (S)천 리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얻게 됩니다. 시간의 궤도에 진입함으로써 천체의 흐름을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상태로 먼 미래까지는 내다볼 수 없었다. 나는 설산 정상 일대만 집요하게 추적할 생각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 들이마시는 숨결을 따라 한가득 쌓인 눈밭에 파묻힌 진실의 형상이 들이닥쳤다.
내가 딛고 선 이 자리에서 고작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 무언가 틀어박혀 있었다.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게 느껴질 만큼 찬란한 눈밭과 확연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별이 뜬 밤하늘을 한가득 움켜 가공한 것처럼 선명한 색채를 가진 그것은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헛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다 헛발을 짚었다.
고스란히 고꾸라져 눈더미에 처박힌 채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얇은 옷자락 너머로 눈밭의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며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일전에 보았던 에너지 파동의 형상만 머릿속에 선연해지더니 눈동자도 어느새 갈피를 잃었다.
“설마.”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 예측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나는 눈더미에 짓눌려 있던 사지를 가누어 힘겹게 기립했다.
그 순간에도 눈앞으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어느새 호흡을 이어 나갈 때마다 숨결에 눈송이가 섞여 들어왔다.
이미 오래전에 감각을 잃은 손끝을 힘껏 말아 움키면서 눈을 감았다.
[스킬 ‘천리안’이 발동됩니다.] [‣ 천리안 (S)천 리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얻게 됩니다. 시간의 궤도에 진입함으로써 천체의 흐름을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눈앞으로 푸른 빛을 품은 활자가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이윽고 불현듯 숨이 차올랐다. 전신을 가시덩굴로 옭아맨 듯한 자극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미래의 조각들이 들이닥쳤으나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간신히 목울대로 침음을 삼켰으나 그것이 독이라도 되는 듯 거센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혈류를 순환하는 마나 에너지가 갑작스레 팽창하며 살갗에 불이 붙은 듯 뜨거워졌다.
“허윽.”
두 무릎이 언제라도 무너질 듯 후들거리더니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나에 정신이 지배될 것처럼 머릿속이 기이하게 팽창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심장께를 힘껏 움킨 채 호흡을 유지하려던 나는 다시 한번 미래를 보고자 눈을 감았다.
[현재는 스킬 사용이 불가합니다.] [현재는 스킬 사용이 불가합니다.] [현재는 스킬 사용이 불가합니다.] [현재는 스킬 사용이 불가합니다.]“젠장!”
아무리 애를 써도 ‘천리안’ 스킬을 발동할 수 없었다.
겨우 짓씹어 뱉은 말에서도 쇳소리가 묻어나며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과거의 내가 멸망하지 않는 미래를 찾아 안간힘을 쓰던 그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끝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눈밭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나는 고꾸라지듯이 엎드려 어깨를 옹송그렸다.
둥글게 몸을 웅크린 채 핏덩이를 뱉어 내고 호흡의 가닥을 되찾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때와 같은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거다.
오로지 그 생각에만 집중하면서 폭동하는 마나의 흐름을 억누르고자 애를 썼다.
눈송이처럼 마구잡이로 산발하는 의식을 되찾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모서리가 부서진 조각의 형태로 날아들던 미래의 장면을 차근히 되짚었다.
설산 정상에는 S급 마석이 묻혀 있는 상태였다.
그 여파로 이 설산 곳곳에 숨겨진 몬스터의 힘이 이전보다 차츰 강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몬스터가 나타나 개체를 늘리며 집단을 이루었다.
이대로 S급 마석에 응집되어 있던 마나 에너지가 던전 전체에 퍼져 나가게 되면 근미래에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것이다.
눈보라처럼 들이닥쳤던 미래의 장면 중에는 누군가 이곳에 묻힌 S급 마석을 살피러 오는 모습이 존재했다. 적어도 네 사람 이상의 형체가 보였으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그 이상이라는 뜻일 터였다.
그 순간 이때까지 내가 지켜 왔던 믿음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던전 브레이크는 불가항력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재난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그것을 직접 실험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니.
한사코 날뛰던 마나의 흐름을 간신히 가라앉힌 나는 한쪽 무릎을 세웠다.
이윽고 다른 무릎까지 가누어 느릿하게 일어선 뒤 설산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내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서 있겠다는 의지와 달리 한쪽 발목이 자꾸만 휘청였다.
맥없이 꺾이는 발목을 가누지 못해 다시금 엎어진 채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차진명의 계획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 목적은 정녕 세계의 멸망인 것일까? 당장은 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목격한 것만으로도 차진명을 의심할 만한 여지는 충분했다.
차진명은 지금도 여러 사람을 동원하여 참혹한 재난을 고의로 발생시킬 궁리를 하고 있을까. 과거로 돌아와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심지어 그의 수를 제때 간파하지도 못하고 한참 나약해진 몸을 뜻대로 가누지 못해 괴로워하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커뮤니티에 합류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이 헌납한 마석으로 차진명은 이곳이 아닌 다른 던전에 마석을 심어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나는 전생에서의 경험을 통해 차진명의 측근과 그들의 정보를 전부 파악하고 있다. 또다시 그의 밑으로 들어가서 이미 습득한 정보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차진명의 커뮤니티에 합류할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번뜩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그의 커뮤니티에 접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건 다시 그의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겠다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내가 벌써부터 그의 밑에 들어가서 도움을 준다면?
신임이야 얻겠지. 그래서? 그의 멸망을 돕겠다고?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차디찬 눈덩이에 살갗을 문댄 것처럼 한층 차분해진 상태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맘때의 차진명은 등급이 낮은 던전에 S급 마석을 고의로 묻어 두고 그 경과를 지켜보는 중이다. 한마디로 이곳을 자신의 실험실처럼 사용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차진명의 계획이 막 시작되고 있는 이 시점에 회귀했을까?
생각을 정리하면 또다른 온갖 의문점이 눈송이처럼 바람결에 정처 없이 휘말리며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멸망 직전의 순간 눈앞에 떠오르던 알 수 없는 메시지와 유스티티아의 검이 귀속되며 나타난 문장들을 상기했다.
[미개방 스킬 ‘선택된 예언자’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선택된 예언자’ 스킬의 해금 조건이 일부 달성되었다는 건 무슨 뜻이지?
멸망 직전의 순간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속에도 ‘선택된 예언자’라는 단어가 있었다.
과거로 되돌아와 확인한 스킬 목록에도 같은 이름의 미개방 스킬이 존재했다.
혹시 나를 의도적으로 과거의 이 순간으로 되돌린 존재가 있는 것일까?
그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차진명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넘어지고 말 것이다.
작금의 내가 그에게 대척해 나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한 가지다.
그와 맞먹는 속도로 달려 나갈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길러야 한다.
손등으로 얼굴에 들러붙은 눈송이를 닦아 낸 나는 귀환석을 발동시켰다.
눈앞에 새하얀 빛이 번지면서 주변의 풍경이 모습이 서서히 달라졌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7층 필드에 훈련 예약을 걸어 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