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50
250화. 완벽한 체크메이트
선택된 예언자의 의지에 감응한 ‘시간’이 두 사람을 초월자의 피안(彼岸)으로 데려다 놓았다.
허공을 응시하던 도해월은 차분한 기색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반면 낯선 공간에 떨어진 차진명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지않아 그의 곁으로 야트막한 바람이 불어왔다. 귓가에 머무르는 신의 전언에 고개를 끄덕이던 차진명 또한 창을 거머쥐면서 자세를 잡았다.
그러는 사이, 만화경 내부를 가로지르던 수천 갈래의 빛이 두 사람 사이를 교차하면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도해월은 그 눈부심에 얼굴을 찡그리던 차진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참혹한 몰골을 그저 바라보던 도해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차진명.”
장시간의 전투로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던 차진명이 숨을 크게 고르면서 도해월을 돌아보았다.
“만약 너한테 모든 걸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지? 그러니까, 네가 실험을 당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거냐는 말이야.”
차진명은 대답하는 대신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이내 조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차진명의 관절이 기괴하게 비틀리는 동안 도해월은 미동 없이 그를 마주했다.
“뭘 바라고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네가 기대하는 답은 듣지 못할 거야. 그래도 방금 그 질문에 대한 내 답이 궁금하다면 대답해 주지.”
잠시 뒤 차진명이 도해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남짓한 거리만 남기고 멈춘 차진명은 도해월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가정 따위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대신 다시 태어난 내가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로 또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는 고민해 봤었지.”
말을 이어 나가던 차진명이 도해월의 뒷덜미를 감싸 쥐었다. 단숨에 비틀어 버릴 듯 손아귀에 강한 악력이 실려 있었으나 도해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만약 지금의 나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내 계획을 그르친 널 제일 먼저 죽이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하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해월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답을 직면했다. 애초에 두 수호신의 권능이 깃든 무기로는 승패를 가리는 것이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 듯했다. 그러니 차진명을 단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이용하는 것이 마땅할 터.
도해월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에게 있었다. 몸소 그 사실을 체감한 도해월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동안 도해월은 파도처럼 내리쳐 부서지고, 다시 몰아치는 그 시간의 가운데 꼿꼿하게 서서 맞서 싸우고, 많은 것을 쟁취해 냈다.
마침내 그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 부대원들뿐만 아니라 차진명의 개로 살아가면서 차츰 잊어 갔던 진정한 제 모습을 되찾은 오늘, 비로소 차진명에게 선언할 때였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고, 반격할 수 없는 완벽한 체크메이트를.
“그래, 따로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한마디 말을 끝으로 도해월이 스킬을 발동했다.
[선택된 예언자가 지정한 ‘공정한 판별자’ 스킬을 발동합니다.]이윽고 만화경 내부를 교차하던 무수한 빛의 갈래가 일제히 정지하고.
[‘공정한 판별자’ 스킬의 부가 기능 ‘천칭의 심판’을 행하기 위한 특수 발동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이내 그 모든 빛이 도해월의 맞은편에 서 있던 차진명을 향했다.
[지금부터 선택된 예언자의 의지에 따라 ‘천칭의 심판’을 거행할 수 있게 됩니다.]초월자의 정결하고 신성한 빛 아래, 차진명이 지은 죄가 낱낱이 드러난다.
[지금부터 선택된 예언자의 의지에 따라 ‘천칭의 심판’이 거행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선택된 예언자에게 품은 ‘악의’를 측정합니다.]현재의 차진명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서른 번의 생에 깃든 죄까지 심판대에 오른다. 차진명을 관통하는 빛에는 형체가 없었으나 그는 수만 개의 창살에 관통당한 듯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도해월은 시신이 불에 타는 듯한 악취에 눈살을 좁히면서도 차진명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자신의 오랜 숙원이 심판받는 모습을 모조리 기억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차진명이 기나긴 시간에 걸쳐 저지른 죄를 몸소 떠안음으로써 죗값을 모두 치르는 순간.
[‘천칭의 심판’이 종료되었습니다.]차진명의 불완전한 몸이 맥없이 기울어졌다. 그에게 허락된 마지막 숨이 새카맣게 불타 버린 육신에서 천천히 빠져나갔다. 차진명은 사망했으나 그의 육신은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것처럼 거세게 경련하는 중이었다. 서른 번에 걸쳐 인류를 궤멸한 차진명의 죄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도 그를 뒤쫓게 될 테다.
초월자는 선택된 예언자가 만들어 낸 역사적인 장면을 흡족하게 관조했다. 그가 이룩한 승리의 기록은 이 시간선뿐만이 아닌 온 우주를 떠돌며 오래도록 칭송받게 될 것이다.
이윽고 초월자는 환한 빛으로 도해월의 시야를 가렸다. 궤멸한 세계의 기틀을 바로잡는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한국마력연구소.
홀로 텅 빈 연구소에 잠입한 차정주는 자신의 손에 들린 성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불씨를 붙인 뒤 바닥에 떨어뜨리기만 하면 연구소 전체가 불타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남아 있던 나머지 실험체들 또한 자연스레 사망할 테다.
성냥을 만지작거리던 차정주는 실로 허망한 심정이 되어 지난 며칠 간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그는 자신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든 도움을 청할 구석을 마련해 보려 했으나 모두가 그를 거절했다.
―피해자들에게……. 어서 해독제를……. ……제공하라!
그렇게 성냥에 불씨를 붙이기 직전,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는 차정주의 귓가에 먹먹한 소음이 밀려들었다. 광화문광장을 시작으로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도시 곳곳을 전전하던 시위대는 결국 한국마력연구소까지 쳐들어오고 말았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다른 한쪽에서는 차정주가 감금해 놓은 실험체들의 비명이 들렸다. 차정주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입구 쪽과 실험실을 번갈아 둘러본 뒤, 손에 들린 성냥갑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서리가 삭은 작은 성냥갑에는 달맞이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마저도 색이 바랜 나머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 성냥은 오래전에 사망한 자신의 아내가 어릴 적 사용한 것이라며 선물한 물건이었다.
차정주가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 그녀가 눈더미에 파묻혀 있던 그의 손을 잡아 이끌던 때가 전부였다. ‘논외의 존재’의 압력에도 차정주의 영혼이 버틸 수 있던 건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아 보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논외의 존재’의 목표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 보고 싶었기에…….
“그렇게 지독하게 버틴 대가가 고작 이것뿐이라니.”
조용히 중얼거리는 순간 소매를 적신 피비린내가 코끝에 훅 미쳤다. 그 피의 주인은 연구소에 오기 직전, 끝까지 그를 말리던 비서의 것이었다. 끝까지 차정주를 설득하려 했던 비서는 결국 차정주의 손에 사망하고 말았다.
화르륵―
이윽고 차정주가 성냥 끄트머리에 불씨를 붙인 순간.
쿵. 쿵.
쿵.
육중한 철문에서 둔탁한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일순 당황한 차정주가 주춤거리는 찰나 문이 강제로 열리더니 중무장한 헌터들과 함께 검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정건후였다. 축 늘어진 나를 감싸고 있던 그는 안도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차분하게 숨을 고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뒤이어 주변을 둘러보니 나디아와 한도일 또한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이미 죽었을 겁니다.”
그때 한참 떨어진 곳에서 차진명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두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정건후와 마찬가지로 차림새가 엉망이 된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뒤따라 다가온 한도일에게도 눈인사를 전하려던 찰나.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선택된 예언자에게 ‘시간’의 전언이 전달되었습니다.]“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은 듯하니 서두를까요.”
[이윽고 당신의 눈앞에 떠오를 무지개는 내가 선택된 예언자에게 남기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궤멸한 세계의 기틀을 바로잡는 끝없는 여정에 건투를 빕니다.]한도일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입을 떼는 동시에 푸른 활자가 다시 한번 눈앞에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른 나는 ‘시간’이 남긴 전언을 연달아 읽어 보았다. 전언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내 한도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검을 고쳐 쥐었다.
“네, 전 준비됐습니다.”
잠시 뒤 근처로 다가온 정건후가 두 손으로 창을 길게 거머쥔 채 정면으로 내밀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그가 나디아가 일러 주었던 방법대로 창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탁. 탁탁. 탁.
이내 잠잠하던 게니우스의 창이 거칠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한참 전에 들었던 설명대로 창을 처음으로 소유했던 본래의 주인인 취우의 전 마스터의 염원이 정건후를 알아보는 것처럼 그의 손아귀 안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게니우스의 창의 힘이 일시적으로 약해지는 때.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군.”
미간을 찌푸린 채 창을 힘껏 거머쥐던 정건후가 말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정건후조차도 창을 단숨에 제압하기 어려운 듯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칼자루를 두 손으로 거머쥔 나는 창의 가운데 칼날을 겨누었다. 이내 단숨에 내리친 칼날이 창과 맞닿는 찰나.
팟―!
차진명과 전투할 때만 해도 보지 못했던 흰 불꽃이 터지면서 각 성물에 깃들어 있던 힘이 팽팽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두 물건 모두 자아가 생긴 것처럼 서로 맞붙은 채로 맹렬하게 버티는 통에 나와 정건후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버텨야 했다.
솨아아―
그때 나무의 몸통에서부터 쏟아지던 검붉은 액체 또한 무수하게 뻗은 가지를 타고 허공에 흩날리더니 이내 폭우처럼 내리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는 이대로 권능을 잃지 않으려는 게니우스의 창과 정의로 악의를 단죄하려는 유스티티아의 검이 치열하게 맞서고 있었다. 창의 주인인 차진명은 사망했으나 그 안에 깃든 힘은 여전히 건재했다.
신의 권능에 맞서 세상의 운명을 바꾸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따라 숨을 몰아쉬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문득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책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눈을 감고 스킬을 전개했다.
[사용자가 지정한 ‘선택된 예언자’ 스킬이 발동됩니다.]이윽고 눈앞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멸망의 전조가 무너뜨린 대지 위에 준비된 설계자의 마지막 수를 놓습니다.] [궤멸한 세계의 기틀이 재정립됩니다.]이어서 두 개의 문장이 연달아 떠오르더니 눈앞에서 환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빛이 전신을 휘감는 순간, 긴 시간을 통과하며 느꼈던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씻겨 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쩌적. 쩍.
동시에 정건후의 손아귀에 들린 게니우스의 창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성물을 사라지게 만든 건 신의 권능을 넘어설 만큼 강력한 염원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흩어지는 조각에 손을 뻗기도 전에 눈앞의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 * *
환한 빛이 점차 걷히면서 익숙한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크게 숨을 고르고 있으니 부드럽고 미지근한 바람이 폐부를 가득 메우는 것이 느껴졌다. 총선을 목전에 둔 완연한 봄, 맑게 갠 하늘에서는 연분홍빛 꽃잎이 유유히 흩날리고 있었다.
“다들 저것 좀 보세요.”
함께 빠져나온 사람들의 행색을 하나씩 살피는 사이, 근처에서 누군가 탄성을 내질렀다. 설연호의 곁에서 걸음을 멈춘 뒤 사람들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드넓은 상공에 크고 선명한 무지개가 떠올라 있었다.
초월자가 나에게 남긴 언약의 증표는 실로 아름다웠다. 그 고유한 빛깔에 시선을 빼앗긴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고단했던 몸의 긴장을 풀었다.
높이 떠오른 무지개는 승리의 증표이기도 했다. 이로써 궤멸한 세계의 기틀을 바로잡는 여정이 무사히 막을 내렸다. 이제는 그토록 바라던 미래로 나아갈 차례였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