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52
외전. 바라던 미래에서 (2)
새로운 한 해의 시작점에서 묘하게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던 길드 사무실은 오늘 자로 흥겨운 축제 분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두를 기쁘게 만든 건 단연 용산구 지역 내 길드 순위 발표 결과였다.
금일 자정에 발표된 순위표에 따르면 지난 연도 하반기 우리 길드의 순위는 종합 1위였다. 그뿐만 아니라 해마다 딱 한 번, 신년에 발표되는 전국 길드 순위에서는 7위의 영예를 차지했다.
작년 유월, 총선 종료 이후 상반기 행적을 합산하여 발표된 용산구 길드 순위는 종합 4위였다. 이전 순위 발표 결과에 견주면 과연 괄목할 만한 성장 폭이었기에 하반기에도 그만큼의 순위 상승을 기대하고 터였다.
각각의 순위가 발표되기 무섭게 언론에서도 관련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했던 NBS를 비롯하여 여론을 부정적으로 몰아가던 방송국들 또한 작정하고 태세를 바꾼 듯 우리 길드의 지난 행보와 가파른 성장 요인을 분석하는 리포트를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나의 사회적 지위 또한 상승하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근미래의 일을 내다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그 능력을 남용하지 않으리라는 것 역시 그간 벌어졌던 많은 사건 덕분에 충분히 증명되었다.
모쪼록 용산구 지역 내 길드 순위는 얼추 예상했었지만, 전국 길드 순위에서 이런 성과를 얻게 될 줄은 몰랐기에 길드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덩달아 들뜬 모습으로 축하 인사를 전해 왔다.
나는 여느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헌터 아카데미 교정에 들어섰다. ‘선배와의 만남’ 행사 시작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으나 정건후와 만나기 위해 일찍 방문한 참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분 뒤. 상담실에서 마주한 정건후는 몇 년 전 내가 학생이었을 적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듯 소란스럽게 축하하는 대신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말았다. 이내 차를 내어 준 뒤 근처에 있던 신문을 집어 나에게 건넸다.
“주해나 부길드장. 죽은 게 아니었더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오랜만에 들어온 상담실의 전경을 둘러보던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마저도 잠시, 말끝을 흐리면서 정건후가 건넨 신문을 확인해 보았다.
[ 작년 이맘때 사망 소식 전해진 주해나 헌터, 오늘 오전 검찰 자진 출두]주해나의 소식은 신문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나도 모르게 헛숨이 새어 나왔다. 이내 크고 선명한 헤드라인 밑으로 주해나가 검찰청 건물 앞에서 기자들과 대면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망 소식이 발표된 이후로 밑도 끝도 없이 입에 빗장을 걸어 놓는 통에 입을 다물고는 있었다만, 네가 정말 그 던전에서 주해나 부길드장을 만난 게 사실이라면 뭔가 다른 결말을 도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
아연실색한 나와 달리 정건후는 비교적 담담한 기색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그 말은 곧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죄를 고할 게 아니라면 이름부터 바꾸고 평생 숨어서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정건후의 말에 느릿하게 대답하면서 주해나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의 나는 폭풍이 몰아치는 사막에서 그녀에게 방금과 같이 말했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모습을 감춘 것이 마지막이었다.
주해나에게 이름부터 바꾸라고 말한 건 신분을 세탁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절차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지은 이름인지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인연에 오랫동안 묶여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왕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했다면 나와의 인연도 끊고 멀리 떠나기를 바랐다.
“그 일을 끝으로 영영 묻고 지냈던 사람이 예상치 못한 답을 들고 나타나는 바람에 심경이 복잡해진 건가 보군.”
그때 맞은편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정건후가 말했다. 속내를 짐작하는 어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으나 이제 그는 나를 어엿한 동료 헌터로서 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머릿속에서는 신문에 적혀 있던 빼곡한 글자들이 맴돌고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주해나는 왜 이제야 죄를 고하는 것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제게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이름뿐이더군요. 그 이름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수사에도 성실하게 임하겠습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주해나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서 에덴이 몰락한 뒤에도 그 이름값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거냐는 둥 날이 선 어조로 그녀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었다. 반면 사진 속 주해나는 이전보다 수척해 보이긴 했어도 눈빛만큼은 기억하던 그대로 더없이 결연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머리가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그 또한 그녀의 결정이니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결국 정건후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화두를 돌렸다.
“그나저나 선생님의 결정이 저에게는 좀 의외였습니다. 차정주도 잡혀 들어갔고, 창도 없앴으니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봤거든요. 취우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정건후도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건후는 취우 길드로 복귀하는 대신 새 이사장인 정수희의 설득에 넘어가 헌터 아카데미에 잔류하게 된 상태였다.
“앞으로도 쭉 헌터 아카데미에 계실 생각인 건가요?”
한참 대답이 없는 정건후에게 재차 물었다. 눈썹을 치켜올리던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왜, 제일 아끼는 제자가 한 명 더 생길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역으로 돌아온 질문에 맥없이 웃음 짓고 말았다. 방금 그건 차진명이 폭발 직전의 던전에서 정건후에게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때의 일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된 걸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슬슬 이동하도록 하지. 네가 학교에 온다고 하니 학생들 반응이 아주 볼 만하더군.”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뒤 그를 따라 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생에서도 사령관 자격으로 이런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마음가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터였다.
잠시 뒤 강당 무대에 마련된 간이 계단을 밟고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드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오래전, 이곳에서 교복을 입고 수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갑습니다, 헌터 아카데미 재학생 여러분. 저는 도해 길드의 도해월 마스터입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런저런 감상은 잠시 접어 둔 뒤 정면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그대로 고개를 드는 순간 열화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은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앳된 학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매끄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면서 말을 이어 나가고 있으니 내가 바꿔 놓은 미래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피부로 와닿았다.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전리품과 다름없었다.
* * *
강의를 마치고 나서니 저녁 무렵이 다 되어 있었다. 바깥은 벌써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오늘 내가 돌아갈 곳은 길드 사무실이 아닌 나의 집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무실과 연결된 작은 휴게실에서 숙식을 해결해 왔다. 그리고 문제혁이 졸업한 뒤 기숙사를 나오게 되면서 그와 함께 거주할 집을 구하게 되었다.
문제혁과 함께 지내기로 한 건 그와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고 있을 때 들었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문제혁은 문득 우리에게도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는데, 당시의 나는 그것이 가볍게 건네는 말인 줄 알면서도 차마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전생의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사망해야 했던 이들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흩뜨리지 않으려면 나만의 공간을 갖는 일은 후일로 미루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었다.
그렇다면 모든 목표를 이루고 난 지금은 어떠한가. 나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전부 완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그 기준을 정해 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강준희를 떠올렸다. 차정주와 차진명 그리고 주해나에게는 각각 기회를 주었지만, 강준희에게는 그럴 시간조차 없었기에 그의 이름이 더욱 쓰라리게 남은 터였다.
강준희의 이름을 곱씹다 보면 기억 한편에 선명하게 남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회귀한 직후 처음으로 나섰던 현장 실습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난 뒤 강준희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말했었다.
‘네가 나를 믿어 주는 게 느껴져서 그게 정말 좋고 뿌듯했어. 나도 너처럼 다른 사람들을 잘 이끌고 싶어지기도 했고……. 물론 내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는 긴 시간 지휘관으로 지내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낯선 감정에 사로잡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의심 한 점 없는 신뢰를 받는 게 얼마나 특별한 건지 몸소 깨달았다.
이내 쓸쓸한 기분으로 강준희의 이름을 다시 덮어 두었다. 언젠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사죄라는 건 끝이 없는 것이다. 상대가 직접 용서하겠다고 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겪은 일은 오로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끝까지 함께 가는 수밖에.
광화문광장 시위에서 어느 비각성자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사라지겠지만, 나는 지나온 모든 시간을 평생 간직할 생각이었다.
지난 기억을 회고하다 보니 금세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환한 불빛이 쏟아지더니 그 안에서 감돌던 열기가 전신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왔어? 밖에 엄청 춥지.”
그때 문제혁이 현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부엌 쪽에서는 음식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뒤이어 거실에 모여 있던 이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얼른 들어와요, 선배. 다른 선배들도 다 모였어요. 그리고 아까 원하 선배가 배고파 죽겠는데 선배만 안 온다고 무지 툴툴거렸어요. 대박이죠. 그거 하나 못 기다려서, 읍…….”
“야, 비밀 지켜 준다며!”
어느새 쏜살같이 달려온 홍원하가 지선일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두 사람을 힐긋대며 혀를 차던 김미솔에게 눈인사를 전한 뒤 안쪽으로 들어섰다.
“저녁이라 차가 좀 막혔어. 먼저 먹고 있지, 왜.”
숨을 길게 내쉬면서 대꾸한 뒤 거실로 들어서자 서애란이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곁에 있던 고정인과 고예성도 나를 반겨 주었다.
“날도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 오늘 강의는 어땠어? 애들은 많이 왔고?”
“그렇지 않아도 이사장 바뀌면서 나서 이것저것 많이 달라진 것 같던데. 어땠는지 얘기 좀 해 봐.”
코트를 벗으면서 피식 웃은 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내저으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마침 안쪽에서 나오던 설연호와 인사를 나눈 뒤 짐을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띵동―
“야, 여긴 무슨 길이 이렇게 복잡하냐? 오다가 동상 걸려서 뒈지는 줄.”
이윽고 경쾌한 초인종 소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공희찬까지 들어섰다. 젖은 손을 털면서 거실로 나와 보니 문제혁과 둘만 있을 때는 한없이 넓게 느껴졌던 거실이 빼곡해져 있었다.
“선배도 빨리 와서 앉아요. 선배가 해월 선배보다 더 늦은 거 알죠?”
그때 지선일이 현관에 있던 공희찬을 질질 끌면서 자리로 안내했다. 공희찬은 툴툴거리면서도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머지않아 편안하고 노곤한 분위기 속에서 용산구 내 길드 순위 1위 달성을 기념하기 위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인 나는 동료들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따금 피식거리며 웃거나 한두 마디를 보태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숨을 고르는 순간 귓가를 가득 채우던 소란스러운 음성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단란한 풍경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관조하는 마음이 되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길고 지난했던 서른 번의 생이 지나고 어렵게 되찾은 서른한 번의 생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내게는 아직 생소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멸망하던 순간을 기점으로 나의 시간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멸망을 막을 수 없었던 미래와 멸망을 막기 위해 돌아온 과거로.
그리고 오늘은 또 다른 갈래가 펼쳐지는 날이었다. 그 너머에는 생전 겪어 보지 못한 낯선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던전 브레이크처럼 한낱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재난 역시 예측하지 못한 때에 속수무책으로 불거질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불가항력에 맞서는 예지력으로 대항해 나갈 테니까.
물론, 이번 예측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