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6
26화. 대책 마련 (1)
헌터 사회의 각성자가 스탯과 등급을 상승시키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던전 공략 혹은 훈련을 감행하거나 상점제 아티팩트 및 아이템의 도움을 받거나.
전자의 경우 큰 비용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등급 상승도 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다만 스탯의 소폭 상승이 아닌 등급 상승까지 이루기 위해서는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된다.
후자의 경우 반지, 팔찌, 피어싱 등의 액세서리 등 직접 착용하거나 소지할 수 있는 물건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스탯을 보완할 수 있다. 가장 확실하고 편리하지만 전문 감정 헌터의 보증이 확보된 물건을 구매하려면 거금을 투자해야만 한다.
고로 청소년 각성자이자 경제적 도움을 구할 만한 가족 또는 후원자가 없는 나로서는 헌터 아카데미에 있는 훈련 시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멸절의 설산’ 던전에서 빠져나온 뒤로 가장 크게 실감했던 것은 체력의 부재였다.
S급 스킬을 내 뜻대로 운용할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스탯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고작 D급밖에 되지 않는 스탯으로 높은 등급의 스킬 사용했기 때문인지 마나 과다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 또한 극심했다.
7층 필드에서 모의 던전 테스트를 거듭하며 부족한 마력 스탯을 채우기 위해서는 기초 체력부터 단련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체력 수치는 쉽게 상승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태다.
번듯하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벽돌을 한 장씩 직접 날라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답답할 만도 하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몇 시간 내내 러닝머신에서 달린 나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걸음을 멈추었다.
양옆에 달린 손잡이를 쥐고 숨을 허덕이며 상체를 깊이 수그리자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금 이곳이 내가 처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의 박동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질 때면 실감이 더욱 커지고는 했다.
가끔 S급 헌터였을 때의 경험들이 백일몽처럼 느껴지고는 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체력이 나아지고 마력이 상승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답답해 죽겠다는 거지.
정확히는 무엇이든 손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몸을 체험하고 난 뒤 이토록 느리고 더딘 과정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도 버거웠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휘적이며 기계에서 내려온 나는 작은 벤치에 걸터앉았다.
체력 단련실은 학기 중과 달리 이용하는 사람 없이 한산하고 조용했다.
뭐 어디 돈 나올 구석 없나?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물병을 집어 든 나는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절반쯤 마신 물병의 뚜껑을 닫고는 손등으로 입가에 남은 물방울을 지웠다.
생각해 보니 아직 현장 실습 장학금이 안 들어온 것 같은데.
말하는 것만 들어 보면 기대했던 금액을 훨씬 웃돌 것 같단 말이지.
아무래도 거액을 길드 측에서 학교를 거쳐 나에게 전달하려 하니 중간 과정에서 손이 많이 가는 듯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이렇게 늦게 들어올 리가 없지.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대로 쓸 만한 아티팩트부터 구매하러 가야겠다.
D급도 나쁜 수준은 아니었지만 내 기준에는 픽 하면 쓰러지는 종잇장 같아 답답했다.
다른 사람에게 차마 설명할 수 없는 이 괴로움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고 싶었다.
별관에 자리한 체력 단련실에 난 통창 너머로 기숙사 건물이 마주 보고 있었다.
잔뜩 젖은 옷깃을 쥐어 펄럭이는 채로 저 안에 누가 남아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설연호는 아마 집으로 돌아갔을 테고. 홍원하는 남았으려나?
김미솔은 리호 길드 사무실에 갔을 때 돌아간다고 얼핏 말했던 것 같은데.
강준희도 그런다는 것 같았고, 공희찬은 말 안 해도 알지.
그건 그렇다고 치고.
현장 실습 장학금 말고는 또 뭘 해야 돈을 구할 수 있으려나.
여느 때보다 심각한 상태로 고민하다 보니 뒤이어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팔월 말이 되어 만 18세 생일이 지나가면 정부 지원금이 나온다.
그 돈은 게이트 고아인 나에게 주어지는 자립 지원금으로 그것을 취득하려면 그동안 나고 자란 보육원에 가서 최종 확인 서류를 직접 작성해야 한다.
별의별 능력으로 각성한 헌터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아직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니.
구닥다리 같다는 감상이 들었으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지난 생에서는 생일이 되기 며칠 전에 보육원 측에서 연락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련 서류를 작성하러 가는 김에 문제혁까지 만나고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후덥지근한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시는 듯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체력 단련을 잇고자 기구에 착석하면서 머리를 마저 굴려 보았다.
실습 장학금은 아티팩트를 마련하는 데 사용하면 돼.
자립 지원금은 졸업하기 전까지 생활비로 쓸 수 있을 거고.
그 두 가지 이유로 빠져나간 뒤에 남은 돈을 계산하면 그리 많이 남지 않을 텐데.
이전 생에서는 차진명의 제안에 수긍한 이후 차씨 일가에게 비공식 장학금이라는 이름의 지원금을 꾸준히 받았었다. 이능청에 입사하여 S급으로 상승한 이후에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기에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나마 괜찮은 방법은 등급이 낮은 던전을 공략하여 최종 보스를 처치한 후 보상을 얻고 거기서 취득한 마석도 현금으로 반환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졸업하지 않은 청소년 각성자가 혼자 하기엔 제한이 많았다. 매번 학교에 허락도 받아야 했고, 보호자도 필요하다.
여느 비각성자 청소년처럼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았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청소년이라고 할지라도 각성자라면 강한 힘을 가진 만큼 관련 법령이 무척 까다로웠다.
웬만한 업장에서는 그 조건을 다 충족하는 대신 애초부터 고용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그럼에도 굳이 찾는다고 한다면 그건 불법도 서슴지 않는 위험한 장소일 확률이 높았다.
혹시 실습 조원 중에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설연호를 제외하고는 집안 사정이 복잡하거나 독특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근육 단련 기구에서 이십여 분 정도 시간을 보내던 나는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가장 좋은 건 동료들을 모아 던전 공략 소모임을 꾸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모임을 꾸리면 혼자서 훈련하는 것보다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훨씬 많았다.
나 혼자서는 E등급 던전 공략도 겨우 진행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여럿이 되면 그보다 높은 등급의 던전의 공략을 시도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공략을 성공한 뒤에 얻는 보상도 한층 짭짤해지겠지. 어디 그뿐인가.
주기적으로 모여서 훈련한 후에 던전 공략을 시도한다면 각각의 약점을 보완하는 동시에 그들이 바라던 만큼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학기 실습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고, 설연호를 제외한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으니 그들의 장점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함께 고민해 볼 수도 있겠지.
우선 훈련 장소는 7층 필드로 고정될 예정이고.
대부분 기숙사에 없을 테니 모두가 학교에 올 수 있는 날을 찾아봐야겠네.
설연호는 소모임의 주축이 될 테니 무조건 만나서 설득해 봐야겠지.
이야기가 정리되면 다른 사람들은 차례로 찾아가거나 연락을 취해야겠다.
그즈음 스트레칭을 하고자 매트 위에 앉은 나는 맞은편 거울을 바라보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대강 빗어 수습하고 있으려니 문득 공희찬이 떠올랐다.
맞다. 공희찬은 어쩌지?
이미 내 머릿속에 공희찬은 차진명의 끄나풀 정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면서 소모임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절할 방법 없나.
땀을 식히며 궁리하고 있으니 때마침 휴대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지잉―
나는 바닥에서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야, 너 돌았냐? 돌았어? 정신 나갔냐고!!
늘 느끼는 거지만 얘도 참 목소리가 크다니까.
귓가에 닿지 않게 조금 떨어뜨린 채로 받았으니 망정이지.
―넌 내가 아주 우습지? 기껏 선심 베풀어 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네가 어떤 새끼인지는 진작 알고도 도와준 내가 등신이다!
비스듬하게 쥐었던 휴대전화를 좀 더 젖히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의 나는 질린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래서 공희찬이 내 표정 가지고 생난리를 쳤나 보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깨닫고 있으니 공희찬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야! 너 왜 대답이 없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니까? 너 어제 던전 관리인한테 아무것도 안 주고 그냥 나왔다며. 들어가기 전에 몬스터 처치해서 얻은 마석을 반납하는 게 지령이라는 건 들었을 것 아니야! 근데 왜 빈손으로 나와서 쌩 가 버리냐? 너 진짜 돌았어?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공희찬의 말에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다 알면서 왜 전화했어?”
―아오, 이런 미친!
전화기 너머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희찬은 늘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젖히면서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던전 관리인한테 던전 이름까지 물어봤다며! 그것까지 듣고 네가 네 발로 순순히 들어갔으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나온 건데?
“내가 처치하기 어려운 몬스터였어. 그래서 포기한 거야.”
나는 공희찬에게 핑계를 대강 둘러대며 스트레칭을 이었다.
그러자 휴대전화 너머의 공희찬이 말을 잠시 멈추었다.
이번에는 답답하다며 자기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있겠지.
알고 싶지도 않은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져서 곤란하네.
―그럴 거면 왜 실습 점수를 빌미로 사람 협박까지 해 가면서 부탁한 건데. 심심해서 그러진 않았을 것 아니야. 어? 야, 도해월,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마땅한 이유를 내놓지 않자 공희찬은 길길이 날뛰며 내 위치를 물었다.
대강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지 않으니 점점 분노하는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
“그쪽에서 뭐라고 했는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화를 내.”
공희찬이 이렇게까지 날뛰는 걸 보니 그쪽에서도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는 이상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확인할 수 없으니 답답했겠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존나 깨졌다, 왜! 너 때문에 엄한 나한테까지 경고, 아, 아니다. 들어올 것도 아닌데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진짜 왜 그랬는지 말 안 할 거야?
경고? 차진명은 그런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성격이 아니다.
차진명이 그의 부친 차정주와 유일하게 닮은 것이 바로 언어 습관이었다.
그들 부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격조 낮은 단어나 말투를 구사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단어로 사람을 짓누르는 대신 우회하고 가다듬은 문장을 발화했다.
단번에 듣기로는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는 문장은 거듭 곱씹어야만 의미를 알아낼 수 있었다. 밤낮으로 상기하며 그들의 문장을 해석하고 나면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중간에서 선배가 곤란하게 된 건 미안하게 생각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강효서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 차진명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쪽에서 바라는 지령을 수행하겠다고 던전에 들어가고 나니까 생각이 많아졌어.”
지금까지의 반응을 볼 때 차진명은 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기회를 준 건 고맙지만 굳이 합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내가 왜 그랬는지 그쪽에서도 묻는다면 이렇게 전해 줘. 선배한테 수고로운 일을 자꾸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네.”
당연한 말이지만 공희찬에게는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너 그 말 후회 안 하지?
“전혀.”
단호한 어조로 전하는 것을 듣고 한숨을 길게 내쉬던 공희찬은 머지않아 전화를 끊었다.
차진명에게 내가 전하는 대답은 ‘굳이’와 ‘전혀’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었다.
차진명은 자신이 공들여 일군 모든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 정도면 차진명이라는 사람을 이루는 중심축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을 것이다.
내 대답을 전해 들은 차진명의 반응 같은 건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이번 생에서 아쉬워지는 쪽은 내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한층 홀가분해진 걸음으로 체력 단련실을 빠져나온 나는 7층 필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