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7
27화. 대책 마련 (2)
[지금부터 모의 던전 테스트 중간 점검이 시작됩니다.] [현재까지 처치한 몬스터의 숫자가 테스트 점수에 반영될 예정입니다.]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햇빛 한 줄기 새어 들지 않는 회색 하늘.
살갗을 짓무르게 하는 눅눅한 공기와 땀이 주르륵 쏟아지는 고온의 열기.
그보다 사람을 더욱 불쾌하고 찝찝하게 만드는 무릎 아래의 늪지대.
나는 척척해진 바짓단이 한층 더 엉망이 되는 걸 방치하면서 다리를 휘적였다.
물속에서 걷는 듯한 느린 걸음, 한 걸음이 벅차고 더디게만 느껴졌다.
밑창을 힘껏 포개면서 전진할 때마다 물컹한 진흙이 뒤꿈치를 자극했다.
내리 쥐고 있던 백색 권총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새하얗던 것이 거뭇해져 있었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말끔했으나 이전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목이 타는 갈증에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한껏 젖히고 두 손으로 총을 쥐었다.
까악―!
까아악! 까악!
까악!
걸음을 멈추면 그 즉시 발목까지 쑥 빠지는 진흙 더미를 고쳐 디디며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줄지어 선 열대 나무의 가느다란 잎사귀들이 길고 얇은 칼날처럼 뻗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위로 둥근 궤적을 그리며 날갯짓을 거듭하는 검은 새가 울음소리의 주인인 듯했다.
그것들을 매섭게 노려보는 사이 한쪽 다리가 무릎까지 푹 꺼지고 말았다.
그대로 발목을 휘적여 보았으나 더 깊이 빠지기만 할 뿐 쉽게 빼낼 수 없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짓씹으면서 방아쇠를 연이어 당겼다.
탕!
탕!
탕!
까악! 깍!
어둑한 허공을 향해 레몬 빛 탄환이 폭죽처럼 기다란 궤적을 남기며 튀어 오르더니 차례로 검은 새를 관통했다. 마지막 울음소리를 끝맺지 못한 몸이 차례로 낙하했다.
[저주받은 검은 새(E)를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검은 새(E)를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검은 새(E)를 처치했습니다.]눈앞에 떠오른 푸른 활자를 전환점 삼아 푹 꺼진 무릎을 힘껏 들어 올렸다.
상체를 최대한 기울여 근처의 나무를 손바닥으로 붙든 채 서둘러 남은 발을 뺐다.
“강효서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이곳은 지난 학기의 강효서가 다녀온 실습 던전을 토대로 구현한 공간이다.
실제 던전처럼 마나 에너지를 활용하여 구축한 공간은 실제의 던전과 모든 것이 흡사했다.
강효서를 떠올리며 묵묵히 걷다 보니 진흙으로 가득 찬 늪지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이전보다 건조하고 단단한 지면에 한쪽 발을 세게 구르면서 진흙을 털었다.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본 전경은 이전까지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이곳 정글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이 슬라임 몬스터였다.
김미솔의 말대로 그것들은 가지마다 맺혀 눈길이 닿을 적마다 새똥처럼 쏟아졌다.
E등급에 불과한 놈들을 처치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거였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천리안’ 스킬을 시전하며 살펴본 미래에서도 그것들을 완전히 배척하고 전진할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에서 몬스터가 쏟아지니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람의 냄새를 맡는 대로 악착같이 달라붙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없었다.
한번 몸에 붙기라도 하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통증을 유발하는 통에 무척 곤욕스러웠다.
강효서는 이런 상황에서 조를 어떻게 이끌었을까.
악조건을 다 격파하고 최종 보스 근처까지 갈 수 있었던 비법이 궁금해졌다.
[모의 던전 테스트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입니다.]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던 나는 손끝에 묻은 진흙을 보고 멈췄다.
“젠장. 찝찝해서 미치겠네.”
이마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대강 정리하려 고개를 한껏 젖혔다.
이제는 호흡할 때마다 숨결에 습기가 배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시종일관 사람을 짓누르는 불쾌한 감각을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스킬 ‘천리안’이 발동됩니다.] [‣ 천리안 (S)천 리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얻게 됩니다. 시간의 궤도에 진입함으로써 천체의 흐름을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순간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던전 내부에 한 갈래의 바람이 산뜻하게 휘몰아쳤다.
숨을 내쉬는 동안 근미래로 내달리는 시간이 축 늘어뜨린 손바닥을 스치며 정진했다.
동시에 예민하게 활성화된 오감으로 무수한 장면들이 비선형적인 형태로 흡수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계산한 건 지금까지 처치한 몬스터의 수와 현재 위치였다.
이어 최종 보스 거점까지의 거리를 확보하고 소요 시간을 계산했다.
최단 시간 내에 그곳까지 다다를 수 있는 설계까지 확보하니 두통이 밀려왔다.
지난 일주일 내내 무리해서 체력 훈련과 모의 던전 테스트를 진행한 탓일까.
낮은 등급의 던전 위주로 돌았는데도 체력이 너무 금방 닳는다니까.
‘멸절의 설산’에서 복귀한 뒤로 일주일 내내 무리해서 훈련을 감행했던 건 머릿속이 복잡한 것도 있지만 이전의 감각을 되찾으려는 이유 또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현장 실습처럼 다른 이들에게 버프를 걸고 설계를 실행하는 작업은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니 S급 헌터였던 과거의 나와 괴리감이 상당했다.
D급과 S급 사이에 하나의 우주 정도는 당연히 존재할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 우주가 이토록 광활할 거라는 사실까지는 넘겨짚지 못해서 문제였지만.
그러므로 나에게 이번 방학은 모자란 실력을 기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던전에서 복귀한 이후 훈련을 거듭한 덕에 스탯이 일정 수준 상승하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체력적 한계에 부딪히며 체내 마나 수치가 위험 수준으로 치솟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기도 여러 번이었다.
과거로 되돌아와 한 달의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출발점을 다르게 잡은 이상 미래에 벌어질 일 또한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C등급에 불과했던 실습용 던전에 나타난 스킬라.
방학식 당일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사장 차정주.
차정주의 움직임을 따라 일찌감치 나를 부른 차진명까지.
아직까지는 주변의 도움을 받거나 나 혼자서도 대처할 수 있는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 더욱 복잡하고 난처한 일도 얼마든지 벌어지고도 남을 것이다.
당장 내가 가정하는 건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예전보다 일찍 발생하는 경우였다.
아직은 나만 알고 있는 이 가정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리게 된다면 어떨까.
나는 머릿속으로 그나마 믿을 만한 어른인 정건후를 떠올려 보았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정건후에게 내가 본 것을 털어놓는다면 그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S급 헌터인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당장은 편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후일은 장담할 수 없었다.
고로 정건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의 누군가에게 손을 뻗기는 해야 하는데.
마땅한 이름을 고심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설연호와 그 외의 조원들을 떠올렸다.
현장 실습을 통해 그들이 지닌 재능과 가능성은 충분히 검증되었다. 좀 더 가다듬기만 한다면 훨씬 뛰어난 실력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역시 며칠 내로 설연호를 만나야겠어. 지금쯤 리호 길드 쪽에 있으려나.
던전 공략 소모임을 꾸리기에 앞서서 그와 논의해 보면 괜찮은 답이 나올 듯한데.
그즈음에서 머릿속에 그리던 계획을 정리한 나는 다시금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면서 일전에 고안해 두었던 설계를 상기해 보았다.
남은 시간 동안 최종 보스 근처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강효서가 남긴 기록도 깰 수 있었으면 하는데.
혼자서 여기까지 온 것도 무리였으니 불가능하려나.
과거의 나였다면 지친 기색 없이 최단 시간 내에 공략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때의 나와 다르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꾸만 답답해졌다.
그 순간 시종일관 끈적하고 눅눅한 늪지대의 저편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쿵쿵. 쿵.
쿵쿵쿵쿵쿵쿵.
그것은 몸집이 거대한 한 존재가 움직이며 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진동이었다.
둔중하게 지면을 두드리는 소음과 함께 떼로 몰려온 것은 우드 골렘이었다.
이곳의 좋은 점은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을 느낄 새도 없이 새로운 상황이 눈앞에 들이닥친다는 것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의 수를 눈대중으로 헤아리던 나는 현재에 몰입하면서 백색 권총을 집어 들었다.
탕! 탕!
쉬익. 푸시식.
푸시시식.
녀석들이 몰려오는 쪽으로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은 나무의 몸통처럼 생긴 우드 골렘은 이때까지 마주친 몬스터들과 확실히 달랐다.
이때까지 처치한 몬스터들은 징그러울 만큼 강한 생명력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우글거리는 녀석들은 생명이 거세된 채 타자의 의지로 조종되는 것 같았다.
D급 몬스터인 우드 골렘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천리안’ 스킬을 발동하며 파악한 공격 패턴에 반박하기만 해도 이곳에 있는 녀석들 전부를 처치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녀석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는 것이었다.
당장은 눈대중으로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 내가 익혀야 할 것은 내가 가진 힘을 알맞게 분배하는 법이다.
S급 헌터였을 적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고민이었는데.
나한테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질 줄이야.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때면 단순히 시간만 되돌린 것이 아니라는 모든 것이 원점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피부로 실감되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우드 골렘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탕!
탕!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대열의 전면에 있던 놈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뒤이어 도미노에 걸린 것처럼 썩은 통나무들이 저들끼리 걸려 엎어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노려 잽싸게 두 발을 놀리기 시작한 나는 방아쇠를 몇 번 더 당겼다.
탕! 탕!
엉성하게 얽힌 우드 골렘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넘어선 뒤 녀석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을 때까지 전력을 다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무성하게 솟아난 수풀 사이로 코브라 형태의 몬스터가 언뜻 보였다.
조금만 더.
그렇게 입속말로 되뇌며 오른손에 들린 권총을 고쳐 쥐었다.
정건후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이곳에 다다른 이상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다.
어느새 사람의 기척을 인지한 거대한 크기의 코브라가 수풀 사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탕!
그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상으로 모의 던전 테스트를 종료합니다.] [모의 던전 테스트 결과 집계를 시작합니다.]이윽고 하얀 빛이 시야를 뒤덮으면서 주변의 풍경이 차츰 변모해 갔다.
자리를 정리하고 빠져나올 즈음 손아귀에 들린 휴대 전화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집에 안 내려갔어] [기숙사에 있는데 왜?]발신인은 설연호였다. 화면 속 활자를 읽던 나는 차츰 눈살을 찌푸렸다.
기숙사에 있었다고? 근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뒤이어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 발신인은 홍원하였다.
나는 연이어 떠오른 두 사람의 메시지를 보면서 눈가를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