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젤라또와 작당 모의 (1)
그 두 사람은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거울을 마주 보고 선 채로 칫솔질하던 나는 손길을 뚝 멈췄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 묘하게 거슬렸다.
그동안 나는 설연호와 어느 정도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현장 실습도 함께하고 그 이후로도 이리저리 길드다 어디다 같이 다니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설연호도 분명 나에게 어느 정도는 의지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설마 말할 만한 타이밍을 놓쳐 버린 걸까?
방학식 당일에는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기는 했지.
하지만 굳이 얼굴을 보고 직접 이야기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연락처라면 현장 실습 직전 훈련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모두와 공유했었다.
거울 속에서 모호한 표정을 짓는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칫솔질을 이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심정이 고스란히 옮겨 간 건지 전보다 속도가 느려졌다.
양치질을 마친 나는 차가운 물을 손아귀에 가득 담아 얼굴을 적셨다.
부지런하게 손을 놀린 다음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생각했다.
살다 살다 이런 묘한 감정을 느껴 보다니. 별일이 다 있네.
생각해 보니 이전 생에서는 전혀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때의 내게 설연호는 어디까지나 잘 따라오는 부대원 중 하나였으니까.
사령관이었던 내가 설연호에게 기대한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 그 외에는 더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설연호는 언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도리어 어떤 임무든 훌륭하게 수행하며 만족감을 주었다.
서로가 요구하는 것만 성실하게 제공하며 어떤 것에서도 밑지지 않는 관계.
그것은 사령관과 부대원에게 허락된 가장 이상적이고 안정적인 거리감이기도 했다.
그런 거리감을 이번 생에서 유지하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정도가 가장 편하기도 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누구든 같은 인생을 두 번씩 살게 되면 이런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생기는 건가.
말한다고 한들 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질문하게 된다.
화장실에서 나와 침구를 정돈하고 커튼을 걷고 나니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과거의 내가 설연호에게 걸었던 기대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배제되어 있었다.
애초에 상명하복을 토대로 수립된 관계이니 그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는 보지 못한 설연호의 모습을 너무도 많이 맞닥뜨려 버렸다.
돌아선 뒤에도 며칠 내내 마음에 걸렸던 건 리호 길드에 있던 설연호의 모습이었다.
설연호를 부대원으로 영입하기 위해 리호 길드 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그의 입지를 약점 삼아 스카우트 제안을 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없었다.
* * *
똑똑.
단숨에 설연호가 머무르는 층으로 다다른 나는 닫혀 있는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세요? 해월이니?”
문 너머로 들리는 음성이 괜히 어색하고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과거에는 사령관님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더니 이제는 이름을 막 부르네.
머지않아 문이 열리면서 간만에 보는 설연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 통화가 길어져서 연락 남겨 놓은 걸 못 봤어. 여기까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잠깐 들어올래?”
그의 말대로 누군가와 통화하며 시달리기라도 한 건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익숙하지만 조금 다른 구조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머무는 곳과 달리 1인용으로 제공된 설연호의 방은 깔끔하고 차분했다.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물건만 놓여 있으면서도 섬세하게 꾸민 흔적이 느껴졌다.
“누구랑 통화했는데 그래?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책상 앞에 놓여 있던 의자의 등받이 방향을 돌려 두고 걸터앉으며 말했다.
잠시 벽을 바라보는 설연호가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온 전화였어.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감정이 좀 상해서. 그냥 그 정도야. 다른 문제는 없었어.”
집에서 온 전화라면 리호 길드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설연호는 돌아갈 집도 있으면서 왜 여기 남아 있는 건가 싶네.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기숙사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현장 실습 기간 내내 여러모로 시달렸으니 학교가 질려서라도 나갔다가 돌아오겠거니, 했거든.”
설연호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 전화를 뒤집어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털썩 앉더니 맞은편 의자에 앉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도 기숙사에 남아 있는 줄 알았으면 먼저 연락할 걸 그랬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음, 그냥 몰라서 연락을 안 한 거였나 보네.
설연호가 일부러 내게 연락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듣고 나니 서운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홍원하도 마찬가지인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선배 말대로 실습하면서 쌓인 피로가 상당하더라. 푹 쉬고, 모의 던전 테스트도 돌리면서 지냈어. 선배는?”
성문 길드에 찾아간 일과 그곳에서 들어간 던전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내 말을 경청하던 설연호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이어 말문을 열었다.
“나도 너랑 비슷했어. 방학에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에 남은 건 처음이어서 그런가. 집에서 연락이 계속 와서 좀 곤란하기는 하네.”
그렇게 말하는 설연호의 눈길이 뒤집힌 채로 놓인 휴대 전화로 비스듬하게 흘렀다.
“방학이 아니면 쉽게 볼 수 없으니 가족들도 아쉽게 느껴지나 봐.”
나는 설연호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르고 골라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 내 대답을 들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일부러 나 배려해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야?”
뭐지? 반응이 왜 이래.
우선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뒷덜미에 손아귀를 감아 문질거렸다.
“리호 길드 사무실 방문했을 때 이미 눈치채고 있었잖아. 다른 애들은 모르는 것 같아도 너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조사하는 동안 계속 나까지 신경 써 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고.”
정건후도 그렇고 설연호도 그렇고 눈치가 왜 이렇게 빠른 건지.
“지금 그 표정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은 거지?”
뭐야? 어떻게 알았지.
“네가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이다 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도 있기는 해. 근데 지금처럼 따로 있으면 표정만 봐도 속마음이 읽히거든.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 내가 좀 편해졌나 보다?”
“그거야, 뭐. 거의 한 달 동안은 실습 때문에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과거 이맘때는 누구도 나의 변화를 신경 써서 들여다보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나를 잘 아는 건 보육원에서 지낼 때부터 함께했던 문제혁이 정도였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헌터 아카데미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예외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나저나 왜 보자고 한 거야?”
내가 설연호에게 만나자고 한 건 어째서 기숙사에게 남아 있는 걸 나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장 실습을 무사히 마쳤고, 방학이 되었고, 차진명의 커뮤니티에 접근을 시도했다가 우연히 비밀을 맞닥뜨린 나는 또다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는 설연호가 반드시 함께해야 했다.
그리하여 설연호를 설득하기 위해 무엇을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마침 설연호가 등지고 앉은 창문 너머의 하늘이 너무도 쾌적했다.
“예전에 보건실에서 선배한테 말했던 이야기들 전부 기억하고 있지.”
며칠 뒤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은 믿기지 않을 만큼 화창했고.
“물론 기억하고 있지. 그건 왜?”
이토록 더운 날씨에 전화로 몇 차례 시달린 듯싶은 설연호는 무척 피로해 보였으며.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는 계획이 하나 있어. 이번에 세우는 계획은 내가 말했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이행되어야 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해 준 설연호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었다.
“계획. 목적. 반드시 이행. 가만 듣고 있으면 네가 쓰는 단어들은 어딘가 심각하고 비장한 것 같아. 이번에는 또 뭔데?”
게다가 당장은 무거운 이야기를 듣고 싶은 눈치가 아닌 듯했다.
“그러면 뭐……. 아이스크림 먹으러 나갈래?”
고심하던 나는 나조차 생각지도 못하던 말을 꺼내 버렸다.
“응? 갑자기? 너랑 나랑?”
“생각해 보니까 학교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방학인데 기숙사 말고 어디 나간 적도 없기도 하고.”
* * *
그러니까 이게 설연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젤라또라는 거지.
나는 눈앞에 놓인 작은 종이컵에 담긴 다홍빛 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일반적인 아이스크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질감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곳곳에 잘게 갈아 넣은 동결 건조 딸기 조각을 하나씩 세어 보았다.
“얼른 먹어. 쳐다보는 사이에 다 녹겠다.”
맞은편에서 스푼을 쥐고 있던 설연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학교에서 그나마 가까운 번화가에 자리한 젤라또 가게는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했다.
저마다 젤라또가 담긴 작은 컵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팔자에도 없던 아기자기한 가게에 찾아온 건 순전히 설연호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연호가 좋아한다고 했던 게 정말 젤라또였던가?
희미한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린 탓에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도 있었다.
언젠가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설연호가 말한 걸 스치듯 들었던 거였으니까.
어쩌면 설연호가 아닌 다른 부대원의 취향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걸린 스푼을 고쳐 쥐면서 맞은편의 설연호를 보았다.
다행히 설연호는 열대과일 맛 젤라또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왜? 너도 이거 먹고 싶어? 아까는 딸기가 좋다면서.”
선뜻 먹어 보라며 내어 주는 설연호에게 손을 저었다. 설연호가 정말 좋아하는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잘 먹는 걸 보니 마음은 놓였다.
간만에 학교, 길드 사무실, 던전이 아닌 평화로운 장소에 다다른 것만으로 환기가 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설연호가 몇 번 더 재촉하자 나도 스푼을 들고 조금 녹아내린 다홍빛 젤라또를 떠먹었다.
가만히 음미하고 있으니 입안으로 작은 딸기 조각이 씹히면서 상큼한 맛이 가득 퍼졌다.
생각보다 맛있네?
이전에는 이런 간식 같은 건 손도 대지 않았던 터라 다소 낯설고 자극적인 맛이었으나 나쁘지 않았다. 다시 스푼을 움직여 몇 번 더 떠먹으니 더위도 한결 누그러드는 기분이었다.
“맛있어? 되게 잘 먹네.”
슬그머니 웃으면서 묻는 설연호를 보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차분하게 스푼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얼마 전에 새로운 계획을 하나 세웠어. 품이 제법 많이 드는 계획이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 그 과정에 선배도 함께해 줬으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