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9
29화. 젤라또와 작당 모의 (2)
설연호는 내 말을 다 듣더니 쥐고 있던 스푼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 둘만 있게 되면 물어보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가 온 것 같네.”
“뭔데?”
나도 그를 따라서 스푼을 정리한 뒤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설연호가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사실 던전에 입장했을 때부터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어. 처음에는 이상하다 싶었는데, 좀 특이한 후배라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고 넘겼지. 그런데 지나면 지날수록 의아해지더라고. 네가 날 한계까지 밀어붙였을 때도 그렇고, 그 검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도 그렇고.”
음, 뭘 묻고 싶은 건지는 알 것 같은데.
나는 설연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냅킨으로 끈적한 손가락을 닦았다.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말을 잇던 설연호는 근처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거야? 던전에 들어갔을 때까지는 네가 여러 포지션을 잘 활용할 줄 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뿐만이 아닌 것 같더라.”
“음, 그랬지.”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예전부터 막역하게 지낸 건 아니잖아? 내가 너한테 잘해 주려고 해도 먼저 물러나는 건 항상 너였어.”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부터 친하게 지냈어야 했나.
“주어진 일은 항상 열심히 하려고 하면서도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일은 한사코 꺼리던 애가 나를 이렇게나 믿는다고? 비밀도 얘기하고, 새로운 계획에도 합류하라고 하고?”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되묻던 설연호가 다시 나를 보았다.
“게다가 넌 나를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하게 대하잖아.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때까지 지켜봤던 너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어.”
이거 참 난처하네.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그거야…….”
그렇다고 대답을 너무 오랫동안 유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고민하는 척 말끝을 흐리며 설연호의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는 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럴듯한 핑계를 찾고자 한참 머리를 굴리던 나는 고개를 한 차례 까딱였다.
그래, 일단 생각나는 대로 던져 보자.
뭐가 됐든 무작정 뻔뻔하게 굴면 넘어오겠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감정을 가다듬고는 설연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던전에서 우리가 배를 몰고 섬까지 도착했을 때 기억하지. 그때 선배가 마지막으로 남은 포션을 나한테 넘겨줬잖아.”
“응, 그랬었지.”
그 이야기를 들은 설연호도 당시를 회상하는 듯 미간을 미약하게 찌푸렸다.
“그때 마지막으로 남은 포션이 선배한테도 얼마나 간절했을지 잘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내가 섬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니까 선뜻 건네주던 모습을 보면서 느꼈지.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나한테 마지막 포션 한 병만큼의 기대를 걸어 보는 사람이라면 믿어 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거야.”
솔직한 심정을 풀어 전달한 나는 설연호의 반응을 지켜봤다.
꽤 오랫동안 대답이 없던 그는 바닥으로 눈길을 떨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이해가 되네. 하지만 난 그때 왜 그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 중 하나였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를 향한 믿음이 생겼을 리는 없으니까.
“그럴 것 같았어. 만약 내가 선배랑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마지막 포션은 다른 사람한테 넘기지 않았을 거야. 곧장 마셔 버리고 귀환석부터 가져왔겠지.”
내 대답을 듣던 설연호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으며 장난스레 투닥거리던 것도 잠시였다.
금세 잦아든 적막을 견디면서 상념에 잠겨 있던 설연호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예전에 알던 너랑 지금의 알던 너는 달라도 너무 달라.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어.”
내가 대답할 말을 고심하는 사이 설연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가벼운 어조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으나 설연호의 질문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건 내가 나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나조차도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였으니까.
내 정체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삶을 처음 겪었던 과거의 내가 살던 세계는 멸망해 버렸다.
회귀하여 같은 삶을 두 번 사는 나는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과 다가올 미래의 기억을 갖고 있으니 그렇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웃으면서 묻기는 했어도 이미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데, 선배. 그러면 나도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편하게 얘기할게.”
당장 내 정체에 대한 답을 완전하게 내릴 수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설연호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그 어느 시간대에도 내가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써는 확언해 줄 수 없어. 선배가 나한테 마지막 포션을 건네던 그 순간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건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던 거랑 비슷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의 뜻이 일치하지 않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모의 던전 테스트를 진행하던 순간의 답답함이 다시금 턱 밑까지 솟아났다.
설연호는 이런 내 심정을 이미 이해했을까, 아니면 이해하려고 할까.
나는 입술 밖으로 꺼내지 못할 질문을 시선에 담아 보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보건실에서 네가 그 검을 어떻게 사용할지 말해 줬을 때 정말 많이 놀랐어. 그걸로 다가올 재난을 막는다니. 지금 생각해 봐도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해.”
“…….”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은 네 태도를 보니 더욱 궁금해졌어. 대체 네가 뭘 하려는 건지. 그 검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해서 재난을 막겠다는 건지도.”
잠잠하게 설파하는 설연호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새로운 계획을 이행하려면 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지. 네가 원하는 대로 도움을 줄게. 대신 조건을 하나 걸고 싶어.”
“무슨 조건? 얘기해.”
“방금 내가 건넨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확언할 수 있게 되면 나한테도 알려 줘.”
한때는 의아해하던 설연호가 이제는 내 곁에서 함께하게 되었다.
“그래. 선배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줄게.”
당연하게도 내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 * *
제삼자의 입장으로 차진명의 커뮤니티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가 운영하는 비밀 커뮤니티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돌고 있다.
공희찬의 전언에 따르면 구성원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구조로 추정된다.
여기까지는 과거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상응한다.
문제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다른 정보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문 길드와 커뮤니티 사이에 연결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미래의 나도 알지 못했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성문이 관리하고 있으나 차진명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 중인 E등급 던전에는 S급 마석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던전은 2027년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의 시발점이 된다.
이번 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내가 기억하는 부분과 큰 흐름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사소한 지점이 달라지거나 완전히 상반되는 상황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정보만을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 되었으니 그에 대처할 방안이 필요했다.
차진명은 소수 정예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 또한 그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제공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결속 관계를 다지며 서로를 자연스레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방금까지 네가 설명한 커뮤니티가 암암리에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어.”
긴 설명을 신중하게 새겨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설연호가 답을 내놓았다.
어느새 젤라또가 담겨 있던 종이컵이 사라지고 차가운 커피가 담긴 유리잔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갈증을 가라앉히고자 눈앞에 놓인 음료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가 5학년 때였을 거야. 그때 강효서가 나한테 잠깐 시간을 낼 수 있냐고 묻더니 둘만 있는 장소에서 커뮤니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더라고. 정확히 그런 단어를 언급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학교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설연호가 5학년이었을 때라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4학년이었고 당시에는 차진명도 학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가 4학년에서 5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이었거든. 강효서한테는 학기 시작할 때까지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고. 막상 3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고 나니까 강효서가 다시 찾아와서 나한테 얘기했던 건 없던 일로 해 달라고 하더라.”
“먼저 말해 놓고 없던 일로 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곧장 되묻는 내 질문에 설연호는 고심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추측하는 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내가 몬스터를 죽이지 않는 헌터라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도 그 무렵이었거든. 정건후 선생님의 현장 실습 수업을 들으면서 내 입으로 거기 있던 학생들한테 직접 말한 걸 강효서도 듣고 있었으니 그게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현장 실습 수업은 5학년부터 수강할 수 있었으므로 내 기억에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선배의 일화까지 듣고 보니 그 커뮤니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어떤 건지 감이 확실하게 잡히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마침 적절한 예시를 들려주면 나야 고맙지.
“강효서가 나한테 접근한 건 내가 리호 길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이후에 거절당한 건 내가 조잡한 힐만 가능하다는 약점을 가져서 그런 거겠지.”
“조잡한 힐이라니. 우린 그 힐로 살아 나왔어. 그리고 그 선배는 선배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선배 말대로 그 부분을 약점 삼아서 뭔가를 해 보려고 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선배가 그 사실을 수업에서 말해 버린 이상 더는 쓸 만한 약점이 아니게 되었을 테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설연호와 대조되는 공희찬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진명이 공희찬을 선택한 건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할 터였다. 차진명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아는 차진명이라면 공희찬의 약점을 더 주목하고도 남지.
공희찬은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나 학교에서 그를 따르거나 신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예측하건대 극심한 다혈질은 물론이고 주변을 포용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두각을 드러내려는 이기적인 면모 때문일 것이다.
설연호는 자신의 약점을 차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공희찬은 아니었다. 대신 공원에서 지령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며 언성을 높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공격할 때마다 은연중에 자신의 약점을 드러냈을 것이었다.
“네가 한 말을 정리해 보자면 그 커뮤니티의 주축이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매번 유심히 살피고 있다는 거네. 그리고 그건 커뮤니티의 일원을 고르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테고.”
“그렇지. 하지만 그 커뮤니티에 소속된 인원은 소수에 불과해. 나름대로 엄선한 사람들만 거기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야.”
나는 얼음이 반쯤 녹으면서 겉면에도 습기가 맺힌 커피를 몇 모금 더 마셨다.
그동안 나눈 대화를 정리해 보려는 건지 창밖을 보고 있던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던 계획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될 거야. 나는 지금까지 얘기한 커뮤니티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데리고 나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거든. 물론 쉽진 않겠지만. 그래서 우선 생각하는 건 소모임이야.”
“소모임이라…….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강효서가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거겠네. 그때 강효서가 나 말고도 몇 명한테 더 접촉했는지 눈치로 알고 있었어.”
“그래? 그게 다 누구였는데?”
“강효서는 나처럼 집안이 유명한 길드에 속해 있거나, 헌터가 아니어도 사회에서 명망이 높거나, 가정 형편은 별로여도 실력이 무척 뛰어나거나, 돈이 아주 많은 후원자가 있는 게이트 고아들한테 주로 접촉했어. 그 기준에 속하지 못한 애들은 아는 척도 안 하더라.”
그즈음에서 말을 멈춘 설연호가 음료가 담긴 잔의 둥근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체스의 폰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게 목표라는 거지? 당장은 어려우니까 그 전에 소모임을 만들어 준비해 보겠다는 거고.”
역시 똑똑해. 내가 부대원 하나는 잘 뽑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