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30
30화. 일보(一步) 전진
설연호와 나는 젤라또를 한 컵 더 나눠 먹으면서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참의 모의 끝에 상호 간의 합의를 거쳐 내린 결론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결성된 소모임은 정보 공유뿐만 아니라 결속을 이루는 데 목적을 두기로 한다.
둘째. 모든 움직임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조용하고 꾸준하게 이어져야 한다.
셋째. 집단의 정체성이 확보되고 뜻이 합일되기 전에는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친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토대로 가장 먼저 포섭할 이들을 선정해 보았다.
나와 어느 정도 친밀하면서 강효서가 선택하지 않았을 법한 사람들이 금세 떠올랐다.
“홍원하가 일한다는 곳이 여기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팔월의 초입에 이른 거리는 한층 짙어진 가로수의 초록빛과 녹을 듯한 열기가 만연했다.
더위를 잘 견디는 나조차 맥없이 굴복시킨 여름의 기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홍원하도 기숙사에 남아 있다고 했던 말은 사실이었으나 낮부터 저녁까지 자리를 비운 탓에 얼굴을 쉽게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학기 중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락마저 더디게 응하는 통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좁은 인맥과 몇 안 되는 연락처를 총동원해 홍원하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김미솔을 통해 알아낸 바에 의하면 홍원하는 번화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가만 보자. 내일이 화요일이지? 화요일이면 고깃집에서 일하고 있을 거야.’
‘다른 요일에는 어디서 일하는데?’
‘월, 수, 금은 태권도 학원에 있고, 화, 목, 토는 고깃집이라고 들었어. 문자로 가게 위치만 보내면 되지?’
별다른 접점이 없던 홍원하와 김미솔은 실습을 진행하면서 꽤 가까워졌다고 했다.
7학년 맏이답게 늘 어른스럽던 김미솔에게 홍원하가 동생처럼 의지한다나 뭐라나.
가만 보면 실습 조원 중에서 성격을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홍원하였다.
실습을 진행하는 동안 홍원하는 김미솔이 곁에 있어서인지 내내 얌전해 보였다.
조용하게 지내면서 자기 할 일만 확실하게 하는 줄 알았는데. 긴장해서 그런 거였나?
곤란에 처한 사람을 구해 준다면서 대뜸 사이렌을 울렸을 때는 얘도 참 보통이 아니구나 싶기는 했지.
다혈질이지만 단순한 공희찬의 행동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기라도 했지만 홍원하는 그것도 아닌 터라 더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작열하는 태양빛을 피해 손날로 차양을 드리운 채로 걷다 보니 붉은색 간판이 보였다.
김미솔이 말해 준 가게 이름이다.
정수리를 짓누르는 듯한 열기에 호흡마저 버거워지던 찰나 가게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독한 더위를 따라 치솟은 갈증을 해갈하고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서 오셨어요?”
가게에 들어선 나를 맞이한 건 홍원하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요.”
“네. 이쪽으로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친절한 음성을 따라 여자 직원이 가리킨 자리에 착석했다.
앉은 자리에서 둘러보고 있으니 주방 안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를 안내한 직원과 같은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은 홍원하는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멀끔했으나 땀을 흘렸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젖은 채였다.
금세 눈을 거두고 메뉴판을 확인한 나는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머지않아 달군 숯불을 담은 그릇에 기다란 쇠막대를 꿰어서 든 홍원하가 나타났다.
무게 중심을 잃지 않으려 신중히 걷는 홍원하는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젓가락으로 먼저 나온 쌈무가 담긴 그릇이나 뒤적이던 나는 이내 손을 내리고 기다렸다.
“뜨거우니까 손 조심하세요.”
능숙한 손놀림으로 숯불 위에 불판을 얹은 뒤 흡입기의 각도를 조정하는 동안에도 홍원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고기는 직접 구워 주시나요?”
그제야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홍원하가 나를 돌아보았다.
“깜짝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홍원하는 이때까지 생각이 다른 쪽으로 향해 있었는지 유난히 놀라며 물었다.
“고깃집에 고기 먹으러 왔지. 왜 왔겠어.”
하던 일이나 마저 하라며 손짓하자 홍원하가 고기를 한 덩이씩 집어 불판에 올렸다.
치이익.
“혼자서 이 더위를 뚫고 여기까지 오다니. 그것도 대낮에 불 앞에서 고기를 먹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나밖에 없기는. 대낮인데도 손님 많은데?”
나는 집게를 부지런히 놀리며 고기를 얹는 홍원하를 앉은 자리에서 올려다보았다.
“연락 못 받은 건 미안해. 일 끝나고 돌아오면 시간이 늦기도 하고, 너무 피곤해서 답장할 여력이 없었어. 그렇다고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나 여기 있다고 누가 알려 줬어? 미솔 누나야?”
설연호는 선배라면서 김미솔한테는 누나라고 하네.
철판 한가득 고기를 얹은 다음 집게를 내려놓은 홍원하가 비로소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실습도 끝났는데 감시하러 온 건 아닐 테고. 할 말이라도 있어?”
* * *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 방학 내내 일해야 해서.”
고깃집 오른쪽에 자리한 담벼락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홍원하가 대답했다.
“그렇게 시간을 많이 뺐진 않을거야. 너에게도 분명 유익한 시간일거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는 이제 훈련이 급한 상태는 아니야.”
그래, 그렇겠지. 넌 이미 C급에 B등급 스킬도 하나 보유했으니까.
“이렇게 알바 하는 것보다 훈련해서 던전 들어가는 게 수입 면에서도 훨씬 좋을 텐데?”
“음, 그야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나는 일단 들어가 볼게. 맛있게 먹고 가.”
홍원하와 달리 아쉬운 것이 많은 나는 계속해서 그를 붙잡아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머지않아 홍원하는 가게 사람들이 자신을 찾을 거라며 간단하게 인사한 뒤 사라져 버렸다.
설연호와 상의했던 대로 소모임에 관한 이야기는 서둘러 꺼내지 않기로 했다.
먼저 포섭하기로 한 실습 조원들이 한꺼번에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는 의견에 나 또한 동의했다.
기숙사에 기거하는 설연호와 홍원하를 제외한 다른 조원들은 전부 흩어진 상태였다.
정건후가 개설하는 특별 강좌는 이들을 모이게 할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랑 설연호만 좋다고 생각해서 되는 게 아니었네.
첫 타자인 홍원하부터 칼같이 거절할 줄이야.
담벼락 그늘에 서서 또 다른 수를 고심하던 나는 김미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김미솔은 마침 근처에 있었다고 하더니 선뜻 만나자고 말했다.
아무래도 홍원하를 다루는 법은 김미솔한테 배우는 게 좋겠어.
* * *
김미솔이 말한 카페에 앉아 더위를 식힌 뒤 펼쳐 두었던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현장 실습 조장으로 선발된 후 남겨 두었던 메모는 지금까지 유용하게 쓰였다.
이번 실습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길드장들도 조원들을 주목하고 있을 거야.
김미솔 정도라면 웬만한 중견 길드에서 컨택이 올 법도 한데.
손가락 사이로 펜을 돌리던 나는 김미솔의 이름에 간단한 표시를 남겨 두었다.
마침 여름방학도 되었으니 7학년한테는 슬슬 컨택이 들어갈 텐데.
내 기억으로는 이 근처에 길드 사무실이 있었다고 했어. 그게 어디였지.
다시금 손샅에서 펜을 돌리며 생각에 빠져 있던 내 앞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풀썩 앉았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밖에 되게 덥다.”
무더위에 붉게 상기된 뺨을 보기 좋게 부풀리며 웃는 김미솔이었다.
김미솔은 작은 손가방과 서류가 담긴 투명한 파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침 근처에 있는 길드 사무실에서 미팅 중이었거든. 생각지도 못하게 너한테 연락이 와서 어찌나 반갑던지.”
여느 때처럼 교복이 아닌 사복 정장을 입고 있는 김미솔은 제법 의젓해 보였다.
내 눈에는 흔한 사회 초년생처럼 보였으나 본인은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어제 원하가 일하는 곳 물어봤었잖아. 거기서 밥도 먹고 온 거야?”
금세 음료 주문까지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은 김미솔이 물었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그녀는 빨대로 커피를 몇 번 젓더니 그대로 들이켰다.
“홍원하도 기숙사에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연락을 통 안 받더라고. 찾아간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배한테 연락한 거였어. 걔가 선배랑 제일 친해 보여서.”
얼음을 한가득 띄운 커피를 몇 모금 삼키던 김미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 걔가 누나가 둘이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 건지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제일 편했나 봐. 그나저나 너도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거야?”
“나는 돌아갈 곳 딱히 없어서. 기숙사 아니면 보육원인데, 학교가 차라리 편해.”
“방은 아직 혼자 쓴다고 했었지? 그런 거라면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겠다.”
내 대답에 금세 수긍하던 김미솔이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나는 비어 있는 자리에 놓인 가방과 서류를 힐긋거렸다.
“컨택이 생각보다 빨리 들어왔나 보네. 보통 여름방학 막바지에 분주해지지 않나.”
“맞아, 보통 그런 편이지.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조에서 있던 일 때문인지 금방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더라고.”
한두 군데도 아니고 여기저기라니. 이대로 김미솔을 빼앗기면 안 되는데.
나는 다른 길드를 견제하는 기색을 숨기면서 딸기스무디가 담긴 잔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다녀온 곳은 어느 길드였는데?”
달해 길드만 아니면 돼. 제발.
“달해 길드. 내가 너희랑 있을 때부터 거기 가고 싶다고 계속 얘기했었잖아. 마침 연락이 와서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젠장. 이런 상황에는 예측이 빗나가 주면 좀 좋냐고.
“무엇보다 이번 실습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지면서 나를 되게 긍정적으로 봤다고 했어. 미팅 자리에 부길드장까지 와서 반겨 주더라. 내가 이런 대접을 받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하는 김미솔은 상당히 들뜬 것처럼 보였다.
“결정은 언제까지 하는 건데? 선배는 달해 길드로 아예 마음 정한 거야?”
나는 아직 펼쳐 두었던 노트 사이에 펜을 끼운 뒤 그대로 접어서 내려놓았다.
“앞으로 미팅은 몇 번 더 잡힐 것 같아. 지금은 구두로 약속하는 정도였고 자세한 건 다음 학기 현장 실습까지 봐야 결정되겠지.”
잠시 말을 멈춘 김미솔은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지금은 아무것도 실감이 안 나.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기회를 얻은 건 맞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까 내가 정말 잘 지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싶어서 계속 고심하게 돼.”
그 심정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깊이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좋은 기회였다. 아직 한 학기 동안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건 김미솔의 마음을 돌릴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소모임이 무사히 결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후일의 내 목표와 관련이 있었다.
헌터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동안 기틀을 잘 잡아 두면 졸업 후에 모임의 일원들을 데리고 나만의 커뮤니티, 더 나아가 길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만의 세력을 가지게 되면 차진명이든 누구든 막을 수 있겠지.
일단 김미솔 또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구성원 중 하나였다.
언젠가는 그녀 또한 내가 만들게 될 길드에 영입해야만 한다.
“그나저나 이 더운 날 원하 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있었지. 근데 홍원하 걔 왜 그렇게 바쁘게 일하는 거야? 무슨 사정인데?”
“음…….”
대체 얼마나 심각한 사연이길래 김미솔이 저런 표정까지 짓는 거야.
“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가 봐. 걱정할 만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어.”
“진심이야? 남들한테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서 일부러 숨기는 건 아니고?”
“물론이지. 너도 같이 지내면서 느꼈겠지만, 원하 개가 좀 독특하잖아.”
그냥 독특한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다는 말이 적합하지 않나.
속내가 훤히 읽히는 공희찬보다 훨씬 까다롭기도 하고.
“그렇다면 다행이네. 사실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원하 말고 나한테? 뭔데?”
“두 사람 말고도 다른 조원들한테도 말하려고 했던 거야. 어쨌든 마주 보고 앉았으니까 여기서 바로 얘기할게. 듣고 마음에 들면 선배가 홍원하도 설득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