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여름 방학 소모임 (1)
시계는 어느덧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의 집결 장소는 도서관 3층 회의실이었다.
“한 시 다 됐어. 이때 모이기로 한 것 맞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김미솔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금만 있으면 금방 오겠지.”
눈을 감은 채 말하는 설연호의 목소리에서 피로감이 묻어났다.
“아까는 누구랑 통화한 거야? 표정이 별로 안 좋던데.”
김미솔은 선선히 수긍하더니 고개를 틀고 설연호에게 물었다.
문간을 돌아보던 나도 곁눈으로 설연호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집에서 온 전화였어. 요즘 들어 나한테 바라는 게 많아졌나 봐.”
자세한 것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리호 길드와 관련한 화두일 터였다.
그 말만 듣고도 내막을 얼추 알아챈 김미솔이 말없이 설연호를 다독였다.
“늦, 늦어서 미안해. 선배들도 안녕하세요.”
그 순간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강준희가 허겁지겁 나타났다.
어찌나 급했는지 안경이 콧잔등까지 내려온 것이 보였다.
“그래도 시간 맞춰 왔네. 와서 앉아.”
나는 벽면에 달린 시계를 힐긋거린 뒤 강준희에게 손을 흔들었다.
금세 짐을 풀고 자리에 앉은 강준희는 칠판 근처에 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서 두근거리는 기색이 읽히는 듯해 슬쩍 고개를 틀면서 외면했다.
설연호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벽면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휴대전화 액정을 몇 차례 들여다보던 김미솔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해월아, 원하는 좀 늦을 거래. 오늘 오전부터 태권도 학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제 막 수업이 끝났나 봐. 간단하게 씻고 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좀 더 걸릴 수도 있겠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손 하나를 허리춤에 얹으며 비스듬하게 섰다.
“홍원하는 청소년 각성자도 잘 받아 주는 업장만 골랐나 보네.”
그 말에 김미솔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태권도 학원처럼 몸 써야 하는 예체능 학원은 그래도 괜찮은가 봐. 고깃집은 비각성자 친구 명의를 빌렸다고 하는 것 같더라. 아무튼, 오랜만에 모이니까 되게 반갑다. 다들 잘 지냈어? 어떻게 지냈는지 말 좀 해 봐.”
김미솔은 말문을 맺은 다음 특유의 살갑고 쾌활한 눈빛으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준희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연호는 그래도 리호 길드 사무실 갔을 때 한번 봤었는데. 어떻게 지냈어?”
설마 리호 길드에서도 컨택이 간 건가?
일순 눈가를 찡그리다가도 금세 표정을 풀었다. 대신 김미솔의 눈동자가 향하는 강준희를 바라보며 가벼운 동조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음, 어머님 가게를 돕고 있었어요. 방금도 학교 오기 전까지 가게 일 도와드리다가 온 거예요. 다들 나중에 놀러 오세요. 해월이 너도.”
그러고 보니 설연호 말고는 다들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있었네.
“어머님이 국숫집 한다고 하셨나? 예전에 스치듯 들었던 것 같은데.”
흥미로운 듯 상체를 정면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인 설연호가 말했다.
강준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려앉은 안경을 손등으로 추켰다.
“두 분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한 학기만 지나면 졸업이라 고민이 많으실 것 같은데 어떤지 궁금해요…….”
“맞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지. 시간은 왜 이렇게 쏜살같이 흐르는 걸까?”
장난스레 긴 한숨을 내쉬던 김미솔은 편안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김미솔이 실습 내내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건 그 상황이 주는 특수성 때문에 그랬던 거였나.
그런 와중에도 차분하게 잘 이끌었던 걸 보면 자질 자체는 탁월하단 말이지.
“그러게. 남은 한 학기도 지난 학기처럼 빠르게 지나갈까 봐 그게 좀 아쉽기는 해.”
아쉬운 기색을 표하던 김미솔과 눈을 마주하던 설연호가 동조하며 말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강준희도 한층 편해 보였다.
“아, 그런데 해월아.”
나는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 모르고 굼뜨게 돌아보았다.
언제가 됐든 이름을 불리는 일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근데 오늘 모인 사람들 다 6조 아니야? 원하는 늦게 온다고 말해 줬고……. 그러면 공희찬 선배는? 안 오는 거야?”
음,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오래 고민하면 수상하다고 생각할 텐데.
“얼마 전에 그 선배랑 나랑 약간 다퉜어. 그 이후로 날 만나기 싫어하는 것 같길래 일부러 안 불렀고.”
“아, 아, 그렇구나……. 그러면 혹시 나중에도 안 부를 생각인 거야?”
“원한다면 나중에 연락해 볼게. 당장은 어려울 것 같지만.”
강준희는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대로 알아듣고 있긴 한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강준희 쟤는 공희찬이랑 붙어 있으면 은근히 부딪히더니.
허구한 날 다투기는 해도 없으니 허전한가 보네.
“다른 사람들도 강준희랑 같은 생각인 거지?”
남은 두 사람도 짧게 고민하더니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희찬은 내게도 처치 곤란한 문제 중 하나였다.
불필요한 말을 남발하고 다혈질적인 성격만 아니면 그럭저럭 소임은 다할 텐데.
하지만 여전히 공희찬을 떠올릴 때마다 배후에 있을 차진명의 모습이 그려졌다.
차진명은 내가 전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으려나.
이번에도 운이 좋다면 공희찬이 소식을 물고 연락해 올 것이다.
음, 가만 보니 나도 공희찬을 차진명을 떠보는 연락책 정도로 여기고 있었네.
거기까지 깨달음이 미칠 즈음 어딘가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크게 중요한 감정은 아닌 듯해 고개를 슬슬 젓고 넘겨 버렸다.
강준희에게서 거둔 눈길을 문가로 틀어 두고 있으니 홍원하가 나타났다.
“다들 미안.”
간결하게 인사를 전한 홍원하가 문을 열고 몸을 들이자 젖은 머리카락에서 샴푸 냄새가 훅 번졌다. 나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린 채 손을 흔들었다.
김미솔의 말대로 금방 씻고 온 건지 한층 보송한 상태로 나타난 홍원하는 손목에 매달려 부스럭거리던 봉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 때문에 오래 기다렸을까 봐. 아이스크림이야.”
이따금 이상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어도 양심이 없진 않아서 다행이네.
화기애애하게 봉투를 뒤적이는 무리의 뒤쪽에서 지켜보며 고개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이전 생에서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것이 설연호와 젤라또를 먹은 뒤로 종종 생각났다.
모두가 제 몫을 하나씩 집어 간 뒤 나도 봉투 안쪽을 살펴보았다.
운이 좋게도 그때 먹은 것과 비슷한 맛이 나는 과일 맛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할까? 할 말 있다고 부른 거잖아.”
손끝으로 막대를 쥔 채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던 김미솔이 말했다.
나는 포장을 벗기지 않고 잠시 쥔 채 무리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다들 방학인데도 선뜻 모여 줘서 고마워. 시간 내 준 것도.”
다들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베어 무느라 내 말에는 대답 없이 고갯짓만 했다.
“오늘 부른 건 모여서 놀자는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을 거야.”
아이스크림은 잠시 내려놓고 칠판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조장으로서의 나는 실습하는 동안 우리의 합이 꽤 좋다고 느꼈어. 그건 다들 동의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순전히 제비뽑기로 뽑은 건데도 팀원의 밸런스가 이렇게 좋다는 건 엄청난 우연이니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고 있으니 설연호가 묘한 시선을 보내 왔다.
“실습을 마무리하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는 욕심이 생기더라. 좀 더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
칠판 근처를 천천히 배회하며 모두와 눈을 맞추는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2학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행하게 될 헌터 등급 측정에서 지금보다 더 높은 등급을 받을 거야. 그때까지 스탯을 높이려면 던전을 공략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의 내가 혼자서 돌 수 있는 던전의 등급은 F, E등급 정도야. 정말 운이 좋은면 D등급까지.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아.”
과거의 내가 급격한 속도로 성장을 이룰 수 있던 건 사실상 차진명 때문이었다.
차씨 일가는 재산 증진을 목적으로 상점제 무기, 아티팩트 전문 업자와 손을 잡은 채 뒷배를 불리고 있었다.
내가 차진명에게 제공받았던 아티팩트와 무기 또한 그곳에서 공급된 물건이라고 했다.
외에도 성장 물약, 특수 영약 등 성장에 필요한 물건을 필요에 따라 제공해 주면서 단시간 내에 괄목할 수준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너희만 좋다면 우리의 합을 잘 살릴 수 있는 파티를 꾸려 보고 싶어. 여름방학 소모임을 꾸려서 활동하면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만족할 만큼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느새 걸음을 멈춘 나는 허공에서 깍지를 끼우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우선 난 좋아. 그렇지 않아도 몇몇 길드와 미팅을 진행하면서 졸업하기 전까지 부족한 부분을 좀 더 메꿔 줬으면 한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선뜻 대답한 건 예상대로 김미솔이었다.
“나도 누나랑 비슷한 생각이야. 실습하면서 느낀 건데. 회의를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다급한 상황이 되면 헤매는 감이 있더라. 그나마 도해월이 걸어 준 설계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곧바로 움직일 수 있게 각자 고유의 기술을 익혀도 좋을 듯해.”
내가 찾아갔을 땐 고민하는 척도 안 하던 홍원하가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뭐지. 김미솔이 뭐라 얘기했길래 이렇게 태도를 바꾼 거지. 일단 한다니까 됐다.
“사실,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었거든. 다른 사람들은 다 방학마다 성장해서 온다는데 나는 아는 정보가 없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정보가 없어서 무지해지는 기분이 자꾸 드는 게 싫었거든.”
마침 강준희가 핵심을 잘 짚어 주었다.
헌터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이 가진 정보의 양이다.
설연호처럼 길드와 직접적인 연이 있거나 공희찬처럼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 경우는 비교적 손쉽게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거액을 들여 전문 업자를 통해 던전과 관련한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내가 새로운 생에서 승부수를 걸어 보려는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미래의 기억은 직접 살아 낸 시간이라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차진명의 곁에 머무르며 그가 제공한 정보를 모조리 습득해 왔으니 이제는 그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이며 내게 필요한 것들을 선점해 나갈 수 있을 테다.
차진명은 물론이고 그의 측근들에게서 습득한 정보까지 알뜰하게 활용할 생각을 하니 어깨가 한껏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불필요하게 들뜨지 않으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다들 동의한다고 했으니 내가 세운 계획을 마저 얘기해 줄게. 첫 주에는 7층 필드에서 모의 던전 테스트를 돌리면서 다시 한번 합을 맞춰 보자. 이번 학기 실습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있기도 했고, 지형도 너무 특수한 나머지 설연호 선배를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보여 주지 못한 게 더 많다고 생각해.”
허리춤에 손 하나를 얹은 채 자세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사이로 강준희가 말을 얹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고유의 전투 기술을 선보이거나 새로 만들어 봐도 좋겠다는 거지?”
“정확해.”
강준희의 말에 단번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첫 주 동안은 7층 필드에서 훈련하고, 그런 다음부터는 곧장 던전 공략을 시도하자. 괜찮은 던전을 고르는 일은 내가 할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괜찮은 던전’이란 당연하게도 차진명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여기서 더 바라는 것 있는 사람은 지금 얘기해.”
“조건이 괜찮은 던전을 고르려면 그만큼 괜찮은 정보를 선별해야 하잖아. 네가 먼저 알아봐 준다고 하면 우리야 편하기는 한데,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야?”
잠자코 듣고 있던 김미솔이 손을 반쯤 들면서 말했다.
“물론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지. 공략할 던전을 선별하는 건 내가 할게. 대신 너희는 학교에서 얻게 되는 정보를 나한테 가르쳐 줘. 너무 시시콜콜한 수준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 선생님에 관해서든, 학생에 관해서든, 다른 던전에 대한 이야기나 소문이어도 상관없으니 정보라고 생각된다면 가져와 줬으면 해.”
우선은 이 정도로 시작해 보자.
정보가 쌓이다 보면 이 모임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
“이것도 다들 동의한 거지? 중요한 얘기는 전부 했으니까 첫 훈련 날짜부터 잡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