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여름 방학 소모임 (2)
[모의 던전 테스트 입장 인원을 확인합니다.] [에 입장합니다.] [지금부터 모의 던전 테스트가 시작됩니다.]눈앞으로 푸른 활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지며 주위의 풍경이 삽시에 변모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총을 그러쥐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윽고 눈길을 낮추고 보니 이제까지 내가 밟고 있던 굵은 나무뿌리가 보였다.
이곳은 드넓은 숲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극악의 지형은 아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도 제법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흙이 질척거리지도 않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쾌적한 공기가 코끝을 스치며 정신이 맑게 정화되는 듯했다.
혹여 이 맑은 공기에 정신이 압도되진 않을까.
잠시 생각하며 바람의 흐름을 유심히 살폈으나 마나의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근데 여기 진짜 좋다……. 꼭 놀러 온 것 같아.”
상기된 얼굴로 근변의 나무를 만지작거리던 강준희가 말했다.
“아무리 좋아도 던전인 건 마찬가지야.”
단호하게 잘라서 말하자 긴장을 풀고 있던 다른 이들도 자세를 다잡았다.
총신을 그러쥐었던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허리춤에서 분리한 나는 몇 걸음 움직였다.
주변은 한없이 고요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도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대체로 게이트 근처는 최종 보스가 위치한 중심부보다 비교적 평화로운 편이지만, 기이할 만큼 안정적인 환경이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였다.
“이래서 몬스터가 나오기는 할까. 한참 걸어도 안 나올 것 같은데.”
먼 곳을 내다보며 고개를 뺀 홍원하가 중얼거렸다.
“맞아. 이 던전의 공략 조건은 몬스터를 단시간 내에 처치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그러면, 음, 뭘 어떻게 해?”
그때 나와 강준희의 대거리를 지켜보던 설연호가 이어서 말했다.
“오히려 몬스터는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지형이 무난하다는 건 그만큼 마나 에너지가 고르고 얕게 퍼져 있다는 의미일 거야. 최종 보스도 그다지 높은 등급이 아니라는 거겠지.”
나는 설연호를 돌아보지 않고 목소리만 경청하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면에 밑창을 고쳐 얹으며 몸을 풀던 김미솔이 이어서 덧붙였다.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잔뜩 지치게 하려는 속셈이겠지. 몬스터를 마주치기도 전에 체력을 다 소진하게 만들려는 거야.”
“아, 아……. 그것까지 들으니까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강준희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알아들은 걸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괜히 채근했다가 강준희의 사기를 꺾을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몇 번 생각했던 거지만 여기는 진짜 같아요. 건물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 던전에 들어온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네.”
곧바로 덧붙이는 걸 보니 전부 이해한 건 아닌가 보네.
“네 말이 맞아, 강준희. 이곳은 실제 던전과 흡사하지만, 진짜는 아니야. 하지만 이런 모습을 구현하려면 마나 에너지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겠지.”
“너 진짜 잘 안다……. 해월이 넌 나랑 같은 학년인데도 아는 게 훨씬 많은 걸 볼 때마다 신기해.”
강준희가 작은 소리로 감탄하며 말했다.
듣고 있던 홍원하도 수긍하며 고갯짓을 했다.
“나도 준희랑 비슷한 생각. 실습 때부터 느꼈지만 그런 건 다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거야, 뭐. 내가 몸소 통과한 시간을 되짚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다 말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함께 고개를 들었다.
9층 필드가 폐쇄되고 7층 필드가 건설되면서 이곳에 실제 던전과 비슷한 수준의 마나 에너지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동시에 헌터 아카데미 내에서는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9층 필드보다 한층 뛰어난 기술력으로 구현된 이곳에서 계속해서 훈련하다 보면 운이 좋은 경우 스탯이 상승하거나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정 자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낱 뜬구름 잡는 그 소문에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중에는 과거의 나도 있었고.
내가 게이트 고아라는 사실이 알려진 건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나와 같은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한때 언론에서는 게이트 고아 출신의 비각성자는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이 상당하고, 각성자는 게이트 사태 당시에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며 성장 자체를 포기한다는 식의 분석을 날마다 조금씩 다른 뉘앙스로 전달했다. 누군가 의도한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낭설은 당사자들마저 그것이 자신의 흠결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했다.
이러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나는 꿋꿋하게 버티고 견뎠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곳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사회적 명예를 이루는 것을 소명으로 삼을 정도였다.
물론 게이트 고아가 아니더라도 등급 상승을 꾀하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들은 결국 등급이 높은 헌터로 성장하기보다 학문적 재능을 갈고닦아 이능력 관련 연구소나 길드의 사무직으로 취직하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 또한 이론 과목의 성적은 우수했으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헌터로서 명예롭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는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고자 손을 내밀지 않았다. 기나긴 소외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알음알음 전해진 소문을 주워들으면서 근근이 버텨 왔다.
나는 그 썩은 동아줄 같은 소문을 다 헤지고 끊어질 때까지 쥐고 있었다.
* * *
도해월의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던 설연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도해월을 얼마나 믿고 있을까.’
설연호는 더웠던 어느 날 도해월과 젤라또를 먹으면서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 도해월은 이전에 자신이 했던 제안에 대답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도해월과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그에게 역으로 질문하며 답을 우회한 것은 설연호 자신조차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해월이 스스로 깨닫게 된 답을 듣게 되면 그때 자신도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믿는 일종의 회피였다.
설연호는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 도해월의 태도가 거슬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다.
도해월은 자신이 이미 가진 정보와 예측을 통해 내다본 미래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은 언제가 되었든 변함이 없었다.
‘대체 그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한평생 자신을 반쪽짜리 헌터라고 생각해 왔던 설연호에게 도해월은 생전 접해 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럴 거면 그냥 각성자 병원에서 의사를 하는 게 어때? 네가 가진 치유 스킬이 신성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 것 같은데.’
‘계속해서 등급이 상승하는 건 사실상 너한테 가혹한 일 아니야? 헌터 등급이 높으면 뭐 해.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솔직히. 욕심도 과하면 독이다.’
그건 설연호가 이복 누이인 설연리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게이트 고아였던 자신을 선택한 설연진은 누이처럼 매몰차지 않았으나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지난 회의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번 테스트는 김미솔이 주축이 되어서 움직일 거야. 각자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자기 속성에 맞는 던전을 찾아야 해서 이런 던전을 불러온 거고. 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까?”
도해월의 질문에 김미솔이 대답했다.
“작년 현장 실습에서 이 던전에 들어갔던 다른 조원이 내 친구여서 얘기를 좀 들었거든. 이 던전의 지형적 특성이나 주변 환경만 보면 F등급일 것 같잖아. 그런데도 D등급이나 되는 이유가 있기는 하다더라. 어느 순간 사람 기세를 확 꺾어 버린대. 몬스터를 만나서 대치하기도 전에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거지.”
도해월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김미솔의 말에 대답했다.
“선배 말대로 이 던전이 D등급으로 산정된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설연호는 김미솔을 바라보는 도해월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만 보면 자신보다 한 학년 높은 선배를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볼수록 신기하고 이상해. 쟤는 대체 정체가 뭘까.’
* * *
그렇게 한 시간 삼십 분이 지났을까. 설연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뒤에서 힐을 하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이런 곳도 던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람 피 말리는 건 진짜 처음이야.”
강준희는 목이 마르는지 천천히 내뱉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리 정신없이 싸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슬슬 버겁네.”
동조하는 홍원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묵묵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틈틈이 돌아보며 나란히 걷는 이들의 표정과 걸음걸이 따위로 컨디션을 가늠해 보았다. 이들은 일찍부터 앓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좀 더 버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나는 말을 잠시 멈추고 때를 기다렸다.
“이제 나타날 거야.”
그 순간 불길한 새 울음소리가 상공을 울렸다.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연이어 이어지며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휘익―!
탁!
이윽고 어디선가 화살 같은 것이 날아와 나무에 꽂혔다.
“헙!”
그 소리에 놀란 강준희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강준희는 몸을 떨면서 자신의 뒤로 꽂힌 무언가를 돌아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본 그것은 화살이 아니었다.
닿기만 해도 살갗이 녹아내릴 만큼 뜨겁고 끈적거리는 점액을 두른 돌덩이였다.
“저, 저게 뭐야.”
놀란 심정을 추스르지 못해 휘청거리던 강준희를 설연호가 붙잡아 세웠다.
“이제 시작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 아까 설명했던 건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엄지로 총신을 쓸어 단단한 감촉을 느낀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김미솔이 선두에서 공격하면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서포트를 넣는 흐름으로 가되, 그렇다고 해서 물러서 있지는 마.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 준다고 생각해.”
휘익―!
쿵!
그 순간 이전보다 거대한 규모의 돌덩이가 날아와 지면에 내리꽂혔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 그것이 우박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버프 스킬로 충족하지 못하는 부분은 연호 선배가 해결해 줄 거야. 우리한테는 믿음직한 힐러가 있으니 다쳐서 아파할 걱정 같은 건 하지 말고. 선배가 내린 방어막을 믿고 돌진하면 돼.”
설연호를 돌아보니 그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 클리어하기 위해선 선배의 역할이 제일 중요해, 알지?”
그때까지도 설연호의 표정을 읽어 낼 수 없었으나 그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