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35
35화. 여름 방학 소모임 (5)
2035년, 늦가을.
벨레로폰 총사령관 집무실.
“내가 귀관에게 고작 그런 답이나 듣겠다고 지시를 내린 줄 아나?”
나는 문제혁이 건넨 태블릿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뒷짐을 지고 선 채 고개를 숙인 문제혁이 말했다. 이틀 전부터 연락이 두절된 차진명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나는 뻣뻣할 만큼 반듯해 보이는 그의 자세마저 거슬렸다.
“문제혁 대위, 귀관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건지 이제 잊은 건가?”
억눌러 삼키는 분노가 목소리에서 묻어난 건지 문제혁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런 긴급 상황이 닥쳤을 때 귀관이 나 대신 나서서 움직이라고 그 자리에 앉힌 거야.”
책상을 박차고 일어선 나는 미동하며 우뚝 선 문제혁의 근처로 다가갔다.
“귀관이 직접 말했었지. 나한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고.”
그날 오전의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감지되던 불길한 예감과 비로소 마주했다.
그로 인한 불안함을 부정하려 하니 종일 날이 선 것처럼 감정적으로 굴게 되었다.
그때 내 사고의 흐름은 단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라진 차진명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여느 때와 같았으면 스킬을 사용하여 미래를 보았겠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내다본 미래가 내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과 맞닿아 있다면 도통 견딜 수 없을 터였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청장님 위치부터 확보해. 오늘 밤을 넘기는 일은 없도록 하고. 명령이다.”
나조차도 차진명의 행방을 찾는 일에 실패했다. 문제혁이라고 다를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정하고 자취를 감춘 차진명을 찾아낼 수 있을 리 없다.
문제혁의 곁에 선 나는 그의 어깨를 힘껏 움켰다. 짓누르듯 억세게 움키자 문제혁이 고개를 떨궜다. 온갖 복합적인 감정에서 기인하는 나의 분노를 문제혁은 온몸으로 받아 냈다.
그 순간에도 문제혁은 아무런 표정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감정을 말끔하게 도려낸 사람처럼 굴었다.
그마저도 내 명령을 따른 것이겠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듯했다.
차라리 지선일처럼 대놓고 대들거나 설연호처럼 말은 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드러냈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혁에게서는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만약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나는 머뭇거리며 입술을 연 문제혁의 말을 가로챘다.
“귀관이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이행해.”
* * *
그날 밤 세상이 멸망할 줄 알았다면 분명 다르게 말했을 텐데.
나는 팔목을 잡는 문제혁의 기척을 느끼며 눈을 떴다.
굳이 그 손을 거두지 않고 문제혁을 마주 보았다.
“괜찮아? 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원장님이 말해 줬어?”
문제혁은 언제나 내 곁에 있고 싶어 했다.
나는 그 마음이 어린 짐승이 자신을 처음 보살펴 준 존재를 보호자로 인식하는 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생각하는 것과 달리 혼자 살아남기도 급급한 와중에 자꾸만 곁을 맴도는 그가 성가시기만 했다.
누구보다 사람의 기분을 기민하게 읽어 내는 녀석이니 그걸 몰랐을 리 없다.
차진명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의 곁에 머무르며 무수한 죽음에 가담하고 방조한 일조차도 문제혁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 보고 소식 전하고 싶었는데 잘됐네. 나 이번 달 말에 형이 있는 헌터 아카데미로 갈 거야.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어.”
그렇게 말하는 문제혁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더니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이 되었다.
“스킬이랑 뭐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아직 새로 생긴 능력에 익숙해지는 중이라 어색하기도 해서.”
이어서 나와 눈높이가 엇비슷해질 만큼 훌쩍 자란 문제혁의 앳된 모습을 한눈에 담았다.
사람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그리고 또, 음, 나 되게 잘 지냈어. 혹시나 걱정했을까 봐.”
잠자코 문제혁의 목소리를 듣던 나는 팔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그래, 축하해. 드디어 학교에 같이 다니게 됐네.”
그리고 천천히 다독였다. 손끝에 닿는 문제혁의 온기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이 좋은 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 * *
보육원 건물에서 간단히 소개를 마친 이후 번화가까지 나와서 향한 곳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디저트 카페였다.
“이 웃기게 생긴 걸 사람들이 진짜 좋아한다고?”
나는 포크로 조각 케이크에 잔뜩 쌓아 올린 연두색 크림을 툭툭 건드렸다.
“당연하지. 계속 그러면 개구리 얼굴 망가지니까 조심해.”
뭐 아는 개구리라도 되는 건가? 엄청 신경 쓰네.
그러면서도 설연호의 말을 따라 포크는 끄트머리가 접시에 걸치도록 내려놓았다.
“넌 이게 진짜 좋아서 고른 거지?”
맞은편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연두색 크림으로 빚은 개구리가 올라간 하늘색 케이크를 촬영하던 문제혁에게 말했다. 사진을 몇 번 찍고 내려놓은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이런 게 유행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먹어 보는 건 처음이야. 생긴 것처럼 맛도 있었으면 좋겠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끄덕거리며 호응하던 문제혁이 설연호에게 고갯짓을 했다.
부대원이 아닌 학생 대 학생으로 만난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쪼록 생긴 것도 못생겼고 맛도 별로일 것 같은 저 케이크 덕에 두 사람이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면 못 참을 것도 없었다.
“아까 잠깐 듣기로는 기숙사에 들어온다고 하는 것 같던데. 정확히 언제 오는 거예요?”
케이크를 한 입 먹고 커피도 한 모금 마신 문제혁을 향해 설연호가 물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기숙사는 8월 말에 들어갈 것 같아요. 기억하기로는 26일이었어요.”
선선히 끄덕이던 설연호도 빨대로 유리컵 안쪽을 젓더니 요거트스무디를 한 모금 마셨다.
“중도 입학생이 없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라서 신기하네. 같이 지내는 건 한 학기밖에 안 되겠지만 지내면서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줘.”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얘기 잘하니 편하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도통 시선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화사한 카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려다가 금세 포기하고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알아서 이야기를 잘 나누는 듯했다.
특히 문제혁은 나와 달리 무슨 말을 하든 성실하게 반응해 주고 새로운 질문을 이끌어 주는 설연호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했다.
과거에는 눈만 마주쳐도 큰일 날 것처럼 서먹하게 굴던 녀석들이었는데.
이래서 사람은 언제 서로를 알게 되는지가 중요하다니까.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문제혁이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 있었다.
“시간 다 됐어. 가야 한다며.”
“응, 이제 가 볼게. 케이크랑 음료 잘 먹었어요. 다음에 봐, 형.”
주섬주섬 자리를 정돈한 문제혁은 홀가분하게 떠났다.
“그래도 둘이 잘 맞아 보여서 다행이야.”
문제혁이 남긴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찌르면서 말했다.
“왜 나까지 데려오는 건가 싶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아. 오랜만에 보는 동생한테 잘해 주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거지?”
설연호는 가끔 불필요할 만큼 예리했다.
나는 조각난 케이크를 씹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 * *
소모임은 이틀 뒤에 다시 진행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집결 장소는 도서관 3층 회의실이었다.
한 시 정각이 되기 삼 분 정도 남았을까. 마지막으로 김미솔이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안녕. 늦는 줄 알고 식겁했네. 그래도 시간 맞춰 들어와서 다행이다.”
다급하게 들어오면서도 살갑게 인사한 김미솔은 오늘도 정장 차림이었다.
뛰어서 올라온 건지 단정하게 내려 묶은 머리카락이 조금 느슨해진 채였다.
저렇게 차려입고 왔다는 건……. 설마 오늘도?
“오늘도 길드랑 미팅이 있었거든. 전에 얘기했던 달해 길드에서 이야기 나누고 왔어.”
그쪽에서 김미솔을 부르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달해 길드는 게이트 사태 당시 창설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오래된 길드다.
연식이 제법 되는 길드임에도 달해에는 등급이 높은 헌터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과 함께할 구성원을 고르는 기준은 결속력이었다.
길드에 S급 헌터는 없지만, 길드원의 만족도 자체는 높은 편이었다.
리호 길드는 재산 증진을 위해 관리하는 던전의 수를 무작정 늘렸다. 달해 길드의 방식은 그와 비슷한 듯하지만 조금 달랐다.
그들은 등급이 비교적 낮고 던전 브레이크 발생 가능성 또한 적다고 여겨지는 던전들을 오랫동안 안전하게 관리하며 정부로부터 관리 지원금을 지급받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달해에서 김미솔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김미솔은 쉼 없이 달려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잘 구분했다.
지난 훈련에서 내가 겨눈 총구를 맨손으로 틀어막는 걸 보면 배짱도 상당한 듯했다.
설연호와 문제혁은 이전 생에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고 부대원으로 영입하고자 포섭을 시도한 적도 있으니 설득하는 일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그렇다면 김미솔을 내 세력에 포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 설득하는 게 좋을지 계속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아무리 포용력이 좋고 이해력이 뛰어난 편이라지만 내 설득까지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어, 미솔 선배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강준희도 회의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김미솔에게 인사를 건네던 강준희도 자리에 앉았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니 한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다들 모이기도 했고, 한 시도 넘었으니까 마저 얘기해 보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칠판 앞에 서서 이번 회의에서 나눌 안건을 간략하게 적었다.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전투 상황에서 누가 어디에 배치되는지에 대한 거야.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배운 대형으로 전투해 왔지만 상황에 따라서 배치를 수정해 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 저번에 김미솔 선배를 내세운 것도 지형적 특성이 선배에게 한층 유리해서 그런 거였고.”
나는 반듯하게 채웠던 정장 재킷 단추를 풀고 편한 자세로 앉은 김미솔에게 눈짓했다.
“더해서 다루고 싶은 건 앞으로 어떤 지형의 던전을 돌지, 거기서 어떤 형태의 몬스터를 잡아 볼지에 대한 거야. 우리가 온전하게 처치한 건 소형 몬스터밖에 없으니까. 당장 최종 보스를 처치하는 건 무리일 테니 중형 몬스터부터 처치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레 수긍했다.
김미솔은 노트를 꺼내 글자를 적는 것이 보였다.
“스킬도 마찬가지야. 본인의 스킬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다고 생각해. 다음 훈련에서는 스킬을 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로 어떻게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 보자.”
그러자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내내 고민하는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뒤척이던 강준희가 조심스레 손을 드는 것이 보였다.
“제가 사용하는 스킬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기는 했는데 실전만 되면 막막해져서 늘 하던 대로 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도 거수하지 않으면 강준희한테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
강준희는 실습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자신에게 할당한 지시를 따르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순간순간 자신이 직접 판단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은연중에 미루거나 버거워하는 것이 내게도 보일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동안 함께 지내 왔던 강준희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자체가 일취월장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마다 생각에 잠긴 건지 잠잠하던 내부의 적막을 가르고 홍원하가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