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37
37화. 여름 방학 소모임 (7)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떠올린 건 다름 아닌 지선일이었다.
과거의 지선일은 지나가는 말로 자신의 학교생활이 생각했던 것보다 이르게 막을 내려서 아쉽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지선일이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고 다른 이들보다 한 해 먼저 졸업했다는 사실을 금세 떠올렸었지.
차진명이 가장 먼저 부대원으로 영입하라고 했던 것도 지선일이었다.
지선일은 부대원 중에서도 유일하게 길드에서 활동하던 헌터가 아닌 이능청 소속 헌터를 데려온 경우였다.
처음에는 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선일과 함께하는 동안 생각이 달라졌다.
지선일은 내가 구상한 설계를 가장 정확하게 이행하는 유일한 부대원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게 주어진 설계를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구현해 냈다.
때때로 예고 없이 부리는 하극상을 용서해 줬던 것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서도 지선일과 함께한다면 언제나처럼 자신만의 길을 고집하면서도 내가 옳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누구를 데려오고 싶은데? 원래 잘 알던 사람이야? 해월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조금 당황한 것처럼 머뭇거리는 강준희의 목소리를 듣던 나는 눈을 가볍게 감았다가 뜨며 상념을 지웠다.
“사실 아직 모르는 사이야. 걔가 어떤 애인지 소식만 전해 들은 정도거든. 아마 선배들이랑 준희 너도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적 있지 않을까 싶은데. 지선일. 다들 알지?”
“아, 지선일. 나는 알고 있었어.”
“나도 이름은 들어 봤어. 걔 엄청 유명한 애 아니야?”
“맞아. 아직 5학년인데 7층 필드에서 훈련하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더라.”
모두가 알 만한 이름이 거론되자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홍원하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홍원하, 표정이 왜 그래? 지선일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슬그머니 말을 붙이자 홍원하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텀블러 입구에 묻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지운 그가 대답했다.
“예전에 걔랑 좀 다툰 적이 있어서. 그건 개인적인 문제니까. 걔가 동아리에 들어오는 건 상관없어.”
홍원하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지선일과 홍원하가 함께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음,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조합이네.
만약 활동 중에 두 사람이 부딪힌다면 공희찬과 강준희가 실습 내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던 것과 다른 느낌의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저번에 나랑 밥 먹으면서 잠깐 얘기했던 그 일 말하는 거지? 해월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때 그건 서로 오해가 있어서 생긴 다툼인 것 같더라. 원하, 너도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만나게 되면 잘 지내.”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려다가 말았다.
여러모로 심란해지려던 걸 김미솔이 막아 준 덕에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숨을 고른 뒤에는 손뼉을 맞부딪혀 이목을 모았다.
“동아리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하고 싶은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마저 하는 걸로 해. 이번에는 모의 던전 테스트를 몇 번 돌린 다음에 우리가 공략을 시도할 던전에 대해서 설명해 줄게. 다들 집중해.”
던전 공략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자 모두가 진지한 기색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몇몇은 의자를 당겨 앉는 건지 의자 다리와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이번에 우리가 들어갈 던전은 정부에서 관리하는 곳이야. 해가 지날수록 던전의 수가 늘고 있지만 길드의 관리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곳도 제법 많다고 하더라. 사실상 정부도 소유권만 갖고 있고 제대로 된 관리는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래.”
잠시 말을 멈춘 나는 모여 앉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식으로 방치된 던전은 대부분 등급이 낮은 편이야. 우리 같은 학생 헌터들도 비교적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돼.”
차진명은 이처럼 관리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던전들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유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여전히 D급인 상태로 졸업한 이후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차진명이 소개해 준 던전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관리가 미흡하고 등급이 낮지만 이런저런 혜택을 얻을 수 있는 던전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명령대로 최종 보스를 처치해 던전 공략에 성공하고 나면 아이템 상자를 비롯한 보상과 스탯을 얻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만큼 살아 있다는 실감이 생생하게 와닿았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물을 주면 쑥쑥 자라는 식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만족하는 차진명의 반응을 기다리는 게 하나의 낙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후엔 이 던전들을 거의 자신의 던전처럼 입장조차 철저히 관리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아직 학생이라 눈치를 보는 건지. 일단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가장 먼저 공략을 시도할 곳은 D등급 던전이야.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서두른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다들 다음 주에 시간 괜찮지?”
계속해서 칠판 앞을 배회하던 나는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 적었다.
“던전 공략을 시도하기 전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모의 던전 테스트 등급을 D등급에 맞춰 놓고 그 안에서 공략을 성공시키는 거. 현장 실습에서 공략에 실패한 건 당연한 거겠지. 하지만 D등급으로 맞춰 둔 첫 훈련에서도 실패한 건 아쉽게 느껴지기는 해. 내 태도 때문에 미안할 일이 생긴 것과는 별개로.”
나는 전하려는 의미가 곡해되지 않도록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말문을 닫은 이후에는 저마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서 잠잠히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먼저 입을 연 건 김미솔이었다.
“이번 것까지 합하면 나는 벌써 세 번째 실습이거든. 이때까지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느꼈던 것도 체력 분배에 관한 거였어. 보급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제공되는 수가 많은 편은 아니어서 그런지 계속 아쉽고 고민되는 부분으로 남더라. 그렇다고 매번 추가로 사는 건 오히려 배꼽이 커지고.”
이따금 눈가를 찡그리면서 말하던 김미솔의 말에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어느 던전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같이 들어간 사람들한테 얼마만큼 서포트를 해 줘야 하는지 달라지니까 계속 고민되더라고. 그리고 사실 이건 우리가 S급 헌터가 되지 않는 이상 계속 가지고 가야 하는 숙제이기도 해.”
나는 두 사람의 말에 절실히 공감했다.
“남은 한 주 동안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완한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훈련해 보자.”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했다.
죽겠다, 진짜.
팔자에도 없는 다정한 척을 하려니 온몸에 좀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내내 긴장한 나머지 뻣뻣해진 사지를 늘어뜨렸다. 조금만 단호해져도 마음의 문을 닫는 병아리 같은 녀석들을 동료로 삼는 건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 * *
[던전 입장을 시도합니다.] [입장 인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던전 에 입장을 완료하였습니다.]호흡마저 거두어 갈 것만 같은 거센 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힘겹게 버티고 선 발목에 힘을 주어도 절로 허청거리게 될 만큼의 강풍이었다.
“으윽.”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간신히 돌아본 곳에서 모두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강준희, 바람부터 거둬 줘.”
거센 바람에 인상을 찡그린 나는 가장 먼저 강준희에게 지시했다.
강준희는 허둥지둥 팔을 휘젓더니 이내 눈을 감고 어깨를 곧게 폈다.
머지않아 바람의 흐름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힘겹게 숨을 터뜨린 나는 반사적으로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밀어 지웠다.
한층 또렷해진 시야에 담긴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들판이었다.
“일단 앞으로 가자. 여기서도 한참 걸어야 하니 가면서 설명할게.”
* * *
그렇게 한 시간가량 전진했을까.
허리춤까지 자라난 풀숲을 헤치며 걷다 보니 거대한 나무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폭풍이 계속해서 몰아치는 탓에 이따금 흐려지는 초점을 다잡고자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도 등급이 비교적 낮은 던전이라서 그런가. 몬스터를 처치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바람이 계속 불어서 미치겠어. 파도가 거센 바닷가에 서 있는 기분이야.”
손등으로 연신 눈가를 문지르던 홍원하가 감상을 내놓았다.
그 목소리마저도 날이 선 바람 사이로 절반쯤 흩어지고 말았다.
게이트 근처에서는 강준희의 스킬로 버텼으나 그마저도 잠시였다.
던전 내부를 가득 메운 바람을 한 사람의 힘으로 굴복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이 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게 강준희였다. 나는 한순간 강준희의 마나가 모조리 소모될 때까지 그의 스킬로 버텨 볼까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지만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였어.
한 주 내내 모의 던전 테스트를 구동하며 얻게 된 가장 큰 수확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여러 번의 테스트가 이어지는 동안 이들은 내게 계속해서 새로운 의견을 피력했다.
그 과정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나는 극한의 효율만 추구하고 단시간 내에 공략을 성공시키는 것에만 몰두해 왔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내 설계대로 움직여야 하는 이들의 속사정 같은 건 구태여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살피지 않았던 건 부대원뿐만이 아니었다.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일까.
던전에 부는 바람은 상념마저 비집고 들어설 만큼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이곳에 남은 모든 씨앗을 말리겠다는 의지가 매 순간 살갗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반쯤 수그린 채 정면을 응시하면서 전진해 나가는 무리 앞에 우뚝 선 거대한 나무를 가리켰다.
“저기 있는 저 나무가 이 던전의 핵심이야.”
내가 가리킨 물푸레나무는 아직 먼 곳에 떨어져 있음에도 가깝게 느껴질 만큼 거대했다. 이 던전에 들어온 사람들이 전부 팔을 벌리고 끌어안아도 모자랄 만큼 오랜 세월을 살며 나이테를 늘린 나무였다.
구불구불하게 뻗어 나간 뿌리는 어린아이의 정강이만큼 치솟아 있었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내다본 뿌리는 머지않아 숨을 거둘 사람이 죽음에 끌려가지 않고자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악착같이 움키는 모양처럼 보였다.
“저 나무가 정말 던전의 핵심이라면 최종 보스가 근처에 있어야 하지 않아? 지금은 아무리 봐도 나무밖에 안 보이잖아. 땅도 잠잠하고.”
“나도 저렇게 큰 나무가 죽어 있는 건 처음 봤어. 보기만 해도 께름칙한 걸 보면 저쪽이 중심부인 건 맞는 것 같은데.”
홍원하와 설연호가 차례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 두 사람이 말문을 맺을 즈음 풀숲을 가르고 나타난 뱀 형태의 몬스터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탕!
총성과 함께 고개를 쳐들고 돌진하던 뱀이 목을 꺾으며 스러졌다.
나는 바짓단에 튄 초록색 혈흔을 잠시간 내려다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물푸레나무에서 태어난 님프의 이름을 멜리아이라고 해. 이 던전은 한때 멜리아이가 기거하던 곳이었어. 그리고 저 나무는 님프들의 현신 같은 거야. 어느 사건을 계기로 이곳에 님프의 축복이 걷히게 되면서는 썩은 나무만 저렇게 덩그러니 남아 버렸지.”
“님프들이 전부 사라져서 저 나무가 죽은 거라면……. 최종 보스랑 더더욱 관련이 없는 것 아닐까? 설마 우리 방향을 잘못 들어오거나 한 건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생기 없이 꺾인 풀숲을 맨손으로 거두면서 길을 확보하던 강준희가 말했다.
“설마, 아니겠지. 이미 한참을 왔는데 다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하면 좀 막막해지는데.”
끝없이 부는 바람으로 인해 눈이 시린 건지 김미솔이 고개를 떨군 채로 말했다.
나무가 있는 쪽으로 전진하는 동안 풀숲 사이로 괴상하게 생긴 벌레가 날아다녔다.
“게이트를 넘어온 뒤로 어느 방향으로 전진했든 결국에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을 거야. 지금도 저기 있는 죽은 나무가 우리를 이끌고 있거든.”
“그럼 우리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 저 나무를 베어 버리기라도 해야 하는 거야?”
나는 곧바로 대답하려다 바람에 말문이 막혀 잠시 침묵했다.
고개를 몇 번 젓고 엉키는 머리카락을 넘기고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최종 보스는 저 아래 잠들어 있어. 우리가 나무를 베어 내려고 하면 근처에 숨어 있던 몬스터도 여럿 나타날 거야. 이것만 말해도 대강 감이 잡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