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39
39화. 테티스의 눈동자
무리하여 강행한 훈련과 던전 공략의 여파로 며칠을 내리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비로소 여독이 풀린 건지 한층 개운해진 상태인 내게 달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현장 실습 장학금은 들어왔고. 며칠 전에 얻은 마석값도 들어온 것 같네.”
휴대전화 알림을 기점으로 기상한 즉시 계좌 상태부터 확인했다.
차근히 손가락을 놀리며 확인해 보니 들어와야 할 것들이 전부 입금되어 있었다.
리호 길드에서 지급된 금액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학교에서 리호 길드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니지? 응당 받아야 할 돈이었어.
어떻게 사람 목숨이 걸린 일에 이것밖에 못 주냐고 해도 모자라.
아니, 내가 생각도 고등학생이 됐나 이 정도 돈에 웃는다고?
금세 표정을 지우며 들뜬 기색도 잠재운 나는 찬물에 세수부터 했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감싸 냉기를 지우며 거울을 마주 보았다.
“개학까지 이 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남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지금까지의 나는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운한 상태로 화장실을 빠져나와 옷장을 열고 멀끔한 옷을 꺼내 입었다.
준비를 마치고 전신 거울 앞에서 모습을 비춰 보다 오른손을 뻗어 보았다.
과거로 돌아온 뒤 한참을 허전하게 두었던 검지를 채울 차례였다.
* * *
J 호텔 라운지.
헌터 전용 무기 및 아티팩트 상점.
이곳은 현재 차정주의 명의로 운영되는 헌터 전용 상점이다.
차씨 일가가 대외적으로는 헌터 인권 함양에 힘쓰며 온갖 활동을 벌이는 동안 재산을 끝없이 불릴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상점제 무기 및 아티팩트를 다루는 사업 때문이었다.
외에도 그들은 전국에 위치한 마력 연구소 수십 곳과 결탁하여 재산을 증식하고 있었다.
2학기 초반에 진행되는 헌터 등급 측정에 사용되는 측정 기구도 차정주가 결탁한 한국대학교 마력 연구소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J 호텔 또한 차정주가 맡은 사업 중 일부였다. 고층 라운지의 경우 안쪽에서 헌터 전용 무기 및 아티팩스 상점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일반인은 입장이 제한되어 있었다.
추후 이 상점은 차진명이 운영 권한을 물려받게 된다. 나에게 손을 내민 차진명이 나를 데리고 가장 먼저 동행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J 호텔 라운지 상점에서는 다른 무기 및 아티팩트 상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물건을 취급했다. 품질이 상급인 물건은 가격을 셈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고가였다.
졸업 이후 기본적인 스탯부터 보완해야 했던 나는 계속해서 던전을 돌며 공략을 꾀했다.
차진명과 함께 이곳에 찾아온 것도 A급 헌터로 등급이 상승했을 무렵이었다.
마침내 필요한 자금이 확보된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건 그때 내 손으로 직접 구매한 것과 같은 아티팩트를 구하기 위해서다.
“안녕하십니까. 실례지만 확인을 위해 헌터 라이센스를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트 차림의 훤칠한 남자 직원이 무척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응대했다.
가지고 있던 지갑을 열고 헌터 라이센스를 보여 주자 남자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확인되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이런 종류의 상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맞이하는 고객에 대해 그 어떤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어느 때나 모든 고객을 동등하게 대했다. 그건 물건을 사지 않고 구경만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대외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앞서 걷는 남자를 따르는 길목으로 부드러운 융단이 밟혔으나 가시밭길 위를 걷는다고 생각해야 틈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에 대한 정보를 이미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움직임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고객님, 이쪽에 잠시 앉아서 대기해 주시겠습니까. 감정 전문 헌터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내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학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척 깍듯한 태도로 임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청록색 벨벳과 상아색 프레임이 어우러진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일렬로 놓인 유리 진열대 안쪽에는 여러 종류의 아티팩트가 전시된 채였다.
머지않아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감정 전문 헌터 정수민입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 종류를 확인해 보시고 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를 가진 여자는 흰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여기서 나를 지켜보는 이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아티팩트와 무기를 취급하는 이런 공간은 헌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보 싸움의 중심지가 되기 적합했다.
헌터 전용 상점에서 누가 무엇을 구매하는지, 무엇을 유심히 들여다보는지에 관한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차곡차곡 수집되었다가 적재적소에 팔려 나갈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이곳에 방문했다는 소식도 차진명의 귀에 들어가게 될 거다.
나는 잠시 여자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한적해 보이는 공간을 한차례 훑듯이 둘러보았다.
저 너머 보이지 않는 눈들을 의식하는 것처럼 어깨를 곧게 펴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찾고 있는 아티팩트가 있습니다.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해당 아티팩트의 이름 혹은 생김새를 가르쳐 주시면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가지런히 모은 손끝에 잠시간 시선을 두었던 나는 고개를 들고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테티스의 눈동자. 이곳에서 취급하는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물건은 비교적 최근에 공수한 겁니다. 많은 분이 눈독 들일 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떻게 알고 이렇게 일찍 찾아오셨네요. 확인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순간 반색하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한 뒤 모습을 감췄다.
나는 대답 대신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서 잠잠히 대기했다.
이전 생에서의 내가 이 물건을 습득한 건 지금 시점에서 2년이 지났을 때였다.
다수의 이목을 끌었던 물건이 어떻게 2년씩이나 보관되어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무사히 물건을 공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생각하기로 했다.
잠자코 대기하고 있으니 흰 장갑을 착용한 여자가 작은 크기의 보석함을 들고 나타났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말씀하신 아티팩트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옅은 회갈색 가죽으로 둘러싼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보석함을 천천히 열어 보였다.
그 안으로 내게 너무도 익숙한 모양의 반지가 담겨 있었다.
작은 흠집 하나 없는 은색 반지와 중앙에 배치된 푸른 보석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가운데 박힌 푸른색 보석과 그것을 둘러싼 은색 테두리였다.
마치 솟아오르는 파도처럼 장식된 것이 보석을 둥글게 감싼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테티스의 눈동자.
바다의 여신이라 불리는 테티스의 눈동자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반지에 모든 물과 그 흐름을 관조하는 여신의 축복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내가 이것을 수중에 넣은 건 A급 헌터로 등급 상승을 꾀했을 때였다.
‘천리안’ 스킬 또한 A급으로 상승하면서 어떤 방해도 없이 미래의 장면을 온전하게 내다볼 수 있게 된 것을 기념하고자 고른 물건이었다. 이 물건만큼은 차진명의 도움 없이 구매하고 싶어서 낮은 등급의 던전을 수도 없이 공략했던 기억이 덩달아 떠오르는 듯했다.
이후로도 차진명으로부터 여러 종류의 아티팩트를 선물 받았으나 내게 가장 소중한 의미로 남은 건 이 물건이었다.
“이대로 구매하고 싶습니다. 가격은 구매 확정 서류를 작성하면서 같이 확인할게요.”
푸른 보석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가느다란 물살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 갈래로 나뉜 그것은 둥글게 순환하며 아주 작고 고요한 파도를 만들어 냈다.
“이대로 결정하신다면 구매 확정 서류와 보증서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준비할까요?”
“네.”
여자는 내 의지를 거듭 확인한 다음 다른 직원을 불러 서류와 보증서를 준비했다.
신원 확인을 비롯한 이런저런 절차를 거친 후 관련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필요한 단계를 거치는 동안 준비된 아티팩트를 직원이 내 앞으로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대로 보석함을 열고 보니 마지막으로 세척된 반지가 전보다 환한 빛을 발했다.
“모든 절차 진행 및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내게 주의 사항을 간략하게 안내한 여자와 직원이 모습을 감췄다.
나는 그들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 이전처럼 오른손 검지에 반지를 착용했다.
삽시에 반지가 살갗에 알맞게 달라붙으면서 은은한 열감을 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푸른 보석의 안쪽으로 작은 물살이 둥글게 회전하며 파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같은 색감의 빛이 퍼지면서 눈앞으로 익숙한 활자가 떠올랐다.
[아티팩트 ‘테티스의 눈’을 획득하였습니다.] [‘메티스의 눈’이 사용자에게 귀속되었습니다.] [현 시각부터 마력 스탯이 ‘+45’ 상승합니다.]내가 바라던 게 이거였지.
흡족한 얼굴로 활자가 흩어질 때까지 바라보던 내 눈앞에 무언가 다시 떠올랐다.
이건 뭐지?
분명 익숙한 문구였다. 내가 이 문구를 언제 봤었더라.
의아해하며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나는 놀란 기색을 가다듬으며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이곳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가는 누군가는 수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라운지를 벗어난 나는 낯익은 거리를 최대한 우회하면서 걷고 있었다.
혹여 누군가 내 행적을 뒤쫓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여름의 절정에 오른 도시는 한없이 후덥지근했다.
가만히 걷기만 해도 땀이 줄줄 쏟아지는 최악의 날씨였다.
구태여 편한 이동 수단을 택하지 않고 멀리 돌아서 걷기로 한 건 일전에 떠오른 안내 문구 때문이기도 했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은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던전에서 성물을 들고 나왔을 때도 같은 문장을 봤어.
미공개 스킬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나도 모르게 잊고 있던 과제를 마주한 기분에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되살아났다.
같은 안내가 두 번이나 나왔다는 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조건을 달성했다는 뜻일 텐데. 그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지잉―
지잉―
그때 힘껏 움켰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소모임 일정은 당분간 못 잡는다고 얘기했는데.
발신인은 의외로 공희찬이었다.
“여보세요?”
―씨발, 야! 너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휴대 전화를 잠시 귓가에서 떼어 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데?”
―너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너 때문에 다 망친 거라고 이 개새끼야!
“나 때문에 뭘 망쳤는데. 선배, 진정하고 차분하게 얘기해.”
이런 식으로 대뜸 전화를 걸어 화를 내는 게 벌써 두 번째다.
이제는 휴대전화에 공희찬의 이름만 뜨면 무슨 소리를 할까 싶어 두통이 일었다.
―진심 화병 나서 뒈질 것 같으니까 당장 만나서 얘기해. 전에 만났던 공원으로 튀어와.
“대뜸 전화 걸어서 무슨…….”
뚜― 뚜― 뚜―
하다못해 이런 애가 날뛰는 것까지 다 받아 주고 있는 노릇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이렇게 인자할 수가 없을 만큼 인자해졌구나.
후덥지근한 공기가 살갗에 닿는 것만 해도 불쾌한 와중에 짐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