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41
41화. 가을 학기와 폭풍 전야 (2)
묵묵히 젓가락질을 잇던 강효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차진명은 특유의 정제된 태도로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차진명이 겨우 그 한마디를 하면 상대는 그에 열 배쯤 되는 말마디를 조잘거렸다.
“잘 지냈어?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그동안 더 멋있어진 것 같아. 유학은 재미있었어? 힘들지는 않았고?”
젓가락까지 내려놓은 차진명은 그 앞에서 조잘대는 여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적당히 상냥한 태도를 보이는 그는 이따금 웃기도 했으나 어딘가 미묘하게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사람이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데…….’
강효서는 자신도 모르게 차진명을 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애써 놀란 기색을 다잡은 그는 고개를 작게 가로젓고 젓가락질을 이었다.
‘아, 나 요새 피곤한가 보네. 자꾸 말도 안 되는 생각이나 하고.’
방금 자신도 모르게 했던 생각을 절대로 차진명에게 들키지 않으리라고 다짐한 강효서는 누적된 피로를 가늠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릴 적부터 함께한 차진명은 지금까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쉽게 간파할 수 없었다. 강효서 또한 어느 순간부터 그저 차진명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차진명의 말이라면 뭐든 수긍하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강효서 자신의 취향이라고 할 만한 기준이 옅어지고 호오 또한 차진명의 기준을 따르게 되었다.
누군가 강효서에게 그렇게 된 것에 불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강효서는 딱 잘라 고개를 저을 것이었다. 역으로 질문한 사람에게 남몰래 품고 있던 열등감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냐며 반박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차진명은 정말 왜 돌아온 것일까?’
돌연 유학을 떠났던 차진명은 강효서가 졸업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라고 했다.
강효서는 그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고받는 연락마저도 가끔이었다.
강효서는 차진명이 부재한 동안 그의 눈이 되어 주었다.
그는 차진명을 대신하여 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관조했다.
개중 눈에 띄었던 것은 지난 학기 실습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도해월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그 녀석.
말 그대로 그가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강효서는 도해월에게 순위가 밀린 것을 알게 된 이후 분한 마음에 이가 갈렸다.
어쩌다 보니 도해월과 같은 조가 된 공희찬을 채근해 보았다.
그 멍청한 자식이 알아낸 것들 중에 유의미한 정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까 싶어 잘해 줬더니 지나치게 기어오르는 걸 내쫓아 버렸다.
그 사실을 분하게 여기며 도해월 쪽에 붙어 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상 공희찬의 행적은 투명하게 읽혔다. 강효서가 궁금한 건 도해월이었다.
도해월은 공희찬을 받아들일까?
받아들인다면 그를 어떻게 대할까?
이때까지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도해월은 난데없이 불시착한 낯선 인물이었다.
강효서가 도해월에 대해 이토록 곱씹는 건 차진명 때문이기도 했다.
차진명은 실습 던전의 등급이 상승한 일이 생긴 이후부터 도해월을 주시했다.
강효서가 추측하기로 차진명이 돌아온 것도 도해월 때문이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것 잊지 마.”
그즈음에서 대화를 마무리한 차진명이 강효서에게 말을 건넸다.
“왜 안 먹고 있어?”
차진명은 말수 자체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가 하지 않은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것들은 당연하게도 상냥한 걱정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하나같이 강압적인 구석이 있는 낱말들이었다.
기껏 학교에 복귀했으나 차진명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강효서는 미치도록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차진명은 불필요한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꼭 말해야겠어.’
일찰나 거듭하여 고민한 강효서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진명아, 내가 알아봐야 할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줘.”
그 목소리를 들은 차진명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강효서는 대답을 갈구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태연하게 식기를 정돈했다.
“그러지, 뭐.”
특유의 나긋한 미성이 화답을 돌려주는 순간 오직 강효서 자신만 감지할 수 있었던 손끝의 떨림이 서서히 멎어 갔다.
* * *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서 달라진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문제혁이 헌터 아카데미에 무사히 입학했다는 것이었다.
중도 입학생으로 5학년 2학기에 입학한 문제혁은 이번 학기 동안 필수 이수 과목을 수강해야 하는 나머지 내내 바쁠 예정이었다.
종일 틈 없이 바쁜 문제혁과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은 기숙사뿐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일찌감치 씻고 나와서 문제혁의 귀가를 기다렸다.
몇 년 동안 비어 있던 맞은편 침대와 협탁과 책상이 다른 사람의 짐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특히 이런 순간에는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간 허전함을 느껴 본 적은 없어서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빈 공간이 채워져 있으니 그것대로 아늑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형, 나 왔어.”
“생각보다 늦었네.”
녹초가 되어서 돌아온 문제혁은 고단해 보였으나 어딘가 개운한 표정이었다.
“해야 할 게 생각보다 훨씬 많더라.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응, 사람들도 다들 잘해 주더라.”
“그것도 다행이고. 얼른 씻고 와. 거기 계속 그러고 있다가 현관에서 잠들겠어.”
순순히 씻고 나온 문제혁이 자신의 침대에 누워서 나를 돌아보았다.
“형, 근데 그거 들었어?”
“어떤 거?”
“오늘 지나가면서 들었는데 헌터 등급 측정인가? 그거 이르면 다음 주에 할 거래.”
“뭐라고?”
내게 찾아온 평화를 온전히 누릴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등받이에 팔목을 걸친 채 태평하게 누워 있는 문제혁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걸 벌써 한다고? 왜?”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원래는 언제 하는 건데?”
헌터 등급 측정은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진행한다.
입학한 뒤로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변동된 적 없는 일정이었는데.
“형, 표정이 왜 그래?”
마른 손바닥으로 지끈대는 이마를 매만지던 나는 걸음을 옮겨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런 식으로 예상이 빗나갈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괜찮은 거지?”
문제혁은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로 상체를 세워 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알려 줄 수 없으니 내색도 하지 말아야 했다.
“헌터 등급 측정은 모든 사람한테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아무튼, 오늘 들었다던 얘기 처음부터 다시 해 봐.”
* * *
며칠 전, 줄지어 들어선 거대한 트럭이 이른 아침부터 교정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헌터 아카데미 건물 내에 낯선 행색을 한 이들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부 한국대학교 마력연구소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연구원들은 삽시에 분위기를 장악했다.
온갖 독특한 생김새의 물건을 들고 오가는 이들의 행선지는 7층 필드였다.
연구복과 작업복 차림을 한 사람들은 7층 필드에 등급 측정 기구를 설치했다.
학년별 전체 인원을 수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대학교 마력연구소.
정확히는 한국대학교 대학 부설 연구소 중 하나인 마력연구소는 게이트 사태를 거쳐 각성자가 등장하고 헌터라는 지위가 자리를 잡는 동안 사회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현재 전국적으로 사용되는 헌터 등급 측정 기구 또한 이곳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던전 공략에 필요한 기본 보급품의 구성 또한 한국대 마력연구소에서 내놓은 권고 사항이 어느새 표준이 되었다.
마력연구소는 이곳 외에도 전국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한국대 마력연구소와 같은 대학 부설 연구소는 물론이고 사립 연구소와 국립성물연구소 같은 국가 기관도 존재했다.
그중에서 한국 사회에 큰 획을 그은 것이 한국대학교 마력연구소였다. 이곳은 젊은 시절의 차정주가 첫 번째로 결탁한 연구 기관이었다.
차정주는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이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헌터 아카데미가 개교할 때도 이들의 도움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현재의 헌터 아카데미의 인상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9층과 7층의 필드 시스템 또한 한국대학교 마력연구소의 작품이었다.
여기까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뉴스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도다.
중요한 건 연구소와 차정주의 결탁 관계가 그의 아들인 차진명에게 대물림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정계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차정주는 자신의 주변 사업을 차근차근 정리하는 중이었다. 훗날 청문회가 열리더라도 뒤탈이 없을 정도의 구멍만 남기고 모조리 차진명에게 넘길 예정인 듯했다.
그 과정에서 차정주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자 유일한 핏줄인 차진명에게 권한을 넘길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지켜본 미래에 따르면 차정주의 예상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이능단속‧관리본부가 이능청으로 승격한 뒤 청장으로 부임한 차진명은 기관의 수장으로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애를 썼다.
비교적 한적한 6층 복도에서 창가를 내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6학년이 등급 측정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소집까지 십여 분의 시간이 남은 채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시스템 창을 띄우고 스킬 목록과 등급을 점검했다.
[도해월 ― 각성자• 보유 스킬 목록
‣ 공정한 판별자 (SS)
‣ 천리안 (S)
‣ 증폭 (D)
‣ 기력 증진 (D)
‣ 설계 (C)
‣ 강화 (E)
‣ 확률 (D)
• 미개방 스킬
‣ 선택된 예언자 (미개방)
‣ 준비된 설계자 (미개방)]
각성자 등급은 시스템의 스킬 등급과 체내의 마나와 스탯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측정된다고 알려져 있다. 스킬 평균 등급이 D급인 헌터가 각성자 등급이 A급으로 나오거나 그 반대로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
이번 측정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오려나.
과거로 회귀하여 내가 맞이한 변화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천리안 스킬의 등급이 갑작스럽게 상승한 것을 시작으로 성물을 습득하여 칭호 부가 스킬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던전을 공략하고 아티팩트를 구매하여 스탯을 획득했으니 종합적인 스탯 수준도 상승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여전히 D급에 멈춰 있을 리 없겠지.
나는 눈앞에 푸른 활자를 흩뜨리면서 층계참을 올라 7층 필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