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42
42화. 헌터 등급 측정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대열에 합류하여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내 순서가 다가왔다.
쉴 틈 없이 안내를 돕던 여자 연구원이 나를 보며 정면에 그어진 선을 손짓했다.
“학생, 표시해 둔 선을 밟고 서 주세요. 측정 준비되면 말씀해 주세요.”
“네.”
여자가 가리킨 선을 밟고 서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기 시작했다. 스킬 등급도 상승했고 스탯도 그에 뒷받침될 수 있을 정도로 채워 넣었으나 이 선을 밟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과거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곧이어 연구원에게 준비가 되었다는 뜻을 담아 눈짓하자 여자가 반달처럼 생긴 흰색의 기계를 내게 건넸다.
“거기 손잡이 보이죠? 손잡이를 꽉 쥐고 그 기계 안에 학생이 가진 마나를 최대한 많이 저장한다는 생각으로 흘려보내세요. 스킬을 사용할 때처럼 하면 오류가 생기거든요. 마나만 출력될 수 있도록 최대한 집중해 주세요.”
이어서 여자는 내가 사용하는 손을 묻더니 오른손으로 기계를 잡으라고 안내했다.
나는 그것을 총을 쥐듯이 부드럽게 감싸면서 눈을 감고 마나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일 분이 지났을 무렵.
삑―
“네, 고생하셨습니다. 결과는 연구소에서 검증을 마치는 대로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될 거예요. 이 주 정도 소요됩니다. 자, 다음 학생 진행할게요.”
측정이 종료되었다는 안내음을 기점으로 여자가 나에게 기계를 받아 갔다. 나는 한순간 마나 에너지를 과도하게 출력한 탓에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필드를 돌아 나섰다.
곧장 교실에 잠시 들러 신규 동아리 개설 신청서를 챙긴 나는 교무실로 향했다.
* * *
“혹시 정건후 선생님 자리에 안 계신가요?”
분명 7층 필드에서는 다른 교사들이 통솔하고 있었다. 정건후는 어디 간 거지?
“어, 해월아. 정건후 선생님은 왜? 무슨 일 있니? 선생님이 도와줄 테니까 얘기해 봐.”
정건후의 행방을 묻기 위해 말을 붙인 교사는 나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의 자세며 목소리 따위가 어찌나 다정한지 기가 막혀서 순간 말문을 잃었다.
이 환대는 뭐지? 설마 차정주가 방학식에 다녀간 것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건 좀 아니지.
자세히 보니 그는 3학년 때 내 담임이었던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행동과 별개로 내가 가진 기억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정건후의 자리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머지않아 교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오는 정건후는 화장실에서 금방 복귀한 건지 두 손이 젖은 상태였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아, 신청서 가지고 왔나 보네.”
우뚝 서서 기다리던 나를 지나쳐 자리에 앉은 정건후가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래, 한번 보자. 이걸 가져왔다는 건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대로 활동 보고서를 꼬박꼬박 제출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이겠지?”
“네, 확인해 주세요.”
물기 없이 마른 손으로 신청서를 받아 간 정건후가 기재한 내용을 차분하게 훑었다.
“이대로 제출하면 되겠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정건후는 신청서에 도장을 찍어 준 뒤 나에게 돌려주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얘기해. 알겠지.”
“그럴게요.”
나의 간결한 대답에도 수상쩍게 여기는 기색을 거두지 못한 정건후가 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에게 인사한 뒤 교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5학년 학급이 자리한 층으로 이동하고자 계단을 올랐다.
일부러 오가는 말소리를 듣고자 천천히 층계참을 밟고 있으니 난간 근처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눈을 감은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고 ‘증폭’ 스킬을 시전했다.
“차진명 선배 진짜 왔더라. 나 솔직히 개학하고 며칠 동안은 그 말 안 믿었거든? 근데 오늘 아침에 실물 보고 놀라서 넘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어, 맞아. 그 선배 어디 외국으로 유학 간 것 아니었어? 듣기로는 거기서 졸업하고 여기는 영영 안 온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너희 뭐 들은 거 없어?”
느린 속도로 4학년 층에 다다른 나는 인적이 드문 벽면에 기대어 섰다.
“진명 선배 이번 학기에는 현장 실습 참여하겠지? 하필 실습 직전에 가 버려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그 선배가 강효서 선배보다 더 잘할 것 같아서 기대돼.”
“야, 당연하지. 자기 아빠가 헌터 아카데미 이사장인데. 조장이라도 걸리면 최우수 조장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본다.”
“그건 나도 인정. 근데 그러면 지난 학기 최우수 조장은 어떻게 되려나.”
“도해월? 솔직히 걔는 운빨이었지. 분수에 맞지도 않는 C등급 던전 들어간다고 설칠 때만 해도 뭣도 없는 게 존나 나댄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던전 등급이 A등급으로 상승할 건 또 뭐야. 나 그 얘기 듣고 순간 걔가 뭐 건드린 건 아닌가 싶었다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저들끼리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그들과 조금은 비슷한 심정이 되어 짧은 조소를 터뜨렸다.
이내 짧게 혀를 차면서 벽면에 기대었던 등을 떼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지선일이 몇 반이었더라.
물론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지선일이 5학년이었던 것도 간신히 기억했는데 몇 반에서 공부했는지까지 기억날 리가. 이전 생에서 조기 졸업까지 할 만큼 뛰어난 후배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지선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그를 스카우트할 때였다.
가서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하지.
잠자코 걷던 나는 지선일과 처음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려 하다가도 잠시 망설였다.
내가 지선일이랑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 녀석이 어땠더라.
“해월이 형?”
층계참을 다 오르고도 난간에서 손을 거두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맞네. 5학년 층에 형처럼 생긴 사람이 왜 있나 싶었는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나를 먼저 발견한 문제혁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음, 그냥 좀. 어디 갔다 오나 보네.”
가볍게 손을 들어 문제혁의 인사에 화답한 내가 묻자 금세 대답이 돌아왔다.
“화장실 갔다가 교실로 들어가는 길이었어. 그나저나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아니면 다른 사람 보러 온 거야?”
음, 내가 다른 사람을 보러 온 거라고 하면 내색은 안 해도 은근히 서운해할 텐데.
“그냥, 생활하는 건 어떤지 궁금해서. 매일 기숙사에서 보기는 해도 여기서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
나는 눈앞에 선 문제혁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의젓하고 단단한 부대원 문제혁은 이제 내 기억에만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나야 당연히 잘 있었지. 우리 반 가 볼래? 내 자리 보여 줄게.”
굳이 보여 줄 것까지는 없는데……. .-
내 목적이 아닌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한 문제혁은 이전에 자신이 다니던 학교보다 이곳의 시설이 훨씬 근사하다며 몇 번씩 이야기했었다. 특히 제 몫으로 주어진 책상이 더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며 좋아했던 걸 기억해 냈다.
그래도 이렇게 좋아하니까 따라가서 보기는 해야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나를 이끄는 문제혁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끄트머리에 자리한 교실로 향하던 나는 문제혁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아, 혹시 지선일이라는 이름 들어 봤어?”
“걔, 우리 반이야. 지선일은 갑자기 왜 찾아?”
어라? 이게 웬 횡재야.
“그냥 좀 궁금해서. 걔 워낙 유명하잖아.”
나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이유로 대답을 대신했다.
“학교에 처음 왔을 때 선일이 걔가 나한테 학교에 아는 선배는 없냐고 했거든. 형 이름 얘기하니까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내가 걔한테 너는 형을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니까 형이 지난 학기 현장 실습에서 최우수 조장으로 선발됐다고 알려 줬어. 그런 좋은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도 얘기해 줬어야지.”
그거야 얘기할 이유가 딱히 없었으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겨우 막았다.
속으로만 안도한 뒤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문제혁에게 말했다.
“이쯤 됐으면 지난 학기는 다 지난 일이지, 뭐. 자랑할 것도 아니고 딱히 생각나지도 않아서 얘기 안 했던 거야. 지선일이 나에 대해 얘기한 건 그것 말고 더 없어?”
“다른 거? 딱히 없었어.”
문제혁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가 뭔가 의심하기 전에 화두를 돌렸다.
“사람들이 걔 얘기를 하도 많이 하길래 궁금해서. 나는 걔 얼굴도 본 적 없거든.”
물론 거짓말이다. 나로서는 너무 잘 아는 그 얼굴을 스치면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번 등급 측정 결과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나오면 조기 졸업할 수도 있대.”
“누가? 지선일이?”
모르는 척 물었으나 문제혁이 말한 가정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학기 등급 측정 결과에서 지선일은 B급이라는 이례적인 판정을 받게 된다.
성장이 C급에서 멈추거나 입학했을 때 측정된 등급 그대로 졸업하는 인원이 절반 이상이었다. B급 각성 헌터만큼 귀한 것이 두 단계 이상 성장하여 졸업하는 경우였다.
더하여 그리 높지 않은 등급으로 입학한 학생이 꾸준히 성장해 5학년에 B급으로 측정되었다는 건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기에 더 큰 여파를 불러왔다.
“응. 나는 각성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랐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다른 사람들 반응 보면서 느꼈어. 근데 곧바로 졸업하는 건 아니고 6학년까지는 하고 가야 한대. 무슨 의무 규정? 그런 거 때문에.”
거기까지 들은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호응했다.
“또 어제 교무실에 갔다가 등급 측정에서 B급이 나왔다고 해서 무작정 졸업시킬 수는 없다고 선생님들끼리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 현장 실습에서 선일이가 자기가 가진 힘이나 스킬을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는지 보고 결정해야 한다더라.”
지선일은 그들의 우려가 무색하게 내년 1학기 현장 실습에서 최우수 조장으로 선정된다.
“다른 얘기도 더 들었는데……. 그래도 학교에 있을 때 현장 실습을 최대한 많이 해 보는 게 좋을 거라고 하더니 일단 2학기 실습까지는 지켜본다고 했어.”
이변은 여기서 시작된다. 교사들이 계획했던 것과 달리 지선일은 2학기 현장 실습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2027년 1학기 하계 현장 실습이 진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후 던전 브레이크의 여파가 수습되는 과정에서 지선일의 조기 졸업도 서둘러 결정된다.
그 무렵의 나는 어땠었지. 지선일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동안 나는 어떠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용산 던전 브레이크 이후에도 등급 측정을 진행할 때마다 빈번히 D급이라는 결과만 마주해야 했던 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몇 번이고 한국대학교 마력연구소에 찾아갔었다.
연구원들은 헌터 등급 측정은 한 학기에 한 번만 시행한다는 규칙을 어기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며 애원하는 나를 결국 받아 주기는 했으나 결과는 늘 같았다.
그 다음에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새끼들한테 죽도록 처맞다가 차진명을 만났었지.
“내가 들은 건 이게 다야. 그리고 선일이 걔 성격이 좀 까칠한 것 같았어. 나랑 했던 대화도 형을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물어봤던 게 전부야.”
“그랬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형은 직접 본 적 없다고 했었지? 여기까지 왔으니까 교실에 있으면 누군지 알려 줄게. 근데 없을 수도 있어. 어제부터 애들이 계속 찾아오더라고.”
그즈음에서 말문을 맺은 문제혁을 따라 교실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안쪽을 둘러보던 문제혁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교실에는 없네. 어디 나갔나 봐.”
“그, 저기 있는 게 지선일 아니야?”
문제혁의 뒤쪽으로 이어진 계단에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 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니 내가 알던 지선일이 중심에 서 있었다.
“어, 맞아. 쟤가 지선일이야. 어떻게 바로 알아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