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43
43화. 동아리 창설
“저렇게 많은 애들이 갑자기 모인 건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저 가운데 있는 애가 지선일이겠지.”
이거 좀 자연스러운데. 아무래도 연기가 제법 늘어난 것 같다.
애들 사이에서 다방면으로 단련한 게 비로소 빛을 보는구나.
내심 좋아하던 것도 잠시였다. 지선일의 근처로 몰려든 인파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나와 문제혁까지 뒤로 조금씩 밀려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저나 얘네는 무슨 일만 있는 듯싶으면 왜 단체로 쫓아와서 이러는 거지.
연기랑 별개로 새파랗게 어린 학생들 마음은 도통 모르겠다니까.
틈 없이 북적이는 전경을 보고 있으니 이전에 내가 겪었던 상황이 떠올랐다.
영문도 모르고 학생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지선일의 얼굴은 마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난데없이 발이 묶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이라면 내가 제일 잘 알지.
후일을 생각하며 행동을 사렸던 나와 달리 지선일은 자신의 속내를 숨길 기색도 없이 온몸으로 짜증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니, 나도 모른다고. 측정 결과는 나중에 나온다고 했잖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졸업이면 지금 당장 해 버리고 싶으니까 그만 좀 밀어!”
한때 나는 과거의 지선일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신의 상관이자 부대의 사령관인 나에게 겁도 없이 하극상을 부리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저토록 구태의연한 것을 보니…….
그냥 타고난 성격이었구나. 애초부터 이유가 없는 문제였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지선일에 관한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내가 복도에 발이 묶였을 때 속마음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다면 지금 지선일이 짓는 것과 같은 표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덤이었다.
“형, 나한테 더 할 말 없으면 가 볼게.”
“왜. 무슨 일 있어?”
“아까 선생님이 잠깐 교무실로 오라고 그랬거든. 중도 입학 처리 때문에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더 있다고 하셨어.”
“그래, 가 봐.”
나는 선선히 문제혁을 배웅했다. 이윽고 곤란에 처한 지선일은 한층 편한 자세로 구경했다.
아예 복도 구석에 자리를 잡고 벽면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보고 있으니 불현듯 내가 서 있는 방향을 내다보던 지선일과 눈이 마주쳤다.
지선일은 나를 무슨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정쩡한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이상하다 싶었겠지.
다문 입술을 짧게 달싹인 나는 지선일을 구할 수 있을 방법이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이왕이면 곤경에 처한 지선일을 구해 주면서 확실한 인상을 남길 만한 방법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하다면 내가 준 도움도 자연스럽게 갚을 수 있는 그런 방법 뭐 없을까.
그런 생각으로 무심코 주변을 살피던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예전에 홍원하가 울렸던 것과 같은 소화전의 사이렌이었다.
진정하자. 홍원하처럼 하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나는 한사코 외면하려 했으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사이렌으로 눈길이 향했다.
사실상 내 머릿속에 홍원하의 존재가 확실하게 인식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적어도 그때는 뭐 저런 이상한 애가 다 있나 싶었는데.
체면과 자존심, 그리고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지선일이라는 존재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금세 답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체면이나 자존심 같은 게 뭐가 중요하겠어.
지금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차진명보다 먼저 지선일을 포섭하는 거다.
결심을 마친 나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소방전 근처로 다가갔다.
은밀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이 시점에서 복도를 배회하는 교사는 없는 듯했다.
몇 번이고 내 근처로 눈길이 향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단숨에 사이렌을 울렸다.
위이잉-
위잉-
“뭐,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뭐지? 무슨 일 생긴 건가? 야, 누가 창문 열고 확인 좀 해 봐!”
“요새 사이렌이 왜 이렇게 자주 울리는 것 같지? 이거 내 착각인가?”
“설마 기계 고장 난 건가? 짜증 나게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삽시에 놀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며 지선일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선일도 순간 당황스러워하며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나에게서 시선이 멎었다.
자세히 보니 지선일은 내 눈이 아닌 가슴팍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명찰을 보고 있는 거겠지.
나는 지선일이 명찰에 새겨진 이름을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도록 잠시 기다렸다.
어안이 벙벙한 듯 넋을 놓고 있다가도 헛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보며 어깨를 들먹였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고 하더니.
매 순간 알 수 없는 홍원하의 덕을 보는 일도 생기는구나.
“또 누구야! 대체 어떤 자식이 고의로 사이렌을 누르는 거야? 당장 자수해!”
머지않아 발끈한 채로 나타난 정건후의 말은 못 들은 척 지나갔다.
* * *
쏜살같이 흐른 시간은 동아리 창설 승인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오늘은 소식을 접한 이후 처음으로 자율 활동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동아리원은 이전의 소모임 구성원들과 동일했다.
달라진 것은 집결 장소가 별관 3층 동아리 교실로 변경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새로 배정된 교실답게 내부는 깨끗하고 한적했으나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이곳이 앞으로 키워 나갈 세력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찬찬히 둘러보았다.
“먼저 와 있었네? 내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
반쯤 열린 문틈으로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민 건 김미솔이었다.
“내가 두 번째가 아니라서 아쉬워. 누나 다음으로 들어오려고 했는데.”
뒤따라 발을 들인 건 텀블러를 들고 있는 홍원하였다.
두 사람이 먼저 모습을 보이자 남은 이들도 차례로 들어섰다.
“와, 진짜 깨끗하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교실을 줬네.”
“그러게요……. 동아리 시간 아닐 때도 와도 되려나?”
“다들 구경은 천천히 하고 일단 와서 앉아.”
마지막으로 들어선 강준희와 설연호에게도 손을 흔든 뒤 회의용 테이블을 가리켰다.
모두 착석한 뒤 간단한 안부를 나누는 동안 나는 칠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날 믿고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이전에 얘기했던 대로 담당 선생님은 정건후 선생님이 맡아 주기로 했어. 대신 동아리 활동 보고서만 꼬박꼬박 내라고 하시더라.”
“진짜? 다행이네. 우리가 지난 학기에 벌인 일이 있다 보니 그렇게 말씀하셨나 보다.”
“심지어 그 구성원이 하나도 안 변하고 다시 뭉쳤잖아. 선뜻 맡아 주시겠다고 한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봐.”
김미솔과 설연호의 대화를 필두로 다시금 장내가 소란해질 기미를 보였다. 지난 학기 끝 무렵부터 방학 내내 함께하면서 친해지다 보니 얼굴만 봐도 할 말이 생기는 듯했다.
“다들 입부 신청하면서 봤지. 동아리장은 내 이름으로 올라가 있어. 우선 내 얘기부터 듣는 게 어때.”
그렇게 말하면서 가볍게 손뼉을 부딪자 모두의 이목이 내게 돌아왔다.
“우리 말고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다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겼어. 오늘은 그 사람부터 소개해 주려고 해.”
“지선일을 벌써 데려왔어? 빠르네.”
“그러니까. 근데 지선일 걔 조기 졸업할 수도 있다며?”
“그거 진짜였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런. 또 시작이구나.
나는 마음을 반쯤 내려놓은 채로 무리를 돌아보았다.
지선일의 얘기가 나온 탓인지 홍원하의 얼굴에 미묘한 그늘이 드리운 것이 보였다.
그나저나 홍원하랑 지선일은 무슨 일로 다툰 거지.
혹여 지선일에게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나 싶어 기억을 되짚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동아리 교실의 문을 두드리더니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공희찬 선배?”
홍원하의 호명을 따라 고개를 까딱인 공희찬은 평소와 달리 조금 머뭇거리며 문을 닫았다.
“지선일 아니고 나야. 다들 오랜만.”
여느 때처럼 자세만큼은 꼿꼿하면서도 눈길을 둘 곳을 찾지 못하는 공희찬을 이끈 건 입을 벙긋거리며 지켜보던 강준희였다.
“여기 자리 남았어요……. 와서 앉으세요.”
공희찬은 강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방학에 해월이 통해서 잠깐 얘기 전해 듣기는 했었어. 그래도 이렇게 얼굴 보니까 정말 반갑다. 너 원래 동아리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되지?”
김미솔이 살가운 어조로 공희찬에게 물었다.
그러자 공희찬의 눈길이 자연스레 나에게로 기울었다.
* * *
공희찬이 나를 찾은 건 신설 동아리 명단이 공개된 날 저녁이었다.
“예전에 선배가 그랬었나. 아쉬운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거라고.”
9층 화장실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던 공희찬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뒤늦은 걸음에 화가 난 것인지 돌아선 얼굴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씨발, 넌 꼭 말을 해도……. 아니다. 시간 없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게. 그 동아리는 대체 뭐냐?”
“선배, 질문을 하려면 의도를 명확하게 담아야지. 동아리의 정체를 묻는 거라면 명단에서 분류가 어떻게 나뉘었는지 봤을 것 아니야.”
“근데 이 새끼가 진짜! 야, 너 내가 커뮤니티에서 쫓겨난 게 그렇게 우습냐?”
공희찬은 방학을 보내고도 여전했다. 이런 식으로 발끈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줄도 모르고 그저 투명하기만 한 것이 약간은 반갑기도 했고.
“본론부터 얘기할까.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와.”
“야,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아니라면 선배가 이 시간에 여기로 나를 부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두어 계절 동안 공희찬을 겪으면서 그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했다.
공희찬은 자신이 우위에 있을 때는 후일을 가늠하지 못하고 으스대는 경향이 있다.
그로 인한 후폭풍을 가늠하기에 견식이 짧은 건지 오만이 지나친 건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분노를 참지 못하니 적정한 선을 찾아 지긋하게 눌러 주는 것도 중요했다. 내가 주로 하는 건 다음 화두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선배를 괴롭게 한 그 사람들의 속을 썩이고 싶은 속셈이라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 그건 선배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말할 틈을 기다려 주지 않고 원하는 답을 내놓으면 한동안은 잠잠해진다.
내 말이 끝을 맺자 공희찬은 바닥으로 눈길을 떨군 채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네가 만든 동아리는 낮은 등급의 던전을 공략하는 게 주된 목적이라고 하는 걸 봤어. 공략하고 나면 괜찮은 혜택이 나오는 던전을 찾으려는 거겠지?”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공희찬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어. 고작 동아리 따위에서 도움을 얻는다는 가정 자체가 자존심 상하기는 하는데…….”
그 또한 맞는 말이다. 이대로 공희찬을 내치기에 그는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은 듯했다.
차진명의 커뮤니티에서 내쫓겼다고 해도 대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커뮤니티에 속하지는 못했다고 해서 공희찬의 배경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날 내쫓은 놈들 속을 긁어 놓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해.”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공희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하는 것 아니야?”
자신이 행차하는 걸 감사히 여기라는 식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걸 보니 오만은 공희찬이라는 사람의 발밑에 깔린 지반인 듯했다.
한평생 밟고 산 나머지 자신이 무엇을 딛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다는 점에서 그의 오만이 어찌나 단단하고 밀도 높은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매끄럽고 딱딱한 대리석 같은 자의식을 용인해 줄 생각이 없다.
“선배, 난 선배한테 빚진 게 없어. 하지만 선배는 지금 나한테 빚을 지고 들어와서 도움을 구하려는 입장 아니야? 원하는 걸 얻으려면 굽힐 줄도 알아야지, 사람이.”
잠시 말을 멈춘 뒤 고개를 반쯤 기울이면서 공희찬에게로 거리를 좁혀 나갔다.
“나한테는 선배가 생각하는 사람들의 속을 긁어 놓을 만한 무기가 있거든. 그걸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 지금 선배한테 필요한 건 둘 다인 것 같은데. 무슨 부탁이 됐든 바라는 게 더 많은 사람이 굽히는 게 순리야. 그것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때까지 공희찬의 무례를 방임했던 건 그의 존재가 나에게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역전되면서 공희찬이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이 순간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선배가 직접 얘기해 봐.”
어느새 공희찬의 눈동자에서 번지는 파동까지 담아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온몸이 떨릴 만큼 분노하던 공희찬이 겨우 씹어 뱉었다.
“네가 가진 무기를 사용하게 해 줘. 그 대가로 내가 가진 정보를 너한테 줄게.”
* * *
“다행히 선배랑 화해해서 동아리에도 들어오라고 했어. 다들 반가워하는 것 보니까 나도 좋네.”
간략하게 설명을 마무리한 나는 공희찬에게 잠시 눈길을 두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궁금증을 해소한 이들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느린 속도로 배회하던 나는 차례로 모두와 눈을 맞추었다.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내가 얻은 정보는 가능한 선에서 동아리 사람들한테 전부 공개할 거야. 주는 게 있다면 받는 것도 있어야겠지? 음, 사실 난 많은 걸 바라지 않아.”
“그러면……. 너무 사소하지 않은 선에서 쓸 만한 정보를 가져오면 되는 거야?”
조심스레 말문을 여는 강준희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확해, 강준희. 우선은 다음 모임 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으면 유리할 만한 정보를 가져와 줘. 뭐든 괜찮으니까 다음 시간에는 서로 어떤 정보를 알게 됐는지 나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