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재회
지선일과의 만남은 방과 후 9층 필드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교정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다 보니 목적지는 어김없이 9층이었다.
폐쇄된 필드 근처를 지나 화장실로 향할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문제혁과 지선일이 두 번째 대화를 나눈 사유 또한 나였다고 했다.
부대원들이 이번 생에서 새로이 관계 맺는 걸 지켜볼 때마다 공연히 새삼스러웠다.
지선일과 문제혁을 끝으로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부대원들은 전부 찾아냈다.
이전 생에서 잃어버렸던 사람을 한 명씩 되찾을 때마다 나는 크게 안도했다.
다만 내가 기억하던 그들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묘해졌다.
동시에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체로 활력이 되었다.
설연호와 문제혁을 만나고 마침내 지선일을 마주하기 직전이었다.
9층 복도로 들어서니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재차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바랐던 재회는 단순히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던 시절에 비로소 내가 편입되는 것.
그리하여 내게 다시 주어진 두 번째 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지선일은 첫 번째 막의 마침표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어느새 약속했던 9층 화장실에 다다른 나는 뒤를 돌아 있던 지선일을 호명했다.
“지선일. 맞지?”
그 소리에 지선일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마주하던 그녀는 엉성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따라서 쏟아지던 머리카락을 귓가에 걸어 정리하던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5학년이나 됐는데 여기까지 와 본 건 처음이네요. 자주 오시는 곳인가 봐요? 올라오는 길이 좀 무섭던데.”
나를 어색하게 여기는 모습이 낯설었으나 말투만큼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 잠깐 마주쳤을 때 내 이름을 유심히 보는 것 같더니. 용케도 만나자고 했네.”
“아,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궁금했거든요. 문제혁한테 물어보니까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궁금해졌어요.”
그래, 궁금해질 만도 하지.
홍원하가 사이렌을 울리는 걸 보던 순간의 나도 쟤가 대체 왜 저러나 싶었으니까.
“지난 학기 현장 실습에서 최우수 조장으로 선정된 건 진작 알고 있었어요. 방학식 때도 봤던 것 같은데 거리가 워낙 멀어서 다시 봤을 때 제대로 못 알아봤지만. 그 얘기 듣고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여기저기 묻고 다녔거든요.”
음, 그게 다는 아닌가 보네.
거기까지 들은 나는 순간적으로 의아했으나 금세 납득할 만한 이유가 생각났다.
지선일은 출중한 실력을 타고났음에도 끊임없이 노력하며 성장을 갈망했다.
그와 연결 지어 고민해 보니 내가 지난 실습에서 최우수 조장으로 선발된 일이 나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도화선으로 작용한 듯했다.
매 순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애쓰는 지선일에게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높은 등급의 던전을 타개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자극으로 다가올 만했다.
지선일을 포섭하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야.
“모르긴 몰라도 내가 너한테 나쁘지 않은 인상으로 남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
상황이 이렇게 풀렸으니 굳이 나서서 먼저 말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이번 학기부터 새로운 동아리를 창설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어요. 지금 있는 구성원 전부가 지난 학기 현장 실습 조원들이라고 하던데.”
잠시 말을 멈춘 지선일은 잠잠한 눈길로 나를 넘겨다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해 구태여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알게 되니까 흥미가 생겼어요. 대체 선배가 조원들을 어떻게 이끌었길래 일편단심으로 충성할 수 있나 싶어서요.”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두 번째 생을 살게 되면서 가장 바로잡고 싶었던 사안 중 하나가 부대원들과의 관계였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그들에게 과거의 내가 남겼던 것과 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건 내게 찾아온 귀중한 기회나 다름없었다.
나는 첫 단추를 신중하게 끼워 보려는 생각으로 적절한 대답을 골라냈다.
“그거야, 뭐. 각자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 줘서 그런 거지.”
맞은편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에 약간의 신뢰가 깃드는 것이 느껴졌다.
“선배가 설계 스킬을 구사한다는 것도 들었어요. 그 설계 스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마침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답을 들려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스킬이 내 주요 스킬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네. 다른 헌터한테 비공개 스킬에 대해 자세하게 묻지 않는 게 예의인 것처럼 주요 스킬을 상세하게 캐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아직 몰랐던 건가?”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지선일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이런 반응은 의외인데. 천하의 지선일이 기세 굽히는 걸 내 눈으로 보다니.
“사실 이런 사소한 건 사회생활을 해 본 헌터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당연해.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 주려고 물어본 거기도 하고. 책망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뜻이야.”
한층 차분해진 지선일은 잠시 고심하더니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도 하고 싶었던 말을 바로 할게요. 선배가 어떤 식으로 스킬을 전개하는지도 사실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요. 가능하다면 저도 선배의 설계대로 움직이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선배가 만든 동아리에 들어가면 되나요?”
이전 생에서 차진명이 내게 지선일을 가장 먼저 포섭하라고 했던 건 그녀가 가진 선명한 장단점 때문이었다. 타고난 능력치 자체가 출중한 지선일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유도 그녀의 치명적인 단점과 연관되어 있었다.
지선일의 유일한 단점은 고유한 공격 패턴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실전에 나설 일이 없었으니 그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본인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6학년에 진급하여 참가한 1학기 현장 실습에서 최우수 조장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상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지선일 혼자 던전 공략을 해치웠기 때문이었다.
현장 실습 또한 어디까지나 실습이었기에 어떻게든 자신의 단점을 숨길 수 있었으나 조기 졸업 이후 이능청에 입사하면서부터 그녀에 관한 평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부터 끊임없이 주목받았던 지선일은 자신의 입지가 점점 추락하는 것을 견디기 버거워했다.
내가 이능청 던전공략지원팀 소속 헌터로 활동하던 지선일을 손쉽게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지선일의 약점을 나의 설계로 감춰 준다는 말로 설득했기 때문일까.
지선일은 내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도 부대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나에게 하극상을 부리는 것은 물론이고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나를 원망했었다.
“내 설계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은데.”
다시 한번 마주한 이정표 앞에서 나는 신중하게 방향을 가늠했다.
“저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냥 얘기할게요. 제가 구사하는 정신계 스킬은 대상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공격도 감행할 수 있어요. 어떤 선생님은 그걸 듣고 제가 무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지선일은 이번에도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녀석이었다.
“하지만 7층 필드에서 훈련할 때마다 공격 패턴이 너무 단순하다는 단점이 너무 명확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공격할 때의 타격감이 워낙 좋으니까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는 했어요.”
나는 지선일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설계나 버프를 집중해서 다루는 선배랑 같이 뛰는 게 이득일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또 현장 실습이 끝나고도 원수로 남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여전히 사이가 좋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기도 했고요.”
지선일은 자신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고 그것을 극복할 방안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지선일이 얼마나 유능한 헌터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여러 방면에서 두루두루 잘 이끄는 선배와 함께한다면 저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선배만 허락해 준다면 내일 동아리 입부 신청서 작성해서 제출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나요.”
그래, 이래야 지선일이지.
하극상을 부리는 것 정도는 흠결도 아니었을 만큼 유능한 지선일의 모습을 다시 보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었다.
“그럼 그렇게 해.”
그러나 이런 심정을 지선일에게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간결하게 대꾸한 나는 가볍게 숨을 고른 뒤, 마저 덧붙였다.
“잘 생각했어. 지금 네가 하는 선택에 앞으로도 후회는 없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지선일은 맥없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 * *
하루하루를 쉴 틈 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새 중간고사를 준비할 기간이 되었다.
그동안 몇 번의 동아리 모임이 이루어졌다. 지선일도 무사히 합류했다.
벌써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났으나 차진명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정건후의 수업은 두 학년이 함께 듣다 보니 이따금 마주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차진명은 내가 있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겉으로는 모른 척하는 차진명은 이미 지선일과 공희찬이 내가 만든 동아리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다 알면서도 태연하게 넘기는 꼴을 보니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형, 뭐 해. 바빠?”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던 문제혁이 의자 너머로 고개를 빼고 나를 돌아보았다.
“거의 다 봤어. 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던 문제혁이 말했다.
“원래 등급 측정 결과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이제 이틀 지나면 중간고사 시작인데 아직도 안 나오는 게 이상해서.”
그건 나에게도 의문이었다.
“음, 예전에 했을 때보다 확실히 늦게 나오는 것 같더라.”
내 말을 듣던 문제혁은 구석에 마련된 작은 냉장고 앞에 자세를 낮추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자기 등급을 알고 거기에 맞게 공부하더라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답답해지네.”
이윽고 생수 두 병을 꺼낸 문제혁이 저벅저벅 다가와 내게도 한 병을 건넸다.
“그것 말고 다른 건 괜찮은 거지? 요새 어떤가 싶어서.”
문제혁에게 가벼이 눈짓을 건네고 뚜껑을 연 다음 물을 몇 모금 마셨다.
“뭐가 됐든 보육원보다는 좋지. 형도 알잖아.”
나는 선선히 수긍하면서 나지막하게 웃어 보였다.
내 반응을 유심히 들여다본 문제혁은 침대로 다가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나 형한테 얘기하고 싶은 것 있었는데.”
“얘기해. 뭔데?”
“지선일도 형이 만든 동아리에 들어갔다는 것 들었어. 등급 측정 결과 나오면 나도 거기 들어가도 돼?”
이 얘기를 문제혁이 나한테 먼저 하다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다.
문제혁은 어떤 식으로 들어오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도리어 잘됐지.
그 순간 마음속에 무겁게 남아 있던 숙제가 해결된 듯해 한층 후련해졌다. 지선일에 이어 문제혁까지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첫 번째 막은 무사히 내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