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45
45화. 인터미션
등급 측정 결과가 발표된 건 결국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헌터 아카데미에서의 첫 시험을 앞둔 문제혁은 유난히 분주했다.
나는 함께 도서관에 가기로 한 문제혁을 복도에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기다림이 길어질 즈음 새로 갱신한 헌터 라이센스를 꺼내 보았다.
이윽고 그것을 손 하나로 쥐고 햇빛 아래에 비추어 보았다.
[도해월 ― C급 각성자]내리쬐는 햇살 아래 각도를 다르게 틀 때마다 오묘한 빛을 띠는 글자가 보였다.
선명하게 새긴 C급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날이 오기는 하네.
나는 반듯한 활자 위에 엄지를 얹어 매만져 보다가 금세 그만두었다.
혹여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행히 잠잠했다.
이윽고 시스템 창을 끌어 눈앞에 띄웠다.
[도해월 ― 각성자• 보유 스킬 목록
‣ 공정한 판별자 (SS)
‣ 천리안 (S)
‣ 증폭 (C)
‣ 기력 증진 (C)
‣ 설계 (B)
‣ 강화 (D)
‣ 확률 (C)
• 미개방 스킬
‣ 선택된 예언자 (미개방)
‣ 준비된 설계자 (미개방)]
삽시에 눈앞에 푸른 활자가 떠오르며 스킬 목록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7층 필드에서 등급 측정 기구를 쥐었던 순간의 나는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기저에는 두려움이 잔존했다.
그때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이따금 나에게 겨누는 불신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D급이면 어떡하지. 다시 측정해도 달라지지 않으면 전부 무상해지는 건가.’
생을 다 바쳐 새겨 넣은 불신은 다른 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내가 해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깊이 안도할 수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비롯되었던 두려움을 한 꺼풀 벗겨 내며 새롭게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감각했다.
2학기의 초입을 정신없이 보내고 마침내 중간고사를 앞둔 지금은 긴장되기는 해도 그나마 평화로운 시간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종의 인터미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
간만에 주어진 여유를 만끽하며 숨을 고르려던 찰나.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 저기, 네가 도해월 맞지? 얘기 전해 들었어. 이번에 C급 됐다면서.”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응했다. 그러자 신이 났는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뭘 어떻게 한 거야? 너 원래 D급밖에 안 됐었잖아. 방학에 던전 공략했다는 건 여기저기서 들었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물음이었다.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어설 즈음 세는 것을 포기했다.
등급이 상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전과 달리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 혹은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 등등 종류는 다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둘 수는 없는데.
그냥 관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나한테만 말해 주면 안 돼? 혹시 뭐 약이라도 먹은 거야? 요새 그런 소문 많잖아. 불법 마석 가공물을 어디서 몰래 구해서 가지고 다닌다는 거. 너도 그런 거 아니야?”
면전에 대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졌다.
대놓고 대답을 회피하며 고개를 돌리니 멀찍이서 문제혁이 보였다.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왔으면 말을 하지.”
나는 눈앞에서 길을 가로막는 남학생을 지나쳐 문제혁에게 다가갔다.
“야, 너 왜 내 말은 씹어? 대답하라니까?”
남학생이 순식간에 쫓아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 손길을 거세게 쳐 내면서 눈가를 찡그렸다.
“묻는다고 다 대답할 이유가 있나? 여기저기 많이도 주워들었으면서 이건 못 들었나 봐. 헛소리 축에도 못 끼는 낭설이나 주워섬기는 걸 보면 시간 많은가 본데, 난 아니거든. 남의 시간까지 낭비하면서 멀쩡한 사람 귀 더럽히지 말고 좀 가라.”
그래, 이 정도면 많이도 순화했다.
좆같이 굴지 말고 꺼지라고 하고 싶은 걸 참았으니 많이 애쓴 거지.
부러 손끝으로 귓가를 털어 내는 시늉이나 하던 나는 문제혁과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곁에서 걷는 문제혁의 얼굴이 미묘하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으나 그마저도 잠시였다.
* * *
“중간고사라고 해서 너무 겁먹을 것 없어. 입학하고 나서 처음 치르는 시험이니 마음이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겠지만 크게 긴장하지 말라는 뜻이야.”
스터디룸에 들어선 나는 온갖 종류의 이론서를 차례로 펼쳐 놓으며 문제혁에게 말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건 익혔으니까 이번에는 심화만 한 번씩 짚어 줄게.”
차곡차곡 쌓이는 이론서에 눈길을 두었던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말수가 별로 없는 녀석은 여전히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아까부터 표정이 이상한 것 같은데. 벌써 지친 건 아니겠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대목마다 인덱스를 붙이던 손짓을 멈추고 문제혁에게 물었다.
“지선일도 C급에서 B급으로 올랐던데. 알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문 입술을 늘렸다. 그게 뭐? 라는 뜻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알았던 사실을 이제야 굳이 되묻는 이유가 궁금했다.
“앞으로 훈련에서 두 사람이 호흡 맞출 때 훨씬 편해질 것 같아서 다행이네.”
예의 그 싹싹한 몸가짐으로 묻던 문제혁은 고개를 젓고 펜을 쥐었다.
지선일에 이어 동아리에 합류한 문제혁은 언젠가부터 자신과 그녀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문제혁은 원체 부정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터라 단순히 언급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건 근원을 모를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인 듯했다.
현재의 문제혁은 D급이었으나 그 또한 성장하여 B급 헌터로 활동하게 된다.
다만 나와 달리 문제혁은 등급이 상승하는 속도가 다소 더딘 편이었다.
“형,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기출 문제지에 고개를 묻고 열중하던 문제혁이 내게 물었다.
“얘기해. 뭔데?”
잘 모르겠다면서 내민 부분은 꼼꼼히 읽어 보기만 하면 파악할 수 있는 문제였다.
빼곡하게 적힌 활자에 펜촉을 기울여 천천히 설명해 주었으나 문제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눈 감고도 풀 수 있어야지. 벌써 이렇게 막히면 남은 문제는 어떻게 풀 거야. 이대로 백지 내고 나올 건 아니잖아.”
그 말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제혁이 한숨을 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방금 내가 잘못 본 건가?
이때까지 나한테만큼은 짜증 한 번 부리지 않던 문제혁이었다.
“형은 이론 성적도 잘 받고 등급도 높아서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모르겠지. 됐으니까 거기 두고 가도 돼. 나 혼자 할게.”
이건 또 뭐야. 내가 잘못 들은 거야?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문제혁은 부대원으로서의 모습이었다.
과거였다면 이런 식으로 사사롭게 행동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작정하고 몸을 틀어 앉은 문제혁을 보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생에서 헌터 아카데미에 함께 재학하던 시절에도 보여 준 적 없는 모습이었던 만큼 문제혁과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 많은 걸 어떻게 혼자 하려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조로 묻자 문제혁은 내 말을 무시하고 문제지를 넘겼다.
“문제혁. 대답 안 해?”
치솟으려는 한숨을 삼키면서 천천히 묻자 문제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이전과 달라진 문제혁의 태도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으나 우선 침묵을 유지했다.
이대로 문제혁을 매섭게 다그치거나 그런 식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며 훈계하지 않으려 속내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과거의 나는 모든 부대원에게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요했었다. 특히 문제혁에게는 나와 사적으로 맺은 관계를 핑계로 사사건건 간섭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대처로 인해 문제혁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알고 있다.
불현듯 문제혁이 받았을 고통을 상기할 때마다 이전 생에서 유스티티아의 검을 습득했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선연하게 그려졌다.
나와 문제혁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이 생긴 것도 바로 그때였다.
* * *
2031년, 초여름.
던전
섬을 둘러싼 해무는 살갗과 호흡기를 파고들어 느린 속도로 독을 퍼뜨렸다.
그로 인해 호흡이 버거워진 나는 간신히 세이렌을 해치우고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엉망이 된 몰골로 한쪽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오른손에 들린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숲의 경계 너머에서 전전긍긍하며 나를 기다리던 건 예상대로 문제혁이었다.
“사령관님!”
그토록 유능한 부대원들마저도 맥없이 스러져 있던 모래사장에서 유일하게 깨어 있던 문제혁이 갈라지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니까 이게, 이건 분명…….”
문제혁은 차마 성물이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나와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른 부대원들은 이 던전에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전에 공략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외의 다른 명령이 있었다는 건 오로지 문제혁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말 실존하는 물건이었다니. 복원도를 보고도 차마 믿지 못했는데…….”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문제혁을 힐긋 살핀 나는 고개를 기울여 어깻죽지에 땀에 젖은 눈가를 닦아 냈다.
“사령관님, 정말 그대로 청장님께 가져가실 겁니까. 이게 어떤 물건인지 사령관님께서 가장 잘 알고…….”
그즈음에서 나는 문제혁에게 팔을 들어 저지했다.
그러자 문제혁이 입을 달싹이면서도 말을 멈추었다.
“귀관에게 분명 일렀을 텐데.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진짜 목적은 이 검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고.”
대답을 바라지 않은 말이었으나 문제혁은 물러서지 않고 단단하게 대꾸했다.
“그 검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또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재고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말마따나 이토록 귀하고 위험한 물건이라면 응당 차진명에게 넘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령관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청장님은…….”
“문제혁 대위, 귀관은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나?”
최종 보스까지 처치한 뒤 공략을 마무리하려던 나는 문제혁의 말을 가로막았다.
“귀관과 사적인 관계를 맺었던 나는 없는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얘기했을 텐데.”
이것만 해도 문제혁은 내 말의 저의를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어 노려본 문제혁의 모습에서 곧장 반응이 나타났다.
뼈가 으스러질 기세로 주먹을 한껏 움킨 문제혁이 고개를 떨구며 숨을 골랐다.
해무에 잠식되어 가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호흡이 뚝뚝 끊겼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하겠다고? 대체 그 말이 몇 번째지?”
그렇게 말하는 목울대로 불쾌한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독이 퍼진 손끝으로 왼손에 백색 권총을 그러쥐고 있던 것을 고쳐 쥐었다.
이윽고 맞은편에 붙어 선 문제혁의 어깨를 총구로 툭툭 건드리면서 마른 입술을 열었다.
여느 때와 달리 종잇장처럼 맥없이 밀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면서 힘을 실어 짓눌렀다.
“귀관이 사령관에게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설치는 꼴을 언제까지 용납해야 하지. 어미 잃은 짐승처럼 뒤꽁무니 쫓는 꼴이 가여워서 여기까지 쫓아오는 것도 봐줬더니 이제는 내가 만만해지기라도 한 건가?”
계속해서 엉망이 된 제복 옷깃을 짓누르자 문제혁이 모래사장에 자빠졌다.
권총을 허리춤에 꽂은 나는 손 하나로 그의 멱살을 쥐어 단숨에 일으켰다.
“명심해. 귀관의 기억 속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든 그건 진작 죽은 사람이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전시의 부상이 삽시간에 악화되는 것이 몸소 느껴졌다.
한쪽 무릎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후들거렸으나 손아귀에 힘은 여전했다.
“귀관이 죽다 못해 썩어 버린 기억을 부여잡고 뭘 어쩌든 내 알 바 아니야. 적어도 내 명령을 따르는 순간에는 허튼 데 정신 팔렸다는 걸 들키지 마. 보고 있으면 나까지 역겨워지니까. 이건 명령이다.”
나는 문제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멱살을 던지듯 놓아 버렸다.
다시금 모래사장에 처박힌 문제혁은 몸을 틀어 엎드린 채 간신히 숨을 토해 냈다.
곳곳에서 쓰러진 부대원이 고통에 차 신음하는 것이 들렸으나 무시하고 시선을 틀었다.
오른편에 들린 백색의 검을 들고 이리저리 살핀 뒤에야 눈을 감고 깊이 안도했다.
차진명의 명령을 무사히 완수했다는 사실 외에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 * *
그때의 기억을 상기할 때마다 가슴속에 바위가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나는 묵묵한 자세로 문제지를 들여다보는 문제혁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문제혁의 사망 소식을 접했던 순간에도 나는 자연스레 그 순간을 떠올렸다.
아마 죽기 전의 문제혁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도 같은 기억이지 않았을까.
두 번째 생을 사는 동안 가장 깊이 사죄하고 싶은 사람은 단언컨대 문제혁이다.
그 수모를 겪고도 내 곁에 남았던 문제혁을 절대로 배신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
거듭하여 마음 깊이 다짐한 뒤 지금 문제혁이 느끼고 있을 속내를 헤아렸다.
지금 문제혁은 지선일에게 느끼는 열등감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중일 터였다. 생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을 테니 더더욱 생경하고 고통스럽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기억을 되짚어 보니 동아리 시간마다 합을 맞춰 훈련하던 지선일과 나를 보던 문제혁의 표정이 평소와 사뭇 달랐던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답답한 심정인지 잘 알아. 지난 학기까지 나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그걸 아는 이상 너만 두고 가는 일은 없을 거야.”
차분하게 읊조리는 내 목소리에 문제혁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니까 뭐든 얘기해 봐. 어떤 게 제일 어려워?”
이제부터는 문제혁이 담아 둔 모든 이야기를 경청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건 진정한 사죄로 향하는 첫 번째 걸음이 될 것이다.
[미개방 스킬 ‘준비된 설계자’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 ]그 순간 눈앞으로 푸른 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