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오래된 예언 (2)
그로부터 얼마 뒤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체감하기로 십 년여 만에 보는 시험은 남다른 감상을 안겨 주었다.
젠장. 공부할 게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날마다 밤을 새워 가며 들여다봐도 공부할 범위가 끝나지 않는 통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미 한차례 겪어 보았으니 한층 수월할 줄 알았던 건 나의 오만이었다.
그나마 며칠 내리 이론서와 문제지에 파묻혀 있으니 이전의 감각이 되돌아오기는 했다.
시험지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 보면 이전 생에서 보았던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는 망설임 없이 익숙한 답을 고르면 되는 터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도 부정행위라고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은 잠시였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다.
시험은 총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첫날은 국가에서 지정한 일반 교과과정에 포함된 과목을 위주로 시험을 치렀다.
이틀째에는 청소년 각성자를 대상으로 꾸린 교과 과목의 시험이 줄지어 이어졌다.
셋째 날에는 여분의 과목을 처리하듯 진행되었기에 한층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비로소 다다른 마지막 날이었다.
사실상 마지막 날은 시험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학생들은 벌써 들뜬 상태였다.
그동안 문제혁과 나는 일과를 마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혁이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혁도 얘기하며 마음이 편해진 덕분인지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크게 낙담하기보다 차분한 기조를 유지하는 듯했다.
문제혁은 그렇다고 쳐도. 다른 애들은 잘 있으려나.
시험 기간이라 동아리 활동이 없는 탓에 통 보지 못했더니 슬슬 소식이 궁금해졌다.
같은 학년인 홍원하는 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반이 다른 탓에 자주 마주치지 못했다.
홍원하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지선일이 떠올랐다.
오늘이 지나고 동아리 시간이 돌아오면 새로 합류한 지선일과 함께 훈련해야 할 텐데.
어쩌다 사이가 멀어졌는지 알아야 둘을 떼 놓든지 말든지 하지…….
분명 학생의 몸으로 되돌아왔으나 자꾸만 교사와 다름없는 마음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도통 속마음을 보여 주지 않는 홍원하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팠다.
“도해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깜짝이야.
기척도 없이 눈앞에 불쑥 나타난 건 홍원하였다.
“홍원하 네가 왜 지선일이랑 사이가 안 좋은지 궁금하다는 생각.”
나는 한쪽 어깨에 느슨하게 걸친 가방끈을 고쳐 메면서 교실로 들어갔다.
홍원하도 같은 교실로 들어오는 걸 보니 이번 시간은 시험 장소가 겹치는 듯했다.
띄엄띄엄 떨어진 책상마다 붙은 번호를 확인한 뒤 내 자리를 찾아 짐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금세 내 뒤로 따라붙은 홍원하가 열린 문 바깥을 가리켰다.
“신성한 시험 기간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어떡해. 나가서 마저 얘기해.”
뜬금없는 내 말에도 타격 하나 없이 멀끔한 홍원하를 흘긋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해.”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지선일이 말은 좀 고약하게 해도 사람 된 도리는…….
“그렇지만 걔도 지금까지 나한테 일언반구 없는 것 보면 똑같이 잘못한 것 아니야?”
그러니까 이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홍원하,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아까부터 계속 물어봤잖아.”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어조로 물었으나 홍원하는 은근하게 딴청을 피웠다.
“너 설마 얘기하기 싫은 거야?”
누적된 피로 탓에 울컥 치솟으려는 분노를 간신히 다스리며 물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계속 묻는다고 한들 대답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김미솔은 얘한테 별의별 얘기를 다 들은 것 같은데.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새삼스레 김미솔의 똑 부러지는 야무진 성정을 실감하며 홍원하를 보았다.
“지선일이 우리 동아리에 합류한 건 너도 알잖아. 시험 마치는 대로 동아리 시간 돌아오면 다음 훈련 계획부터 세워야 해. 그 과정에서 너희를 붙여 둘지 떨어뜨릴지 결정하려면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야 하고.”
복도의 창틀에 허리춤을 기대고 서 있던 나는 이내 난간에 손을 얹으며 자세를 바꿨다.
여전히 느슨한 자세로 난간에 기대어 선 홍원하가 눈길을 비스듬하게 낮추었다.
“내가 걔랑 다툰 건 예전에 있었던 일이야. 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많아 봤자 고작 열둘, 열세 살 때 있었던 일로 아직도 이런다고?”
반사적으로 던진 질문에 심통이 난 건지 고개를 돌리는 홍원하를 붙잡았다.
“아니, 그럴 수 있지. 그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거라면 둘이 같은 지역에서 살았던 거야? 아니면 어른들이 먼저 알고 지낸 건가?”
“정답은 후자. 우리 부모님이 걔네 아버지가 세운 길드 소속 헌터였어.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봤고. 그러다가 뭐……. 길드는 이미 없어졌으니까 묻지 마.”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공연히 문지르던 홍원하가 말했다.
그가 내놓은 정보는 윤곽만 겨우 잡힌 정도에 불과한 터라 눈가를 찡그렸다.
“그래서 결론은 한참 전에 있었던 다툼 때문에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거잖아.”
“맞아.”
“정말 두 사람이 같은 동아리에 있어도 괜찮겠어? 지난번에 물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있기도 했고, 네가 괜찮다고 해서 그냥 넘겼지만 혹시 몰라서 묻는 거야.”
홍원하는 명쾌한 대답을 내놓는 대신 음, 하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편하게 생각해 보고 얘기해 줘도 돼. 나로서는 두 사람 다 잃고 싶지 않은 인재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할 생각이니까.”
“인재? 너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것보다 말하는 투가 꼭 길드 스카우터 같았는데, 방금.”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홍원하를 잠자코 쳐다보기나 했다.
“알았어. 장난 그만 칠 테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아무쪼록 난 뭐든 괜찮아. 좀 불편하기는 할 텐데 나보다는 지선일 의견이 중요할 것 같아서.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나도 지선일 때문에 동아리까지 나갈 생각은 없거든. 그건 지선일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합의점을 찾아야겠지.”
물끄러미 응시하는 나를 따라 진지한 기색을 되찾은 홍원하가 대답했다.
“지선일한테는 네 얘기 안 했어. 내가 너한테 먼저 얘기 전해 들은 걸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이미 우리 동아리에 누가 있는지 전교생이 다 알고 있기도 하고.”
“그렇겠지. 보통 현장 실습이 끝나면 그 조는 뿔뿔이 흩어지는 게 태반이래. 서로 멱살 잡고 싸우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파하면 다행이라고 하더라. 그나마 강효서 선배가 이끄는 조만 우리 조처럼 잘 뭉쳐 있다고 하기는 했어.”
강효서네 조가 우리랑 비슷하다고? 그건 나도 몰랐는데.
“강효서 선배네 조가 이전 학기 현장 실습 최우수 조장이라고 했었지.”
나는 내심 놀랐으나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유도하는 질문을 건넸다.
“어, 맞아. 조장도 조원도 전부 제비뽑기로 하는데 그 선배가 매번 조장이 되는 것도 신기해. 그보다 더 신기한 건 그렇게 만난 조원들이 전부 강효서랑 사이가 엄청 좋다는 거지.”
“작년에 그 선배랑 조원으로 묶였던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기억나?”
“음, 다는 아니고 몇 명만? 작년 1학기 현장 실습에서는 미솔 누나가 같은 조였대. 봐서 알겠지만 지금 누나는 강효서 선배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 말에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김미솔이 커뮤니티의 존재를 언급하며 강효서를 거론할 때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구나.
“미솔 누나 말고도 우리가 아는 사람이 또 있어.”
“누군데?”
“공희찬 선배.”
내가 대답을 유예하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자 홍원하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 선배가 국회의원 아들이니 뭐니 해도 평판 별로였던 이유는 너도 알지. 둘이 많이 다투면서 느꼈겠지만 성격이 좀 거칠잖아.”
좀 거친 수준이 아니지. 가끔 보면 내일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던데.
“그랬던 선배가 예전보다 더 의기양양해진 것도 강효서 선배랑 작년 2학기에 실습에서 같은 조로 묶이고 나서부터야.”
거기까지 듣고 보니 슬슬 감이 잡혔다.
강효서가 커뮤니티를 어떤 식으로 운영하는지 궁금했는데.
인원 충원을 이런 식으로 했구나. 하필 나랑 비슷할 게 뭐야.
“저기서 오는 거 감독 쌤인 것 같은데. 시험 곧 시작하려나 봐.”
홍원하의 말만 듣고 보면 김미솔은 포섭하려다가 실패한 것 같네.
공희찬은 그 제안을 넙죽 수락하고 활동하다가 이번에 내쳐진 거고.
“도해월, 내 말 안 들려? 빨리 들어가자.”
그렇다면 지금 차진명이 잠잠한 건 나의 행보를 지켜보는 중이라는 뜻이 된다.
사람을 모은 뒤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싶은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홍원하의 재촉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 * *
비로소 중간고사가 끝났다.
마지막 시험을 마친 내가 곧장 다다른 곳은 도서관이었다.
인적이 없다시피 한 내부를 울리는 건 오로지 내 발소리뿐이었다.
문제혁과 있을 때 기억을 떠올린 이후로도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오래된 예언’을 떠올려 보려 했다. 하지만‘오래된 예언’에 본격적으로 접근하려 했을 때의 이상 반응은 그날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에는 문제혁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태연한 척했으나 이후에도 단순하게 회상하려 할 때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아득해졌다.
오히려 회상을 거듭할수록 잘게 쪼개진 파편 같은 장면과 목소리만 날아들 뿐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아주 오래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열세 살 때였지. 각성하고 나서 처음으로 천리안 스킬을 시전했을 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그때와 느낌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었다.
이런저런 감상을 잠시 접어 둔 나는 역사서가 마련된 책장 사이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닥쳤던 장면 중에 도서관도 있었어. 분명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중얼거리던 나는 떠오르는 대로 책장을 살피다가 성물과 관련한 서적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다. 성물 또한 예언처럼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니 연관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성물의 정의부터 되짚고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을 집어 들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책을 펼쳤다. 벽돌만큼 무거운 이론서를 한 장씩 넘기고 있으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같은 사람이 제작한 검 두 자루가 있다고 가정해 보라. 첫 번째 검이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장수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 사람들은 그의 검으로 적을 무찔러 죽이고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반대로 두 번째 검이 잔혹한 범죄자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은 그 검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을지라도 고유의 가치가 하락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때 후대에 이르러 성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전쟁 영웅이 소지한 첫 번째 검이다. 신성력의 바탕인 신성한 기운은 고결하고 정의로운 상성을 지닌 염원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 「성물의 역사」]결국 그 물건을 누가 소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거지.
그 논지를 곱씹어 생각하다 보니 문득 2014년에 벌어진 ‘게니우스의 창 도난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에 분실된 성물 게니우스의 창은 이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했어. 그 창이 어떤 사람의 손에 들어갔느냐에 따라…….
지잉―
미간을 좁힌 채로 아랫입술을 잘근대던 나는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발신자는 문제혁이었다.
[형, 어디야? 아직도 도서관이야] [이제 가려고 했어. 금방 들어가.]들여다보던 책을 덮고 제자리에 정돈한 뒤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건물을 옮겨 가는 동안 바라본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진 채였다.
생각보다 전진이 더뎌.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못 찾을 거야.
다음 동아리 시간에 예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지 얘기라도 꺼내 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