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49
49화. 오래된 예언 (4)
“그럼 모의 던전 테스트는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진행하는 거야. 다른 의견 더 없으면 오늘 7층 필드에 훈련 예약해 둘게.”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정돈하는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다들 따로 들은 얘기 있어?”
화두를 돌렸으나 누구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문 채 다른 사람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참고로 새로 합류한 사람들도 정보를 공유하는 걸 동의하고 들어온 거야.”
간결히 덧붙이자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강준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래서 말을 안 하는 거였나 보다.
굳이 말 안 해도 약속을 철저히 지킬 생각이었나 보네.
나로서는 얼마든지 달가운 반응이었다.
“누구든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봐.”
대부분 입술만 달싹이며 서로의 눈치를 보는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길어지려는 정적을 깨뜨리고 목소리를 낸 건 의외로 강준희였다.
“음, 그러면 제가 먼저…… 얘기해 볼게요. 다들 아실 것 같지만 차진명 선배가 학교에 돌아왔대요. 이미 한참 지났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난 건 오랜만이니까 혹시 하는 마음으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강준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희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걸 누가 모르냐? 유학 갔던 차진명이 돌아왔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겠다. 여기 오면 정보도 공유할 수 있다며. 기껏 왔는데 이건 뭐,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이어서 공희찬의 눈길이 내가 앉은 쪽으로 비스듬하게 흘렀다.
나와 강준희를 차례로 비웃는 꼴이 상스러워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선배야말로 그런 저렴한 말투는 언제까지 구사할 건지 알고 싶은데.”
차분하게 의자를 밀고 일어선 나는 닫혀 있던 문고리를 쥐고 활짝 열어젖혔다.
“열심히 하자고 모인 사람한테 면박이나 줄 거면 선배 장단에 맞춰 줄 사람이나 찾아봐. 지나가던 개도 선배랑은 상종 안 할 것 같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문고리를 그러쥔 채로 고개를 반쯤 기울이고는 턱 끝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아, 이 새끼 또 시작…….”
“그러는 선배는 무슨 정보를 가지고 왔는데요……. 매번 뭣도 없으면서 나대기만 하고, 도움도 하나 안 됐으면서…….”
힘껏 움킨 두 주먹을 무릎에 얹은 채 어깨를 떨던 강준희가 중얼거렸다.
더디지만 정확한 어조로 뱉은 말이 도화선이 되어 분위기가 삽시에 얼어붙었다.
방금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내가 요새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나.
문제혁에 이어 강준희까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인 탓에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그 말이 실수였다면 강준희는 곧장 자신의 말에 변명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강준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담담하다 못해 가라앉은 눈빛으로 벌떡 일어선 공희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분명 언젠가 강준희에게서 보았던 얼굴인데.
‘그렇구나……. 그러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그냥 궁금해서. 다들 우리 조가 큰일을 겪고 나왔다고 하길래 A급 몬스터가 나타난 것 말고 또 다른 일이 있나 해서.’
현장 실습에서 복귀한 직후에 따로 만난 강준희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었나.
당시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단언했으나 그때도 강준희에게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너희 지금 뭐 하니?”
정적 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로 헛웃음을 지은 건 김미솔이었다.
“도해월, 너도 다시 와서 앉아.”
그 소리에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한 건지 어안이 벙벙한 꼴로 나와 강준희를 번갈아 보던 공희찬에게서 고개를 틀었다. 한숨을 게운 나는 김미솔을 바라보았다.
“선배도 방금 들었잖아. 우리 지금 현장 실습 준비하는 거 아니야.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훈련하려는 건데 저런 식으로 물 흐리는 사람을 방치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건조한 투로 응수하자 마른 낙엽에 불씨가 튀듯 말다툼이 시작됐다.
곳곳에서 터져 나온 음성이 한데 얽히는 걸 지켜보던 문제혁은 안절부절못하더니 끝내 내 곁에서 팔을 거머쥐었다. 그 손길을 인지한 직후 입을 닫고 숨을 가라앉혔다.
“씨발, 안 해. 안 할 테니까 다 좆 까.”
결국 강준희와 다투던 공희찬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문을 어찌나 세게 닫은 건지 신발 밑창까지 미세하게 울릴 정도였다.
설연호는 공희찬에 의해 구석으로 밀리며 넘어진 강준희를 일으켜 세웠다.
지켜보기만 하던 홍원하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하던 김미솔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다 끝났어요?”
자신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상황을 관조하던 지선일이 말했다.
“다 끝났으면 저도 얘기해도 되나 싶어서요. 저랑 제혁이한테는 말할 틈도 안 주길래 발언하려면 따로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나 싶었거든요.”
문제혁의 손을 부드럽게 거둔 뒤 자리에 도로 착석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저는 저 선배처럼 경우 없이 뛰쳐나갈 생각이 없어서 얘기하는 거예요. 먼저 모여 있던 선배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동아리 시간 전후로 해결하세요.”
비틀거리던 강준희를 부축해 앉힌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야. 해월이 너랑 희찬이 사이가 안 좋은 걸 모르는 사람 여기 아무도 없어. 다시 데려온다고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나도 연호랑 같은 생각이야. 네 말대로 현장 실습 중인 것도 아닌데 나서서 말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설연호과 김미소를 번갈아 바라보던 지선일이 이어서 대답했다.
“들었죠? 동아리 시간에 꼭 다퉈야만 직성이 풀리는 거라면 다짜고짜 나가라고 할 게 아니라 중재라는 걸 해 보라는 말이에요. 동아리장씩이나 됐으면 그에 맞는 책임을 짊어질 생각부터 해야죠.”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지선일의 말은 전부 옳은 말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문제혁의 이야기만큼이나 새겨듣고 싶었던 것이 지선일의 이야기였으므로 달리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도 왔는데 분위기 흐려서 미안. 공희찬 선배한테는 나중에 연락해서 해결할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할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한 목소리를 내면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들도 의자를 끌면서 자리에 앉았다.
* * *
“다음은 내가 얘기할게. 우리 학년에서 어떤 애가 부정행위를 했다가 들켰다고 하더라.”
대화는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진 뒤에야 다시 이어졌다. 두 번째 타자는 김미솔이었다.
나는 김미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조금 뜨끔했다. 불과 며칠 전 시험을 보면서 내가 가진 기억을 토대로 시험을 보는 일이 부정행위는 아니었을까 의문을 가졌던 것이 생각났다.
“어쩌다가 걸린 건데?”
홍원하가 묻자 김미솔은 착잡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필통 안에 필기가 적힌 종이를 숨겼다가 걸렸지, 뭐. 7학년 마지막 학기라서 그런지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했나 봐. 굳이 그런 걸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하는 애였거든. 근데 이번에 한국대학교 마력연구소 입사 컷이 높아졌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랬던 것 같아.”
한국대학교 마력연구소는 각성자 등급이 높지 않은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이었다.
마지막 학기에 부정행위를 하다 발각된 일은 해마다 벌어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다.
“음, 내가 들은 얘기는 좀 사적인 부분이야. 처음 모였을 때 약속했던 것처럼 어디 옮기면 안 돼.”
김미솔의 뒤를 이어 입을 연 홍원하가 그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6학년 서애란이랑 7학년 강효서 선배. 그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대.”
이건 그나마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였다. 나는 마저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애란이 누군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알지? 여기 있는……. 아무튼 유명한 애.”
홍원하는 자연스럽게 지선일을 가리키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지선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꺾으면서 스트레칭이나 하고 있었다.
“강효서 선배랑 같이 실습 나간 조원들도 우리처럼 친하다고 들었어요……. 그러기가 쉽지 않다고 하던데. 그리고 서애란은 지난 실습에서도 무진장 잘하지 않았나.”
입술을 달싹거리며 눈치를 보던 강준희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맞아. 솔직히 우리 조에서 일어났던 일만 아니면 이번에도 강효서 선배가 최우수 조장으로 선발됐겠지.”
나는 강준희의 말에 대답하면서 곁눈으로 지선일을 잠시 바라보았다.
“우리 학교에서 서애란 선배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 선배야말로 진짜 타고난 천재잖아요. 못하는 게 없다던데.”
그렇게 말하는 지선일도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였으나 서애란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노력의 유무였다. 지선일은 저력으로도 감출 수 없는 단점을 보완하고자 날마다 실력을 갈고닦으며 겸손하게 굴었다면 어느 방면에서도 모자란 것 없는 서애란은 콧대가 무척 높았다.
서애란의 부친과 모친 모두 현시점의 이능단속‧관리본부 소속 헌터로 활동하는 중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이능청으로 승격하게 되면서 그 두 사람은 고위 간부로 진급하게 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서애란도 당연히 차진명의 커뮤니티에 속해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서애란이 강효서랑 다퉜다고? 지금 이 시점에서?
쉽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기에 나는 잠자코 미래의 기억을 되짚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전 생에서도 차진명의 측근 중에 서애란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와 비슷한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전 생에서도 이맘때 서애란과 강효서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건데.
커뮤니티에서 이탈한 서애란은 졸업한 뒤로 어떻게 지냈던 거지?
생각을 이어 나가며 차분하게 곱씹어 보니 훗날 부모의 행적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으나 서애란 본인에 관한 건 기억에 없었다는 것까지 깨달았다. 나는 그러한 사실이 가리키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다다를 수 있었다.
서애란도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서 죽는구나.
소리 없이 입속으로 되새기고 보니 비로소 확실해졌다. 그 당시 던전 브레이크의 여파로 헌터 아카데미의 상당수 인원이 사망했다. 사망 인원이 너무도 많았던 나머지 그들을 전부 인지할 수 없었던 학생들은 언젠가부터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
그래도 서애란은 살아 있을 줄 알았는데.
“형, 괜찮아?”
차게 식은 손끝을 힘주어 쥐고 있으니 문제혁이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문제혁에 이어 설연호까지 묻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나는 고개를 가벼이 저으며 설연호에게 말해 보라며 손짓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한 거면 얘기해. 음, 이왕 말하는 김에 나도 얘기할게. 이번 학기 교사들 모임에 정건후 선생님은 참석하지 않았대.”
서애란에 이어 정건후가 호명되는 것을 들으면서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차정주 이사장은 학기마다 교사들의 식사 자리를 개최하고 있어. 모이는 시점은 꼭 중간고사 직후라고 하더라. 이건 그냥 소문인데,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건 차정주의 편에 서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나 다름없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설연호를 따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건후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이랑 사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건 충분히 봐서 알겠지만. 나는 그 이유가 차정주 이사장의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
설연호의 말은 충분한 설득력을 담고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미솔이 말을 더했다.
“그런데 차정주 이사장은 학교 일에 관심이 별로 없지 않아? 지난 학기 현장 실습 때 리호 길드를 고발하겠다니, 어쩌니 한 것도 이사장이 아니고 교장이었잖아. 막상 이사장은 이틀 지나서야 조용히 처리하라는 말만 전했다며.”
김미솔의 말을 끝으로 지선일이 입을 열었다.
“그런 위험한 일이 있었는데 이틀이나 늦게 반응했다니. 확실히 제정신처럼 보이진 않네요. 차정주 이사장이 헌터 아카데미 세우려고 몇 년 동안 공들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건 그냥 보여 주려고 쇼한 거예요? 괜히 뒤통수 맞은 기분이네.”
그렇게 말한 지선일은 뒷머리를 이유 없이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일단 오늘 정보 공유는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
내 말에 모두가 수긍하는 것을 보며 화두를 돌렸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게.”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본 뒤 낮은 소리로 질의했다.
“오래된 예언이 어떤 건지 알고 있는 사람. 혹시 우리 중에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