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0
50화. 오래된 예언 (5)
“오래된 예언?”
김미솔이 단어 그대로 되묻자 다른 이들도 골몰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나 역시 가물거리는 기억의 맥락을 헤아려 보았다.
이전에도 오래된 예언이라는 건 극소수의 사람들만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개념이었어.
전생의 내가 예언의 존재를 알아낸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던 것 같은데…….
“음, 들어 본 적 없어. 요즘 시대에 예언이라는 말은 좀 뉘앙스가 그렇지 않나?”
“맞아. 예언이라는 말은 뉴스에 나오는 사이비 교주들이나 쓰는 것 같은데…….”
강준희는 고심한 끝에 진지하게 내뱉었으나 도리어 웃음을 불러왔다.
그 엉뚱한 소리에 나조차도 입꼬리를 달싹이고 말았다.
“저는 들어 본 적 있어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면서 고심하던 지선일이 말했다.
“언제? 어디서 들은 거야?”
그러자 모두의 이목이 지선일에게 향했다. 달리 덧붙이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지선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음, 정말 들어 보기만 했어요. 어디선가 들어 본 기억은 있는데……. 막상 떠올리려고 하니까 생각나는 건 없어요.”
“어디서 시작된 건지도 모르는 거지.”
“네, 어느 순간부터 그냥 알고 있었던 거라서. 내용도 흐릿하게만 기억나요.”
나는 지선일을 더는 채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데? 진짜 예언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냥 알고 있었다는 것도 사이비가 할 법한 말인데…….”
“그러니까. 뭘 예언하는 건데? 지구 종말?”
호기심 어린 김미솔의 질문을 기점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한데 얽히는 의문을 배경음악 삼아 멸망을 앞두었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내가 예언을 읊었던 것도 순전히 그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
한참 전에 가라앉았던 기억이 수면에 떠오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전생에서 그 예언을 알게 되었을 때의 나는 문제혁과 함께 있었을까.
소리 없이 질의하며 문제혁을 돌아보자 그의 시선이 내게 향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수상하게 여길 만한 행동을 계속했으니 뭔가 의심하고 있겠지.
계속 의심을 살 바에는 문제혁과 설연호를 동행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알아보면서 두 사람에게 어떻게 도움을 청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오늘 동아리 모임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내가 방금 얘기한 오래된 예언에 관해서 찾아볼 수 있다면 가능한 데까지만 뭐가 됐든 알아봐 줘.”
“그러자. 다들 고생했어.”
“응, 훈련하는 날 다시 보자.”
그때까지도 나를 지켜보던 문제혁은 소리 없이 자리를 정돈하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 * *
[모의 던전 테스트 입장 인원을 확인합니다.] [에 입장합니다.] [지금부터 모의 던전 테스트가 시작됩니다.]눈앞에 떠올랐던 안내 문구가 사라지면서 눈앞의 전경이 뒤바뀌었다.
허리춤에 손을 옮겨 권총을 그러쥔 나는 광활한 모래사막을 내다보았다.
이어서 눈을 감은 뒤 천리안 스킬을 통해 미래의 장면을 읽어 들이기 시작했다.
두어 번의 심호흡을 마무리하며 눈을 뜬 나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 훈련에서도 나와 다른 동료들은 전부 설연호에게 기대어 가야 하는 실정이다.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는 불씨가 퍼뜨리는 흐릿한 연기에 독이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
최종 보스까지 무사히 처치하려면 설연호의 활약이 필수 불가결했다.
공희찬이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클리어까지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희찬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나의 설계를 따를 가능성이 무척 희박했다.
긴 한숨을 쏟아내며 고심하던 나는 공희찬이 자리한 곳을 돌아보았다.
공희찬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마 작년에 이곳에 들어왔었을 강효서를 상상하는 거겠지.
이제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전술 자체를 새롭게 구상해야 했다. 공희찬과 지선일, 이 둘을 떨어뜨려서 배치하되, 둘을 효율적으로 다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
설연호의 방어막은 전방 오십 미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고로 이번 훈련에서는 문제를 일으킬 법한 인원들을 최대한 떨어뜨린 채 이동하는 것이 나을 테다.
“오늘은 다 같이 뭉쳐서 이동하는 것보다 짝을 이뤄서 거리를 두고 전진하는 게 낫겠어. 최종 보스를 중심으로 펼친 그물을 점점 좁히다가 덮쳐 버린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면 돼.”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나는 총구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호흡을 정돈하면서 모두가 듣도록 이야기했다.
“훈련하는 동안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각자 눈앞에 보이는 설계에만 집중해. 필요에 따라 더 나은 선택이 있다면 그걸 고수해도 좋아. 하지만 내가 그린 그림을 의도적으로 이탈한다면 더 이상 내 설계를 따르지 않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탕!
총성과 함께 레몬 빛 탄환이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스킬을 중첩한 탄환이 몸에 닿는 즉시 살갗에 흡수되어 전신으로 퍼지며 내가 구상한 설계가 기다란 광선(光線)으로 형상화되어 전면에 펼쳐진다.
등급 상승 이전에는 내 머릿속으로 구상한 설계를 복사하여 전달하는 형태로 스킬을 시전했었다. 설계 스킬의 등급이 A급으로 상승한 지금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정표까지 마련되었으니 한층 수월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탕!
마지막으로 설연호의 어깨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윽고 설계를 흡수한 그가 움직이자 다른 이들이 전부 자신의 위치로 흩어졌다.
* * *
[모의 던전 테스트 중간 점검을 시작합니다.] [현재까지 집계된 점수를 토대로 결과를 산출합니다.]훈련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지선일은 눈앞에 떠오른 푸른 활자를 바라보며 다시금 숨을 골랐다.
이윽고 대열의 뒤쪽에서 묵묵히 걷는 도해월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백색 권총을 한참 바라보던 지선일이 시선을 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향한 곳은 자신의 손아귀에 힘껏 움킨 검은색 피스톨이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아귀에 들린 검은색 총의 이름은 ‘범고래’였다.
총신의 군데군데 남은 흰 무늬가 범고래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설연호가 내린 방어막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안전했다.
그가 지정한 구역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 공격에 대한 저항이 생겼다.
방어막 자체에서 비롯된 힐의 효력으로 인해 체력이 고갈되기도 전에 채워졌다.
‘전투 상황에서 힐러를 방어 인력으로 세운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보통 힐러는 후방에 배치하고 잡다한 뒤처리 같은 것만 시키다 위급할 때 호출되지 않나. 설연호 선배는 살생하지 않는 헌터라고 했으니 그동안 그런 뒤처리도 맡길 수 없었을 테고. 애초에 전문 힐러로 활동하는 헌터 자체가 없긴 하지만.’
크으윽―
크어억―
이어 몬스터가 당도하자 일전에 도해월이 구상한 설계에서 파생된 연노랑 광선이 몬스터를 향해 직선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몬스터의 행동반경과 공격 패턴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뒤이어 몬스터를 최단 시간 내에 처치할 수 있는 전법이 무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새겨졌다. 지선일은 도해월이 의도한 전법을 점검한 뒤 그것을 오차 없이 답습하려는 생각으로 총을 고쳐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세간에서는 설연호를 제대로 써 보기도 전에 버려진 패라고 말했다. 살생도 하지 못하면서 헌터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 떠드는 일에 급급할 뿐이었다. 그런 설연호에게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금처럼 방어형 헌터로 전면에 배치한 것 또한 도해월의 전략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이때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거론되던 건 설연진 마스터의 친딸 설연리 헌터였다.
많은 이들이 설연호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한 건 지난 학기 현장 실습부터였다.
‘길드 마스터였다가 은퇴한 내 아버지가 언급할 정도라면 말 다했지, 뭐.’
곁눈질로 자신의 근처에서 걷던 도해월을 살피던 지선일은 눈앞에서 이어지는 연노랑 광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이동하면서 그가 구상한 전법을 오차 없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몬스터를 처치했다. 무의식에 새겨진 도해월의 전법은 그동안 그녀가 고안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때까지 지선일이 구사하던 전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눈앞의 몬스터의 무의식을 사로잡아 의지를 조종하여 자멸하게 만들거나,
마찬가지로 행동을 조종하면서 정지하게 만든 뒤 스킬을 중첩해 타격을 가하거나.
두 방식 모두 타율은 높았으나 체력 소모가 상당하여 전투에서 오래 활보하기 어려웠다.
도해월은 지선일이 구사하는 고유의 전법을 유지하면서 체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설계에 적용했다. 그의 설계에는 적이 공격하고 방어하는 타이밍까지 반영된 덕에 그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했다.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저 선배를 신뢰하는구나.’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으면서 깨달은 지선일은 각자의 위치에서 전투에 몰두한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한쪽에서는 홍원하와 문제혁이 합세하여 몬스터를 처치하고 있었다. 홍원하가 물살을 이끌어 몬스터의 발목을 묶어 두면 창날처럼 가공한 얼음을 문제혁이 내리꽂는 식이었다.
지난 동아리 시간에 다퉜던 공희찬과 강준희 또한 별다른 문제 없이 공격을 감행하는 중이었다. 공희찬이 쉼 없이 빚어낸 불씨를 한데 모은 강준희가 바람을 더해 이곳의 지형보다 거센 열기로 몬스터를 단숨에 태워 버렸다.
이전부터 호흡을 맞춰 왔던 이들 사이에는 상호 간의 굳센 신뢰가 읽혔다.
새로 합류한 이들에게는 도해월을 기꺼이 신뢰해 보겠다는 투지가 느껴졌다.
지선일은 총구에 스킬을 응집하며 다시 한번 도해월을 바라보았다. 손끝에서부터 줄기를 뻗으며 방어에 힘쓰는 김미솔과 방어막을 강화하는 설연호의 뒤쪽에서 때마다 버프를 걸던 도해월은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매번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번 훈련에서 도해월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유독 집중해서 주시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몬스터를 처치하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이 집요하게 머물렀다.
그 모습은 꼭 판을 내려다보고 다음 수를 구상하는 기사(棋士)를 떠올리게 했다.
* * *
“확실히 이번 설계는 우리 호흡에도 맞는 것 같아.”
곳곳에서 터진 불씨로 인해 이마가 거뭇해진 홍원하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시간이 좀 더 소요되기는 해도 우회하니까 훨씬 편해. 무작정 몰아붙이지 않으니까 체력을 분배하는 것도 훨씬 수월하고.”
선선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미솔이 덧붙였다.
“설계대로 따라갈 수 있을 정도가 되니까 자신감도 붙는 것 같아요…….”
나는 이어지는 강준희의 말까지 듣고서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정돈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훈련을 시작한 지 세 시간째에 접어든다.
그동안 공희찬이 설계를 이탈할까 싶어 유심히 살폈으나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와 동료들이 처치한 몬스터의 사체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멀어진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십 분 이내에 저 멀리서 이 던전의 최종 보스가 나타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원하는 미래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었다. 공희찬도 무리 없이 설계에 따라와 줬고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은 상태로 최종 보스 앞에 서게 되었으니까.
지금은 훈련 중이었고 모두가 나를 신뢰한다는 가정이 있었기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끄는 것이 한층 수월했다. 하지만 필드나 던전을 벗어난 뒤에도 내가 원하는 미래에 다다를 수 있을까.
물살처럼 흘러가던 상념은 그즈음에서 멈추었다.
자세를 바로잡은 나는 총신을 고쳐 쥐었다.
“이 기세만 유지한다면 최종 보스도 처치할 수 있을 테니 다 왔다고 방심하지 말고 새롭게 갱신된 설계에 집중하면서 머릿속에 펼쳐지는 전법을 최대한 따른다고 생각해. 스킬 다시 걸 테니까 놀라지 말고.”
힘을 주어 전하는 목소리를 따라 근처에 선 이들이 고개를 끄덕여 호응했다.
나는 동료들과 차례로 시선을 맞추면서 설계 스킬을 시전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나는 마지막으로 지선일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에서 서애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예측대로라면 이 순간의 차진명은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 고려한다면 예언의 정체를 파고드는 일에만 집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래된 예언에 관한 건 동아리 사람들에게 얘기해 뒀으니 됐고.
마치는 대로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막을 수 있을 만한 계책을 다시 고민해 봐야겠네.
[지금부터 한 시간 뒤, 모의 던전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현재까지 집계된 점수를 토대로 최종 결과를 산출합니다.]그 순간 눈앞으로 푸른 활자가 떠올랐다.
맞은편에서는 둔중한 소음과 함께 대지가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