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1
51화. 오래된 예언 (6)
“훈련 복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나는 손바닥끼리 가볍게 맞대면서 맞은편으로 눈길을 틀었다.
칠판에는 어느새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상태였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최종 보스 공략 성공’이라는 문장이었다.
오늘 진행한 불 속성 지형 모의 던전 테스트는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테스트 종료까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내 기준에서는 다소 비효율적인 구석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동료들의 만족도는 높아 보였고 이전보다 안정적으로 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순간이면 아직 마음 한편에 차마 버리지 못한 욕심이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동료들의 속도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무엇보다 다행이었던 건 지선일과 문제혁이 동아리에 잘 녹아들었다는 것이었다.
혹여 지선일이 날이 선 태도를 고수할까 싶어 걱정했으나 과거의 그녀가 부린 하극상은 그저 불의를 참지 못해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문제혁은 그토록 걱정하던 것과 달리 훈련 중에는 어떤 설계든 잘 수행했다.
9층 화장실에서 지선일이 나에게 털어놓았던 고민도 이번 훈련에서 무리 없이 일단락된 듯했다. 지선일은 이전 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내가 구상한 설계를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완벽하게 이행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번 생에서 만난 동료들은 내가 구현한 설계를 그대로 구사하는 것을 가장 어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리는 전투 설계의 목적은 언제나 최단 시간 내에 적을 처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난이도 또한 자연스럽게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실수나 오차가 발생하는 건 그나마 믿음직한 설연호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지선일이 설계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쾌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잃어버렸던 부대원을 되찾고 다시 그들과 함께하는 일상은 내게 커다란 활력이 되었다.
이들과 하루하루를 힘껏 살아 내고 있으니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한 가지 더 생겼다.
현시점의 내가 인지하고 있는 미래의 사건들, 그중에서도 던전 브레이크 같은 재난이 나와 함께하는 이들의 삶을 뒤흔들지 않도록 근간 자체를 막아 내고 싶다.
거듭하여 수를 내다보고 방어하기를 반복하면서 그에 맞설 새로운 수를 고안해 내고 싶다는 열망이 날마다 굵직한 뿌리를 내렸다.
회의용 테이블과 등을 지고 서서 칠판에 적었던 글자를 지우고 있으니 김미솔이 말문을 열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오래된 예언에 대해서 알아낸 게 조금 있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우개를 쥔 채로 김미솔을 돌아보았다.
“웬일로 바로 돌아보네? 그런데 해월이 네가 기대한 수준은 아닐 거야. 이름부터가 워낙 예스럽기도 하고, 우리도 다 처음 듣는 얘기였잖아.”
이어지는 말을 경청하면서 어느 정도 말끔해진 칠판을 바라보았다. 김미솔이 말문을 맺기 전까지 칠판에 남은 자국을 마저 정리하고 의자에 착석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가 동료한테서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 있대. 그마저도 뭔가 확실하게 들은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존재한다는 수준의 풍문이라고 하면 적합할 거야.”
조곤조곤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피려 눈을 틀었다.
집중해서 듣기보다 각자 휴대전화를 꺼내 보는 등 딴청을 피우는 것이 대다수였다.
“오래된 예언. 사실 이 단어를 듣자마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게 없기는 하잖아. 오래됐다는 게 얼마나 된 건지도 모르고, 또 지금 같은 게이트 시대에 예언이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게 사실상 우스운 구석도 있고.”
거기까지 듣고 보니 김미솔이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는 듯했다.
선선히 동조하는 태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안도한 기색으로 말을 마저 이어 나갔다.
“그냥 우리 아버지나 그 윗대의 어른들 사이에 소문처럼 돌았다고 하더라. 어머니 동료분조차도 그게 어떤 내용인지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대.”
“그럼 진짜 저번에 누가 말했던 것처럼 사이비 교주가 일부러 퍼뜨린 말 아니야?”
김미솔을 바라보며 순진하게 묻는 홍원하의 목소리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에 뉴스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웬 사이비 교주가 한여름에 폭설이 내릴 거라고 예언했는데 구월이 끝날 때까지 눈송이는 코빼기도 안 보여서 그 교단이 폭삭 망해 버렸다는 얘기 같은 거요.”
그나마 예언의 존재를 알고 있다던 지선일조차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본 거야? 가만 보면 너한테서 별의별 얘기를 다 듣는 것 같아.”
따라서 웃음을 보이던 김미솔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래된 예언’이라는 단어의 조합 자체가 어딘가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는 만큼 다들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듯했다.
언젠가부터 헌터 사회에서는 각자 보유한 정보가 일종의 재산처럼 기능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도통 말이 되지 않는 소문을 일부러 퍼뜨리면서 진짜 정보의 가치를 높이거나 정보력이 없는 이들을 속이기 시작했다.
내가 언급한 오래된 예언 또한 영양가 없는 정보 정도로 치부하는 거겠지.
아예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자리매김하여 관심을 거두게 만드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렇다면 이 예언에 관한 건 나 혼자서 파고드는 걸로 하고 혹시라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말을 잘 정리해 볼까.
동료 중 맏이인 김미솔의 의견은 언제나 신빙성을 가졌다. 누가 됐든 김미솔의 말이라면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듣고 넘어갔다. 그건 공희찬도 마찬가지였다.
“요새 이런저런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불순물처럼 걸리는 게 많아지는 것 같더라고. 선별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니 혹시 하고 물어봤어.”
이 정도면 충분해. 내가 이렇게 운을 떼면 김미솔이 확실하게 눌러 줄 거다.
“확실히 요새 출처가 불분명한 얘기가 많이 떠도는 것 같더라. 일부러 작정하고 흘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김미솔은 맞은편에 놓인 빈 의자를 보고 있었다.
“얘기 끝났으면 나가도 되지?”
벌떡 일어나 발끝으로 의자를 밀어 넣은 공희찬이 먼저 문간을 넘어섰다.
나는 벌컥 열린 문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았어. 조심히 들어가.”
* * *
홀로 남은 교실의 창문 너머로 여러 갈래로 번진 노을빛이 새어 들었다.
나는 말끔하게 지웠던 칠판에 지금까지 수집한 조각들을 차례로 적어 보았다.
[오래된 예언, 성물, 용산 던전 브레이크, 서애란]마지막으로 적어 넣은 이름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며칠 새 오래된 예언을 파고드느라 잠시 잊었던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다시 상기하게 만든 건 단연 서애란이었다.
이전 생의 나에게 용산 던전 브레이크는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바랜 사진처럼 흔적만 남은 사건이 되었다. 부대의 총사령관으로 지내는 동안 크고 작은 규모의 던전 브레이크를 수도 없이 수습하고 다녔으니 자연스레 외면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잊었다고 해서 영영 잃은 것은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파묻힌 고통의 기억은 언제라도 고개를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 기억이 다시 소환되는 계기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고.
오로지 고통으로 남은 기억을 가장 손쉽게 상기하는 방법은 그 사건이 시작되었던 장소에 다다르는 것이다. 나 또한 회귀하여 기숙사 침대에서 깨어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전 생에서 내가 겪었던 모든 고통이 되살아나는 감각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커튼이 걷힌 창가로 넘칠 듯 일렁이던 주황빛이 칠판에까지 다다랐다. 따라서 물든 글자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으니 당시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 * *
2027년, 여름.
성문 길드가 보유한 D등급 던전이 단시간에 S등급으로 상승하여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 후일에 보도된 뉴스에 의하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던전의 등급이 상승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이트 시대 이전 국립중앙박물관이 위치했던 곳에 자리한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A급 몬스터는 거센 눈보라와 함께 나타나 순식간에 남산 공원 일대를 장악했다.
그날은 분명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의 한가운데였으나 온 도시에 눈보라가 불어닥치면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다.
성인 남성의 허벅지까지 쌓인 설원 위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건 오직 몬스터뿐이었다.
던전 브레이크 소식이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파견된 헌터들 또한 거동이 쉽지 않았다.
던전 에서 쏟아져 나온 눈송이는 그 이름처럼 어떤 존재의 걸음도 허락하지 않고 전부 묶어 둘 것처럼 거세게 몰아쳤다.
용산구에서 시작된 눈보라는 서대문구에 이어 은평구를 덮쳤다. 끝내 종로구까지 그 영향력을 퍼뜨리고서야 사태를 겨우 바로잡을 수 있었다.
사태의 여파로 온 도시가 쑥대밭이 되었으나 가장 큰 피해가 확인된 장소 중 하나는 헌터 아카데미였다. 헌터 아카데미에서 발견된 사상자는 총 172명이었다. 부상자는 셈할 수도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던전 브레이크의 여파가 교정을 뒤덮던 그 순간의 나는 어떠했던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못내 고통스럽고 괴로웠다는 감각만 선명했다.
그 과정에서 정건후가 사망했다는 것도 후일에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은 장면은 한여름에 펼쳐진 설원을 목격한 직후 다른 이들처럼 힘을 보태는 대신 몸을 돌려 도망쳤던 것이었다. 그간 학교에서 갈고닦았던 기술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힘껏 도망치는 과정에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맥없이 고꾸라진 전봇대에 짓눌린 채로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의 내 머릿속을 지배한 건 끝이 없는 무력감이었다. 뒤이어 문제혁의 이름을 상기할 틈 없이 도망쳐 버렸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두어 계절을 꼬박 지내고서야 사태의 여파가 온전히 수습되었다.
재난 현장에서 자신조차 두고 가장 먼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제혁과 한동안 사이가 멀어졌던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문제혁은 불현듯 화를 내려다가도 먹먹해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문제혁이 내다본 창가 너머에서는 날마다 눈이 내렸다.
소복하게 쌓인 눈더미가 도시의 소음을 흡수하며 사방이 고요해졌다.
* * *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창가로 고개를 틀었다.
어느새 노을이 걷히고 검푸른 빛이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전 생의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상기하다 보니 차게 식은 손끝을 말아 쥐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게 할 수는 없어. 반드시 막아야 해.
똑똑―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면서 곱씹고 있을 무렵 누군가 닫힌 문을 두드렸다.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정건후였다.
걸음을 서두른 것인지 평소와 다른 호흡의 정건후가 턱 끝을 젖히면서 입을 열었다.
“아직 여기 있었네. 급하게 전할 게 있어서 직접 왔다.”
“무슨 일인데요?”
문가로 다가가 정건후를 안쪽으로 안내한 나는 복도를 한 차례 두리번거렸다.
“동아리 활동 보고서와 관련해서 일이 좀 생겼어. 여기서 교사로 지내는 동안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어서 더 난처해졌고. 아무래도 누가 동아리를 없애고 싶어서 일부러 수를 쓴 것 같은데. 짐작 가는 사람 있니, 혹시?”
교사인 정건후가 굳이 내게 묻는다는 건 그조차도 감을 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도 모르게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헛웃음을 감추고자 손등으로 공연히 뺨을 두드렸다.
도대체 언제 움직이나 했더니. 이런 식으로 발을 거는구나, 차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