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예지력으로 (1)
비어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은 정건후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쉽사리 입을 떼기 어려웠다.
아직도 내 허벅다리까지 눈 더미가 쌓인 것처럼 온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했다.
정건후가 내게 무슨 소식을 전한 건지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다.
나 역시 곧장 받아치려 했으나 눈보라의 잔영이 아른거려 말문이 절로 막혀 버렸다.
젠장.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할 게 아니라 뭐든 말해야 할 것 아니야.
하필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 사망해야 했던 정건후를 맞닥뜨리는 바람에 입술이 굳은 것처럼 다물린 듯했다.
현재의 나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정건후의 모습을 계속해서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살아 있는 모습을 몇 번이고 실감하려는 의지를 거스르지 못했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불가항력이겠지.
동시에 멸망의 문턱까지 다다랐던 나에게는 기억 속의 사망한 누군가 현재에는 살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현실의 감각을 되찾는 하나의 수단처럼 자리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도해월, 왜 그렇게 멀거니 서 있어. 괜찮은 거야? 아직 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놀란 건 아니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을 차렸다. 잠잠히 대답을 기다리는 정건후의 눈동자에서 또렷하게 읽히는 것이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지언정 현재에 충실하게 임하려는 의지. 그것이 나를 안심하게 했다.
“네, 괜찮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동아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 거죠? 말이 안 되는데요.”
이윽고 맞은편에 앉은 내가 질의했다. 말과 달리 어쩌다 그런 논의가 시작되었는지 머릿속에 그려 보지 못할 것도 없었기에 음절마다 묻어나는 한숨은 겨우 삼켜야 했다.
“그동안 제출한 동아리 활동 보고서 때문에 발목이 잡혔어.”
“그건 누구나 내는 것 아닌가요? 그런 형식적인 것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트집이 잡히다니요. 그리고 내용에도 문제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애써 어이없는 기색을 추스르는 나와 달리 유달리 얼굴빛에서부터 고단함이 읽히는 정건후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동아리가 존재하는 목적에 의문이 생긴다더라. 관련 건의가 계속 들어왔다나 뭐라나. 학기가 끝나기 전에 존폐 여부를 재고하는 게 좋겠다고 하던데.”
대체 어떤 새끼가 말을 저따위로 했을까.
“대체 누가 그런 건가요? 제가 아는 선생님인가요?”
간신히 순화하여 내뱉자 정건후가 나를 흘끔 보더니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졸업할 때까지 마주치는 모든 선생님을 차례로 원망하고 의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나가는 대로 불필요한 원망은 하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건후는 약점을 간파당한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대더니 머지않아 내게 대답했다.
“너는 꼭 말을 해도…….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해.”
“네.”
“하여튼 대답은 잘하지. 차민훈 선생이 낸 안건이었어.”
아, 어떤 개새끼인가 했더니. 내가 잘 아는 개새끼였구나.
나의 3학년 담임이었던 차민훈을 떠올리면 입이 닳을 때까지 욕할 수 있었다.
이사장 차정주의 먼 친척인 그는 차씨 일가 내에서 포지션이 다소 애매했다.
우여곡절 끝에 헌터 라이센스는 발급받았으나 그의 한계는 여전히 E급이었다.
차민훈이 무슨 짓거리를 해도 등급 상승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몇 번의 측정 끝에 겨우 E급 판정을 받았던 그는 던전 공략을 시도하여 스탯을 상승시키는 대신 집안의 돈을 끌어다 아티팩트나 잔뜩 구매했다.
그리고 차씨 일가에 차민훈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몇몇 존재한다는 건 과거의 차진명을 통해 전해 들은 사실 중 하나였다. 과거의 한때 그들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 있으나 뭔가를 묻기도 전에 차진명에 의해 기회를 박탈당했던 기억이 함께 뒤따라 이어졌다.
“굳이 대답 안 해도 표정에 속내가 드러나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 따지고 보면 이 상황에서 제일 당황스러운 건 내가 아니라 너일 테니 혼자 생각해 봐.”
그럼 뭐 한 학기 만에 사람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무릎 위에 놓은 주먹을 힘껏 움키던 나는 정건후에게 예의상 웃어 보이는 척도 하지 않고 머릿속을 부산스레 배회하는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정건후보다 연배가 한층 높은 차민훈은 젊은 시절의 차정주에게 가장 먼저 굴복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다 내가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에는 노선을 틀어 이능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나는 문득 동아리 창설 신청서를 제출하러 교무실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차민훈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들이대며 서글서글하게 굴 때부터 알아봤지.
그때는 차정주의 눈에 든 내게 아는 척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더니.
연륜이 쌓인 중년의 교사가 고작 동아리 하나를 없애겠다고 이렇게까지 품을 들이는 건 분명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는 뜻일 테다.
분명 차진명의 소행이겠지. 정건후가 이야기를 꺼낸 순간 직감했다.
차진명이 우리 동아리의 행보를 몰랐을 리 없다. 중간고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 것도 그로서는 많이 참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지선일까지 합류한 걸 보고 나서 거슬리던 싹을 자르려고 하지 않았나 싶은데.
교정에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듣고 있는 귀가 있으니 내가 동료들을 데리고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나타난 정건후를 보고 당황하기는 했지만 차진명이 이런 식으로 손을 쓸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자취를 감췄던 차진명이 갑자기 복귀한 것도 자신의 눈과 귀로 세태를 파악하려 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차진명은 지금 커뮤니티를 어떻게 구동하고 있으려나.
차진명의 익명 커뮤니티는 불시에 사이트가 열리고 그조차도 특정 코드를 받아야만 회원 가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달라졌으나 내가 알고 있던 가입 조건은 자신의 비공개 스킬을 두 가지 이상 공개하는 것이었다.
커뮤니티 일원들은 굉장히 강압적이고 수직적인 분위기 속에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들은 익명으로 활동했으나 관리자는 필요에 따라 그들의 신원을 조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일원들은 영영 알지 못하는 사실 중 하나였다.
전생에서 커뮤니티의 관리자였던 강효서는 어느 누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지 파악하고 그 정보가 바깥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퍼져 나가는지 날마다 확인했다. 때때로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쥐고 휘두르는 건 예사였다.
그 커뮤니티에서 공희찬이 내쫓긴 건 한참 전의 일이고.
최근에 강효서와 사이가 틀어졌다던 서애란도 비슷한 경우려나.
서애란이 커뮤니티의 일원이었다는 건 지금으로써는 나의 추측일 뿐이었다.
물론 그 부분은 나중에 따로 확인해 보기는 해야겠지만.
동아리의 몸집이 점점 커지고 있는 이상 차진명은 관리자를 통해 자신의 커뮤니티 일원들을 주시할 거다. 그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 일은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까.
“이제야 내 도움이 필요해졌나 보네. 안색은 아까보다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고.”
어느새 팔짱을 끼운 채 내 모습을 관조하던 정건후가 툭 던지듯 말했다.
“졸업하기 전까지는 계속 어른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니까요. 학교에서 나서서 동아리를 없애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와중에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네요. 송구스럽지만 이번에도 선생님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내가 침묵하는 동안 따라서 고민하던 정건후가 한숨을 흩뜨렸다.
“이번 일을 뒤탈 없이 해결하려면 어째서 이런 화두가 시작되었는지부터 알아야겠지.”
정건후는 이때까지 정보 공유 목적의 동아리가 없는 이유를 간단히 설파했다.
그의 말을 굳이 새겨듣지 않아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헌터 사회에서의 정보는 일종의 재산으로 기능한다.
그것을 얻고 되팔고 증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다.
“대외적으로는 모여서 훈련하는 게 주된 목적이라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차민훈 선생이 분개하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제멋대로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여서 순진하게 던전 공략 얘기만 나눌 리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정건후는 내가 암묵적으로 행해지던 불문율을 깨뜨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다지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고.
도리어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면 서운할 뻔한 와중에 잘된 일이다.
“그래도 적어도 난 너와 동아리 일원들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한참 전에 네가 나한테 검의 존재를 얘기했을 때부터 너와 너희 조원들을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졸업시킬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었고.”
뒤탈 없이 처리하려면 정건후의 도움을 빌려야 하겠지만 수확은 분명하지 않은가.
“따로 연락하는 대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어. 동아리가 폐지되는 일은 없을 테니 너희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 해결되는 대로 다시 알려 줄 테니까.”
나는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그의 모든 말을 곡해 없이 듣고자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차례 숨을 게운 그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정건후 또한 무사히 내 편이 되었다.
다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한층 명확해졌다.
머지않아 벌어질 재난에서 그가 죽지 않는 미래를 설계하는 것.
뭘 준비해 놨든 공략하면 그만이다.
* * *
며칠 뒤 정건후의 선에서 일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탈이 있는 듯했으나 그는 달리 내색하지 않았다.
또 다른 소식은 중간고사 성적표가 배부되면서 접할 수 있었다.
“이번 전교 1등 차진명이라며?”
“굳이 떠날 땐 언제고. 아무튼,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뭐라도 보여 주고 싶었나 봐.”
“서애란은 이번에 성적 제대로 떨어졌다며. 그냥 나락 찍었다던데.”
“엥, 진짜? 걔 이번에 공부 열심히 안 했대?”
서애란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을까?
나는 설연호의 교실 맞은편 복도에 등허리를 기댄 채 오가는 이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것도 차진명의 짓일 텐데…….
차민훈을 움직이는 건 그렇다고 쳐도. 서애란까지 건드린 게 차진명이라면 학교 사정에 얼마나 개입한 거지?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던 나는 자연스레 차정주를 떠올렸다.
그는 명분만 이사장이지 사실상 학교 운영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만약 차진명이 그 빈틈을 노렸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앞으로의 차진명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까.
과거 이맘때의 차진명은 유학을 빌미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 시절의 차진명이 어떠했는지는 강효서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지금의 차진명이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예정보다 일찍 발생시킬 생각이라면 그가 가장 먼저 취할 조치는 무엇일까.
기말고사가 점점 다가오는 이 시점의 차진명이라면 2학기 현장 실습을 노릴 것이다.
머지않아 리호 길드와의 결탁 관계를 끊고 성문 길드와 협조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예측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설연호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침 맞은편에서 설연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나 보러 온 것 맞지?”
나는 설연호를 향해 손을 가벼이 흔드는 채로 수긍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잠깐 시간 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