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예지력으로 (2)
“물론이지.”
설연호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복도 너머를 가리켰다.
그의 보폭에 맞춰 걷다가 다다른 곳은 인적이 드문 오른쪽 계단이었다.
다음 층에 다다르기까지 절반쯤 앞두었을 즈음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한낮의 볕이 두어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설연호의 눈동자를 투과하고 있었다.
나는 정건후의 것과 비슷한 질감의 신뢰를 덧입은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설연호는 언제나처럼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재촉하는 대신 차분하게 기다렸다.
“기억나? 1학기 현장 실습 마치고 던전에서 나와서 내가 선배를 다시 찾아갔던 날.”
잠시 기억을 되감는 듯 엷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배회하다 멈추었다.
“기억나. 그때 네가 앞으로 닥쳐올 재난을 막아 보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
“불가항력에 맞서는 예지력으로.”
내가 순순히 호응하자 뒤이어 설연호가 장난스레 덧붙이고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맞서려면 매 순간 새로운 수를 설계해야 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배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이번에도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이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특히 설연호에게 부탁하고 나면 어쩌면 그가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뭘 하면 될까.”
진중한 태도로 주위를 꼼꼼하게 살핀 설연호가 말했다.
“예측대로라면 2학기 현장 실습부터는 현장 실습용 던전을 제공하는 길드가 바뀔 것 같아. 관련해서 리호 길드 내부에서 돌고 있는 얘기가 있는지 알아봐 줘. 학교에서 건수를 잡으려면 1학기에 우리 조에서 있었던 일이 빌미가 될 것 같거든.”
잠자코 새겨듣던 설연호는 모호한 표정을 짓다가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야, 들었어? 서애란 오늘도 사고 쳤다며.”
“또? 이번에는 뭐 때문에 그랬는데?”
나는 식판에 가지런히 담긴 반찬을 젓가락으로 의미 없이 건드리던 것을 멈추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우연히 걸려든 대화의 소리를 증폭시켜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안 봐도 뻔해. 걔 강효서랑 사이 틀어진 다음부터 반 애들이 싹 다 무시 깐다며. 다들 강효서 눈치 오지게 보는 건 알았지만 이번에는 진심 장난 아니더라.”
선배도 아니고 동급생을 저렇게까지 의식할 정도라니.
애들을 무슨 쥐 잡듯이 잡고 있나 보네. 그것도 차진명 때문인가.
“그 전부터 서애란이랑 사이 안 좋았던 애들만 살판난 거지, 뭐. 서애란이 햇수로 오 년 동안 B급 입학생 없이 잠잠하던 학교에 기적처럼 나타난 B급 수재이니 뭐니 하면서 저들끼리 좋다고 물고 늘어지던 애들도 입 싹 닦았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루아침에 취급이 이렇게까지 달라진다고?”
맞는 말이었다. 헌터 아카데미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될 텐데.
보면 볼수록 요즘 애들 하는 짓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다들 지치지도 않나 봐.
좀 더 듣는다면 그대로 기가 쭉 빨릴 듯해 혀를 끌끌 차면서 스킬을 거두었다.
아예 헌터 아카데미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확실하게 짓밟으려는 건가.
너덜거릴 때까지 갈구려는 속셈이라면 저렇게 유치하게 구는 것도 이해는 되네.
무엇보다 이토록 사람을 교묘하게 짓누르고 압박하는 방식은 차진명의 솜씨가 분명하다.
“야, 들었냐? 서애란 3교시 끝나기도 전에 교실 박차고 나갔대.”
“그건 또 뭔 개소리냐. 서애란이? 진심?”
“이렇게까지 사람 말 못 믿는 새끼는 또 처음 보네. 진심이라고, 새끼야. 아침부터 고개 처박고 있다가 갑자기 책상 발로 까고 나갔대. 정신 나갔다는 말 돌던 거 진짜였나 봐.”
진짜겠냐. 헛소리 들리는 족족 믿는 새끼도 처음 본다, 나는.
별의별 낭설을 다 듣고 있으려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곧장 일어나 식기를 정돈한 뒤 식당을 나서면서 고개를 저었다.
근래에 벌어진 사태의 결과만 두고 본다면 서애란은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자신의 입지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강효서와 사이가 틀어진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그 귀하다는 B급 헌터마저도 학교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한 강효서에게 꼼짝없이 굴복하는 꼴이라니. 서애란을 지켜보던 이들에게 이보다 매끄럽고 달콤한 유희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이 모든 것이 차진명에 의해 ‘그렇게 보이도록’ 섬세하게 꾸린 한 편의 연극과도 진배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날마다 무대 아래의 서애란과 대화할 기회를 마련하려 했으나 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포기는 없다. 다시 서애란과 대화할 수 있는 빌미를 구상하면 되니까.
이어 교실에 잠시 들렀다가 양치까지 마친 뒤 도서관으로 향하는 구름다리를 건넜다.
* * *
“도해월이 만든 동아리 없어질 수도 있대.”
역사 서적을 배치한 책장 사이를 거닐며 책등에 적힌 활자를 훑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기척 없이 몸을 틀어 등을 기댄 뒤 눈을 감자 근처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한층 선명해졌다.
“걔가 만든 동아리가 뭔데? 근데 동아리는 또 언제 만들었대?”
아, 다른 사람들도 다 쟤처럼 남의 일에 무감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들어 무관심, 외면, 무시 같은 단어가 얼마나 산뜻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아, 좀!”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답답하게 여기던 누군가가 부지런하게 말을 이었다.
“지난 학기 현장 실습 조원들 데리고 동아리 만들었잖아. 그거 보고 강효서 선배 따라 하는 거냐고 말 되게 많이 돌았어.”
그래? 제발 내 얘기는 면전에 대고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몰랐네……. 그래서 언제 없어지는데?”
“나야 모르지? 그냥 애들이 그렇게 말하더라.”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하지 않지만 내 동아리는 없어지지 않을 거야.
굳이 소리 내어 말하는 것조차 귀찮은 나머지 속으로만 생각하고 책등을 마저 살폈다.
지난번에 봤던 책 내용에 따르면 성물과 오래된 예언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봤던 책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활자를 좀 더 선명하게 보고자 눈을 가느다랗게 뜬 나는 ‘성물의 역사’라는 제목을 찾고자 책등을 검지로 천천히 훑었다. 그렇게 몇 칸의 책장을 살폈는지 가물해질 무렵 내가 찾던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찾았다.”
낮게 읊조리며 책을 끄집어내려는 순간 오랫동안 묻혀 있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 * *
“씨발, 존나 징글징글한 새끼. 그렇게 처맞고도 찍소리도 안 내는 것 봐.”
퉁퉁 붓다 못해 핏물까지 비치는 시야를 다잡고자 잘 감기지 않는 눈을 깜빡였다.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드러눕고 보니 가파른 숨과 함께 가슴팍이 들먹거렸다.
한데 얽힌 여러 발소리까지 멀어지자 어느새 쇳소리만 귓가에 선명해지고 말았다.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을 만큼의 기운만 차린 나는 훌쩍 일어나 얼굴을 씻었다.
이런 날에는 문제혁이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기숙사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기점으로 문제혁과의 사이는 틀어진 지 오래였다.
문제혁은 내가 피떡이 돼서 들어오는 꼴을 보면서도 묵묵부답이었다.
분명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같았지만 끝내 시선이 향하는 곳은 창밖이었다.
그 너머로 영영 그치지 않는 눈을, 눈보라에 휩싸이던 그날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향한 곳은 어김없이 도서관이었다. 그곳은 쿰쿰한 화장실 냄새를 풍기며 들어서는 나를 받아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기숙사 통금까지 두어 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
그나마 인적이 드문 역사서 책장을 배회하던 나는 책을 집히는 대로 뽑아냈다.
그런 다음 바닥에 퍼더앉고서 쌓인 것들을 하나씩 펼쳐 고개를 파묻고 들여다보았다.
군데군데 모서리가 닳은 고서를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표지부터 잔뜩 해진 그 책은 펼치는 즉시 첫 장의 모서리가 부스러졌다.
넘기려 하면 손끝에 자잘한 조각이 묻어나는 그것을 참을성 있게 넘겨 보았다.
목차 부분은 이미 활자의 형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책을 놓지는 못했다.
나는 마른 낙엽처럼 파스락거리는 책장을 계속해서 넘겼다.
쉼 없이 오가던 내 눈길을 멎은 것은 ‘오래된 예언’이라고 적힌 대목이었다.
손끝으로 활자를 짓눌러 가며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예언은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를 섬기던 이집트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입속말에 가깝게 중얼거리며 낯선 이름을 곱씹었다.
“사람들은 여신의 이름을 붙인 검을 제단 위에 올리고 날마다 경건한 의식을 치렀다.”
내가 읽어 내리는 문장을 따라 머릿속에도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제사 의식을 진행할 때마다 아주 길고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죽은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부르는 일종의 장송곡이었으며…….”
그 순간 낡은 사진의 끄트머리부터 색이 날아가듯이 모서리에 환한 빛이 어렸다.
“노래는 세대를 대물림하여 구전되며 간소화되었으나……. 현재는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는 고개를 저어 가면서 시야를 다잡고자 애를 썼다.
멋대로 뒤엉키기 시작한 검은 활자들을 손끝으로 가볍게 누르며 의문을 표하는 순간.
연극의 막을 내리듯 커튼 자락 같은 어둠이 부드럽게 시야를 뒤덮었다.
* * *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로 돌아간 뒤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돌아서던 순간부터 내내 거세게 뛰던 심장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절뚝거리던 과거의 기억과 달리 기숙사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가면서 눈가를 찡그렸다.
마침내 닫힌 문 앞에 다다른 나는 숨을 고르면서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형, 이제 오는 거야?”
조심스레 들어서자 젖은 수건을 목에 걸치고 있던 문제혁이 나를 반겼다.
“너도 방금 들어왔나 보네.”
느린 몸짓으로 짐을 내려놓은 뒤 물끄러미 버티고 선 문제혁을 바라보았다.
어떤 빛도 깃들지 않았으나 또렷하고 선명한 눈동자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침묵을 담아내던 설연호의 눈과 달리 문제혁은 그 눈만으로 많은 것을 말하는 듯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나한테 할 말 있어?”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간 문제혁이 의자의 등받이를 끌었다.
“형, 서애란 선배가 누군지 알아?”
“그건 왜?”
느슨하게 당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문제혁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말했다.
“요새 어디를 가든 그 선배 얘기만 들려서. 난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안 좋은 얘기가 계속 들리니까 좀 불편하더라고.”
지잉―
지잉―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잠시만.”
문제혁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연이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 서애란이야] [내일 잠깐 보자] [너도 계속 나 찾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맞지?]차례로 떠오르는 활자를 읽고 있으니 한쪽 입꼬리가 미약하게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헐뜯는 말과 달리 생각보다 멀쩡한 상태인 듯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 누군데?”
“자꾸 엇갈렸던 사람이 좀 있어서. 마침 내일 보자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