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예지력으로 (3)
서애란이 소식을 전한 건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나는 소란스러운 인파를 가르며 9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층계참을 올라간 뒤 작은 광장처럼 트인 공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따금 찾던 화장실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본 곳은 화장실의 반대편이었다.
옛 필드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상태였다.
기척 하나 없이 고요한 나머지 주변이 휑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고 이전에 들어간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는데.
서애란은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아직 서애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는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웠다.
“가서 보면 알겠지.”
필드 입구로 가까이 다가가자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문이 의외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문간을 넘어서 목도한 풍경은 실로 낯선 것이었다.
7층 필드랑 확실히 다르네.
현시점에서 사용 중인 7층 필드는 온통 흰 빛깔로 칠해져 있었다. 반면 이곳은 그와 상반되도록 검은 바탕이 공간을 이루고 있는 채였다.
관련 장비까지 모조리 비우고 오로지 공간만 남은 이곳을 밝힌 건 천장의 작은 조명들이었다. 한없이 높다란 천장에서 낮은 조도의 불빛이 쏟아져 만든 길을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앙까지 다다르니 이전의 흔적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없는 광활한 연극 무대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며 서애란을 찾아보았으나 그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문스럽게 턱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약속한 시간이 넘어서 있었다.
“7층 필드가 개방한 뒤로 다시 온 건 처음이지?”
그 순간 누군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어디선가 나를 내려다보며 뱉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고 9.5층에 있을 통제실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나 여기 있으니까 올라와.”
대체 저기까지는 또 어떻게 올라간 거야?
절로 미간을 좁히면서 걸음을 틀어 서애란이 있을 통제실로 올라갔다.
* * *
몇 년 동안 방치된 탓인지 모서리가 녹슨 철제문 또한 손쉽게 열렸다.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자 필드에 비해 한층 아늑하게 꾸려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 통제 시스템 앞에 선 서애란은 나를 등지고 서서 필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운 채 작은 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돌아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봐?”
그렇게 묻는 말에도 서애란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로서는 황당한 응대인 나머지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7층 필드가 새로 지어진 건 여기서 생긴 사고 때문이었어. 이건 알고 있지?”
한참 전에 공희찬이 강효서에게 나에 대해서 떠들어 댄 것 같던데.
대체 뭐라고 했길래 서애란도 나를 뭣도 모르는 저학년처럼 대하는 거지?
“물론.”
“그럼 그날 저녁에 필드에 들어갔다던 다섯 명이 누군지도 알겠네?”
방금까지 어제 입학한 신입생 취급하더니. 이건 또 무슨 전개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서애란이 돌아볼 걸 예상하며 어깨나 들먹였다.
이윽고 서애란이 나를 돌아보았다. 길게 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렸다.
마주 바라본 서애란의 얼굴은 예상했던 대로 멀끔하기만 했다.
교내에 도는 말도 안 되는 소문 따위에 개의치 않는다는 방증이겠지.
이전 생에서도 행적을 전해 듣기만 했지 서애란의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특유의 커다랗고 날카로운 눈매와 새카만 눈동자가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사람이 묻는데 왜 대답이 없어?”
나긋하지만 확언을 바라는 어조에 힘이 실려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현혹될 수 있을 만큼의 미성에 눈살을 찌푸렸다.
서애란의 핵심 스킬이 언령이라고 했었지.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가.
이쯤에서 강효서와의 차이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했다. 강효서는 겉으로는 차진명에게 기세로 밀리지 않는 듯했으나 둘 사이는 철저한 수직 관계였다.
서애란이 어땠는지는 그녀의 몸가짐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강효서와 달리 차진명과 동등한 선상에 자리한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분명 그러했을 테지.
“처음부터 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 놓은 질문 같던데. 속임수에 말려들 생각은 없어서.”
내 대답을 듣고도 잠자코 들여다보기만 하던 서애란이 조소를 터뜨렸다.
오늘 서애란이 나를 부른 건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뭔가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지 않나.
어떻게 보면 공희찬과 비슷한 듯했으나 그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말 몰라?”
그녀는 그렇게만 읊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서 뭔가를 더 알고 있지 않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필드에서 훈련하다 보면 스탯이나 스킬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며. 그러다 생긴 사고였다고 들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간신히 눌러 삼키면서 서애란을 바라보았다.
“한참 지난 일을 나한테 얘기하는 걸 보면 그 사고에 너도 책임이 있나 봐?”
본질을 콕 집어 이야기하자 서애란이 움찔거렸다.
“차진명, 강효서, 성민주, 이유나, 그리고 서애란. 그날 밤 필드에 들어간 건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지?”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차진명과 강효서 그리고 성민주까지였다.
그날 이후 학교를 떠나야 했던 이유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더 많았다.
나는 오랜만에 듣는 성민주의 이름을 곱씹으면서 전생의 그녀가 어땠는지 떠올렸다.
성민주는 차진명과 함께 유학길에 오른 그의 친우였다. 전생에서 그녀는 이능청 소속 헌터로 분하며 차진명의 수족처럼 움직이던 강효서와 달리 성민주는 한국마력연구소의 주축이 되어 활동했다.
당장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니 자세한 건 나중에 더 알아보면 될 듯하다.
서애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예전과 달리 걸리는 지점이 한 가지 있었다.
“작년에 있었던 사고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얘기해.”
“너랑 다른 사람들이 정말 뭔가를 얻고 싶어서 거기 들어갔다는 게 사실이야?”
차진명은 절대로 그런 소문을 믿고 들어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다른 무언가를 얻고자 의도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렸다면 몰라도.
툭 내뱉은 내 말을 듣던 서애란은 고개를 틀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날 사고 현장에 있던 다섯 명의 이름을 나란히 호명한 일이 예상치 못한 타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여기까지 날 불러낸 걸 보면 도움도 청하고 싶고 그런 김에 네가 가진 사연도 털어놓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거라면 네가 가진 패부터 꺼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끝으로 아랫입술을 잘근대던 서애란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말을 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자세를 고쳐 섰다.
“그래. 그날 우리가 필드에 들어간 건 순전히 이유나 때문이었어.”
그럼 그렇지. 다른 뭔가를 덮으려고 의도적으로 퍼뜨린 거짓말이었구나.
“차진명 선배는 시시한 걸 싫어해. 그때랑 비슷한 종류의 사고가 다시 생기는 일 같은 건 없겠지.”
커다란 기계에 등허리를 기대어 선 서애란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숙고하고 있을 거야. 애들이 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게 만든 다음 그걸 지켜보면서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테고.”
끝내 고심해서 설계한 수가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 죽게 만드는 거였나.
겸사겸사 내내 거슬리던 정건후도 함께 죽여 버리는 것까지 의도된 것이었다면.
두 가정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차진명은 멸절의 설산에 S급 마석을 심어 두고 던전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실험으로 진행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실험의 최종 목적이 뭐지? 진짜로 세계 멸망이라도 꿈꾸는 것인가.
난 도대체 어떤 인간한테 온 생을 걸면서 충성을 바친 거지?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물게 되자 단단히 말린 주먹에도 힘이 더해졌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고 손등의 핏대가 두드러지다 못해 움찔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짓을 꾸밀지는 나도 몰라. 뭐가 됐든 필드에서 모의 던전 테스트를 구동해 놓고 그 안에서 고의로 사고를 만드는 것보다는 큰 규모로 움직이겠지.”
단순히 규모만 커지는 수준이 아니다.
차진명은 지금 도시 전체를 뒤엎을 재난을 계획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서애란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차진명 선배가 그런 사고를 꾸민 건 순전히 나 때문이었어. 그 밤에 이유나를 데리고 필드에 들어가자고 말한 것도 선배였고. 내가 친 사고를 대신 덮어 주려고 했거든.”
뜸을 들이던 이전과 달리 서애란은 돌파구를 찾은 사람처럼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막상 이렇게 되니까 알겠어. 날마다 절벽 낭떠러지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심정이 도대체 어떤 건지. 그리고 내가 이유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담담하게 읊조리는 서애란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있었으나 어떤 식으로도 양심의 결여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숨결 또한 편안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소란한 속내는 한가득 쌓인 눈 더미에 묻은 뒤 고요를 되찾은 사람처럼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서애란에게 감쪽같이 속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눈길을 낮추었다.
아래로 향하던 눈동자는 어느덧 툭 떨군 그녀의 주먹에서 멎었다.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시선을 두고 있으니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이런 모습은 꼭…….
“강효서 선배랑 대판 싸우고 혼자 남게 됐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때 그 사고의 기억이었어. 지금도 혼자 남을 때마다 그날 밤의 일이 계속 생각나.”
아마 그렇겠지.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사람의 얼굴을 지우는 건 쉽지 않으니까.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서애란도 차진명이 꾸민 짓을 방관하고 함묵했던 일로 괴로워하는 듯했다. 그런 심정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버려질 줄 알았다면 그 개새끼가 하는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거였는데. 그걸 생각할 때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 이러다 사람들이 떠드는 대로 미쳐 버리면 어떡하나 싶어.”
말과 달리 목소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무던했다. 실로 기이한 모순이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서애란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한쪽 입꼬리로 호선을 그렸다.
“내가 참고 버텼던 만큼 세게 한 방 먹이고 싶은데. 가능할까?”
내가 뭐라고 반응할 줄 알고 이렇게 투명하게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차진명에게 복수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반응을 신중히 해야 했다.
고개를 반대로 틀고 헛숨을 게운 나는 곁눈으로 서애란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던 것이 어느새 육안으로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경련하고 있었다.
지금 이런 모습은 꼭, 그러니까…….
멸망하기 직전 차진명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를 보는 것 같네.
서애란과 맞닥뜨린 이후로 계속해서 헛웃음이 입술 틈을 비집던 것도 그래서였나.
놀라울 만큼 과거의 나와 닮은 그 모습에 기시감이 느껴져서?
맞은편에 서서 한참 동안 대답이 없으니 서애란이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순전히 복수만 하고 싶었다면 너를 여기까지 부르지 않았을 거야.”
현시점에서 서애란의 부모는 B급 헌터로서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든 환영받는 이들이니 그녀가 원하는 조치도 취할 수 있겠지.
“언젠가부터 틈만 나면 여기까지 올라오게 돼. 계속 이 자리에 서서 필드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해. 날마다 질리도록.”
거기까지 말한 서애란이 느릿하게 고개를 틀고 작은 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고통받던 이유나를. 옆에서 방관하던 나를. 사고를 일으킨 차진명을.”
조용히 이야기할 장소를 찾는다는 이유로 매번 9층 화장실로 향하던 나도 서애란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이것마저 닮을 줄이야. 끝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까지 이렇게.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이상하게 생전 느껴 본 적 없던 불길한 예감이 자꾸 고개를 들더라고. 그때부터 계속 여기로 올라왔어. 내내 외면하고 살았던 걸 더는 무시하고 싶지 않아졌거든.”
여기서부터 서애란과 나의 명확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이전 생의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그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될까 두려워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멋대로 외면해 버린 것의 대가는 세계의 멸망이었지.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사죄하고 싶어. 이유나한테.”
서애란은 나와 닮았으면서도 나보다 한 걸음 더 앞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이번 생의 나도 과거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나를 불러내고 이런 이야기까지 할 마음을 먹었다는 건 차진명도 이미 내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전부 알고 있지 않았다면 서애란도 자신의 패를 꺼내지 않았을 테다.
“그게 네 소원이라면 내가 도와줄게. 지금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나도 너랑 비슷한 생각이거든. 차진명을 공격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죄하고 싶다는 것까지.”
상대가 먼저 패를 보였으니 그 답으로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보여 줘야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서애란도 내 의중을 이해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따지고 보면 서애란은 공희찬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도를 가진 패였다.
언제라도 서애란이 차진명에게 돌아갈 가능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 가능성을 예지하고 그것과 다른 미래로 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내 목표다.
그러므로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서 죽어야 했던 서애란을 살리고 그 미래를 함께 볼 수 있다면 내 편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너도 우리 동아리에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