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5
55화. 설득과 포용 (1)
“야, 그거 들었냐? 서애란, 걔 도해월이 만든 동아리 들어갔대.”
“그 동아리 안 없어졌어? 차민훈이 지랄했다던데.”
요즈음 복도를 거닐 때마다 비슷한 논지의 대화가 귓가를 울렸다.
한동안 서애란의 이름만 언급되더니 이제 내 이름까지 거론되는 중이었다.
“민훈이는 또 왜? 그 새끼 또 교실 돌면서 설교했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대화를 듣다 보면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지칭할 때 이름 두 글자를 사용하여 낮잡아 불렀다.
“그렇지 뭐. 걔 수업마다 개지랄 떠는 거 하루 이틀 일 아니긴 한데, 이번에는 좀 심했나 봐. 서애란네 반에 가서는 그딴 식으로 얼 빼놓고 있을 거면 자퇴해 버리라고 했다던데.”
“와, 진심? 이번에는 진짜 큰 건 했네. 민훈이 새끼 벌써 노망난 거 아니냐?”
지금처럼 날것으로 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문득 움찔할 때가 있었다.
믈론 차민훈이 욕을 처먹든 뭘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었고, 과거의 내가 이따금 떠올랐다.
전생의 부대원들도 뒤에서 내 이름을 저렇게 불렀을까…….
순간 멸망 직전에 부대원들이 나타났던 기억이 떠올랐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이런 순간일수록 현재에 충실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대화에 마저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도해월이 서애란을 받아 준 건 걔도 똑같이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래.”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문제일까. 정신 문제? 돈 문제?
“아, 그건 나도 들었어. 도해월 걔, 계속 D급만 찍히고 거기서도 하위권이었던 애가 6학년이나 돼서 갑자기 C급 나온 게 뭐 이상한 거 먹어서 그런 거라며? 뭐였지? 어제 들었는데.”
“불법 마석 가공물. 그게 어떤 건지 나도 정확히 모르는데 업자들한테 들어가야 하는 마석을 빼돌려서 불법으로 가공한 거래.”
날마다 나와 서애란에 대해 갱신되는 소문은 하나같이 허무맹랑했다.
요새는 단순한 낭설에서 벗어나 괴상망측한 음모를 퍼뜨리는 수준이었다.
듣고 있으면 헛웃음이 절로 나왔으나 나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지금 떠도는 가정을 사실이나 다름없게 만들겠다는 차진명의 경고였다.
과거의 나였다면 공포스러운 마음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벌벌 떨었을 것이다.
지금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기에 차분하게 맞설 방법을 궁리할 뿐이었다.
어깨를 가벼이 들먹이며 고개를 틀자 멀리서 설연호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와 늘 만나던 복도 구석에 자리하던 나는 증폭 스킬을 거두고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네.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 그가 살갑게 인사하며 맞은편에 멈춰 섰다.
“방금 왔어. 할 말 있다며.”
그 말에 잠시 허공을 보던 설연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이번 학기 현장 실습부터는 더는 리호 길드에서 실습용 던전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결탁 관계는 저번 학기가 마지막이었던 걸로 한다면서.”
나는 절로 두통이 이는 듯해 손등으로 눈썹뼈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이것도 리호 쪽에서는 너무 갑작스러운 결정이라 당황스러웠나 봐. 이유를 물어보니까 지난 학기 현장 실습에서 생긴 일 때문이라고 했대.”
설연호는 언제가 됐든 리호 길드와 자신을 구분해서 말하려고 했다. 실수로라도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건 그쪽에 마음이 기울지 않은 상태라는 거겠지. 나로서는 달가운 일이었다.
“그때 그 일은 분명 잘 해결됐다고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파문을 가져올 줄이야.”
그건 나도 하고 싶은 말이었다.
당시에 벌어진 사건의 경중을 차치하고 이전의 생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영향력은 생각지 못한 곳까지 퍼져나갔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이번에는 내가 파문을 던질 차례다.
어떤 자갈을 골라서 던져야 차진명이 곤란해지게 될까.
단순히 곤란해지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차진명은 지금 수없이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죽을 만한 판을 설계하고 있으니.
내가 던지는 자갈은 그 판을 무너뜨릴 만큼 아주 단단하고 매끈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해월아.”
한숨을 간신히 삼키던 설연호가 나를 불렀다.
대답하는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자 말을 마저 이었다.
“조만간 미솔이랑 따로 만나서 얘기를 나눠 보는 건 어때.”
맞다. 요새 다른 얘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걸 잠깐 잊고 있었네.
“너도 알다시피 서애란이 동아리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부터 분위기가 좀 흉흉했잖아. 그럴 때마다 잡아 주던 게 보통 미솔이랑 나였는데 이번에는 좀…….”
나는 서애란이 동아리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동료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예상했던 것처럼 선뜻 반기는 대신 대부분의 이들이 은근한 적대감을 표했다.
특히 홍원하는 이때까지 강효서와 차진명 사이에서 어울렸던 사람을 들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공희찬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왜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잊은 거냐며 길길이 날뛰고 분개했다.
그런 순간이면 분위기를 중재하던 것이 7학년 맏이인 김미솔과 설연호였다. 이번에는 김미솔이 나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동아리 모임은 험악한 분위기로 이어지기 직전에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며칠 전에는 도서관에서 준희를 잠깐 마주쳐서 얘기 나눴거든. 그때는 가만히 있던 준희도 왜 서애란을 받아 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
거기까지 듣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긴 한숨을 흩뜨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한 생각이야. 희찬이나 선일이를 데려왔던 건 그렇다고 쳐도 이번 일은 너무 섣부르게 대처했다고 생각해.”
그게 그렇게 섣부른 대처였나.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더는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전날 기숙사에서도 문제혁이 같은 논조로 이야기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겠지.
“그래도 선일이는 다른 사람들만 잘 설득할 수 있다면 자기는 괜찮다고 했어. 그때도 분위기가 하도 험악해지니까 자기도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지선일의 의견까지 수렴한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애란을 선뜻 받아 주겠다고 결심한 건 그녀가 나와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나와 서애란의 사정이었다. 그 사정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동시에 서애란을 선택한 건 오랜 시간 지휘관으로 지내며 얻게 된 직감 때문이었다.
나는 차진명과 달리 판을 먼저 설계하고 그 위에 올라갈 장기 말을 고르지 않을 거다. 나와 같은 뜻을 가지고 판 위에 함께 올라갈 사람.
언제든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할 사람들을 충분히 모집하는 것이 먼저였다. 판을 설계하는 것도 그들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활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B급인 서애란은 선두에 달리면서도 전체적인 중심도 잡아 줄 수 있는 훌륭한 패가 될 것이다. 어쩌면 지선일 다음으로 나의 설계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우선 별관으로 가면서 마저 얘기하자.”
시간을 확인한 설연호가 먼저 층계참을 밟고 내려갔다.
“서애란은 다음 동아리 시간에나 올 수 있다고 했어.”
나는 그의 곁으로 걸음을 나란히 하며 덧붙였다.
“그럼 오늘은 계획했던 대로 지난번에 못 나눈 얘기부터 하면 되겠네.”
* * *
“서애란이랑 관련된 건 조금만 기다려 줘.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게 할 테니까. 오늘은 지난번에 다 못 나눴던 얘기부터 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신중한 어조로 되짚으며 회의용 테이블에 자리한 이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한숨을 쉬었으나 더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절반 이상이 완벽하게 납득할 수 있어야 할 거야. 그게 안 된다면 난 계속 반대할 거고.”
이윽고 김미솔이 말했다. 나는 선선히 수긍하면서 달력을 확인했다.
“나한테 일주일 정도만 시간을 주면 전부 해결할게. 그 뒤에도 내 의견을 따를 수 없다면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동의해.”
“그럼 우선은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잠깐 쉬었다가 할까?”
설연호의 말을 끝으로 짧은 쉬는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모였다.
이번 모임에서 새로운 정보를 가져온 건 지선일과 문제혁이었다.
문제혁에게 전해 듣기로는 두 사람이 중간에 합세해서 함께 정보를 찾았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다소 어색해 보이던 지선일과 문제혁이 조금은 가까워진 듯해 다행이었다.
“내가 먼저 얘기할게. 그래도 되지?”
지선일이 문제혁에게 허락을 구하자 금세 그렇게 하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번 사안은 좀 심각한 것 같아서 본론부터 얘기할게요. 이번 학기 현장 실습의 규칙이 모조리 바뀔 수도 있대요.”
“뭐? 갑자기 뭔 개소…….”
그 말에 공희찬이 무어라 입을 떼려고 하자 지선일이 손을 내저으며 저지했다.
“갑자기 하는 개소리 아니니까 전부 듣고 얘기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앓는 소리를 내던 공희찬은 입술을 비죽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현장 실습 과목을 맡았던 정건후 선생님 대신 다른 선생님이 담당자로 교체될 수 있다고 했어요.”
거기까지 듣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거 진심이야? 요새 학교에 뜬구름 잡는 소문이 너무 많던데. 그렇게 도는 소문 중에 자극적인 걸 골라서 가져온 건 아니지? 확실한 정보여야 해.”
덩달아 놀란 김미솔이 다급하게 묻자 지선일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이건 그 소문들이랑 완전히 별개예요. 어쩌면 이걸 덮기 위해서 그런 소문들이 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문제혁이랑 같이 알아본 거고요.”
그렇게 말하던 지선일의 눈길이 나에게 잠시 향하는 듯했다.
“정건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있는 유일한 S급 헌터야. 부상 때문에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다들 봐서 알다시피 언제라도 복귀할 수 있을 만큼 저력이 강한 사람이기도 해.”
잠자코 들으며 고심하던 내가 말문을 열었다.
“학교에서 유일할 뿐이겠어? 선생님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S급 헌터야. 그런 사람이니까 다른 선생님들 도움 없이 혼자서 현장 실습을 전부 감당하셨겠지. 그런데 갑자기 담당을 바꾼다고?”
홍원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흥분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미솔이 저지하면서 말을 보탰다.
“선생님이 학교에 오시기 전에 부길드장으로 지내시던 길드도 아직 있잖아. 그 이름이 뭐였지? 되게 특이했던 것 같은데.”
김미솔의 손길에 금세 진정한 홍원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취우 길드. 부길드장이 S급인데 길드장은 A급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한동안 말이 되게 많이 돌았었잖아. 그나마 선생님 은퇴하시고 나서 좀 잠잠해졌고.”
거기까지 듣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제혁에게 눈길을 틀었다.
“규칙이 어떻게 바뀌는 건지도 알아냈어?”
침묵을 유지하며 이따금 아랫입술을 달싹이던 문제혁이 이어서 말했다.
“정건후 선생님은 지금까지 제비뽑기를 고수했다고 들었어. 그 방식으로 조장부터 뽑고, 조원들도 뽑았다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조장을 직접 지정할 거래. 그렇게 선발된 조장이 조원들을 직접 포섭해야 하고.”
지금으로써는 소문에 불과한 정도였으나 이것 또한 차진명의 술수일 것이다.
차진명의 소문은 안개처럼 떠돈다. 눈앞에서 희부옇게 떠도는 말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건 쉽지 않다. 축축하고 눅진한 그것이 살갗에도 달라붙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그 자욱하던 소문을 하나하나 헤집고 넘어갔다. 비현실적이라는 가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희망을 가졌다.
이전 생의 내가 필드에서의 훈련 횟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린 것도 9층 필드에서 사고가 난 다음부터였다. 그곳에서 벌어진 사고로 당시 5학년이었던 이유나가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필드에 찾아갔다.
잘만 하면 그곳에서 정말 뭔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나는 그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라고 나 자신을 속이는 일에 열중하는 건 덤이었다.
어쩌면 나는 차진명이 놓은 덫에 스스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더 깊어지려던 상념을 깨뜨린 건 내내 잠잠하던 공희찬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얘기해도 되지? 웬만한 얘기는 다 들은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