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6
56화. 설득과 포용 (2)
공희찬 특유의 건들거리는 어조를 따라 모두의 이목이 같은 방향을 향했다.
“갑자기 그렇게 쳐다보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네.”
공희찬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즐기는 건지 어깨를 과장되게 들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본론부터 얘기하세요…….”
유일하게 눈길을 비스듬하게 두었던 강준희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또 욱하려는 걸 팔을 내밀어 저지하자 공희찬이 씩씩거렸다.
“근데 이 새끼가 진짜. 아, 알았다고. 여기서 안 싸운다고.”
이제는 내가 아닌 지선일을 의식하던 공희찬이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 학기부터 현장 실습을 주관하는 외부 길드가 바뀔 수도 있대. 리호 길드에서 성문 길드로.”
지난 실습에서 뜻하지 않게 물 속성 던전에 떠밀리듯 들어간 게 그렇게 분했나. 이를 갈고 알아봤나 보네.
모쪼록 나로서는 예상하고 있던 소식이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설연호의 눈치를 보느라 대답을 유예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얘기하려고 했어. 내 눈치는 안 봐도 돼.”
그렇게 말하는 설연호의 어조는 나긋했으나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설연호는 여느 때와 비슷했으나 어딘가 미묘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소식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설연호가 분명 곤란해질 텐데.
사람들의 관심을 반대로 돌리면서 지금 상황을 전복할 수를 생각해 볼까.
“설연호 선배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소문을 언급한 이상 학생들 사이에 어느 정도 퍼져 있다고 생각해야겠네요. 당분간 곤란할 수도 있겠어요.”
팔짱을 끼운 채 정면을 응시하던 지선일이 느릿한 태로 설연호를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에게도 쓸 만한 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진명이 소문을 퍼뜨리는 건 주로 자신이 세운 가설에 대한 반응을 확인할 때다.
개울에 미꾸라지를 풀어놓듯이 작은 화두를 던져 놓으면 사람들은 금세 소란해진다.
그런 다음 잠시 덮어 두고 기다리면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퍼진 가설은 어느새 정설처럼 통용된다.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현혹되기 마련이고.
마침 내게도 쓸 만한 미꾸라지가 하나 있다.
“공희찬 선배, 예전에 선배가 그랬지? 그 왜…….”
내가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이자 공희찬의 눈동자가 쉼 없이 배회한다.
녀석이 내게 떠들어댄 것이 워낙 많은 탓에 혼란스러워지는 것일 테지.
“뭔데? 선배가 뭐라고 했길래 뜸을 들여?”
텀블러를 내려놓고 입가에 남은 물기를 정리하던 홍원하가 말했다.
“방금 기억났어. 거의 2년 동안 자리를 비운 차진명 선배가 유학을 다녀온 게 아닐 수도 있다며.”
“뭐, 뭐? 야, 내가 언제 그딴 소리를…….”
눈에 띄게 당황하던 공희찬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거론한 탓인지 모두가 나와 공희찬을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크흠, 그랬지. 내가 그렇게 얘기했었지. 아, 워낙 특급 정보라 여기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공희찬은 자신의 체면을 목숨만큼 중시하는 사람이다. 어째서 그가 뒷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떠들어 대는 건 그 순간 자신의 체면을 치켜세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 맞아. 차진명, 걔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 외국으로 떴네, 어쩌네 하는 개소리만 존나 돌았는데 그거 사실 아니야. 참고로 이건 소문 아니고 내가 알아낸 사실이다?”
금세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듯이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 확언으로 인해 장내의 분위기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게 진짜라고? 여기 말고 외국에 있는 다른 교육 기관에서 공부하고 온다고 했었잖아. 그럼 어디 갔다 왔던 건데?”
“그러니까. 멀쩡하게 잘 다니던 학교를 왜 갑자기 떠나나 했어. 그것도 이사장 아들이.”
“이사장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몰라. 난 그때도 S급 헌터인 자기 아버지 두고 어디 가나 했다니까. 근데 유학 간 게 아니었다고?”
각기 다른 의문이 담긴 목소리가 한데 중첩되며 울리기 시작했다.
저마다 곁에 있는 이들과 대화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소란으로 불거졌다.
이전까지 언급한 적 없는 차진명의 이름을 호명해서였을까.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이야기를 아는 대로 나누는 것이 들렸다.
나는 풀어 놓은 미꾸라지가 삽시에 온 사방을 훑고 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수가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게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
시간이 좀 더 지나간 뒤 모임이 끝날 때까지 차진명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둘 혹은 셋씩 모여서 떠드는 채로 자리를 비우자 내부가 비로소 잠잠해졌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적막한 가운데 사용한 물건들을 정리하던 내 뒤에서 김미솔이 말했다.
“그래. 와서 앉아.”
아직 열려 있던 동아리 교실의 문을 닫은 김미솔은 의자 등받이를 당겨 착석했다.
“본론부터 얘기할게. 대체 서애란은 왜 데려오려고 하는 거야? 네가 우리한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건 처음이라 솔직히 당황스러워.”
마지막으로 칠판을 말끔하게 지운 나는 지우개를 내려놓으며 돌아섰다.
“혹시 서애란이 알게 모르게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말해 줄게. 그리고 너도 강효서 싫어하는 것 아니었어? 지금은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야.”
나는 손 하나를 허리춤에 짚은 채 조곤조곤 읊조리듯 얘기하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알고 있어. 강효서 선배는 나도 싫어해.”
간결하게 대꾸하자 김미솔은 고개를 반쯤 숙였다. 이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길게 짚으며 탄식했다.
“해월아, 내가 지금 그것만 묻는 게 아니잖아.”
고개를 두어 번 젓고서 자세를 바르게 한 김미솔이 이어서 말했다.
“혹시 서애란을 데려오려는 이유가 너한테 다른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네 말대로 우리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해. 다른 애들은 네가 먼저 얘기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것 같기는 한데, 난 더는 못 기다리겠어.”
다른 계획이라. 내가 처음부터 세우고 있던 계획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지금의 내 계획은 용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 내는 것이다.
그리고 수를 내다볼 때마다 결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실감한다.
오래된 예언에 관한 건 앞으로도 혼자서 알아봐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김미솔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동료들의 도움이 필요해진 시점이었다.
“선배도 아까 지선일이랑 문제혁이 가져온 정보를 공유할 때부터 짐작했을 거라고 생각해. 이대로 현장 실습의 규칙이 바뀐다면 정건후 선생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차민훈 선생님이 되겠지.”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어. 그 선생님이 교사들 사이의 주도권을 꽉 잡고 있기도 하고, 정건후 선생님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니까.”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이어서 내보일 말을 골랐다.
“헌터 아카데미가 개교할 때부터 지금까지 실습용 던전을 제공하던 리호 길드와의 결탁이 끊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봤어?”
그렇게 묻자 김미솔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배도 졸업 학년이고, 방학 동안 길드들과 미팅도 해 봤을 테니 외부 길드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그게 아니라고 해도 성문 길드에 대한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선배 정도면 알고 있었지 싶은데.”
성문 길드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건 용산 던전 브레이크 이후다. 그와 별개로 그곳은 오래전부터 부정적인 소문이 자주 돌았던 길드 중 하나였다.
정부의 관리하에 있으나 사실상 방치된 던전을 마구잡이로 공략하며 마석을 대량 취득한다든가, 높은 등급의 마석을 업자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길드 내에서 보관하고 있다든가, 하는 소문은 일부의 학생들도 알고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차진명의 커뮤니티를 가입하기 위해서는 성문 길드를 거쳐야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나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 말은 곧 성문 길드가 현장 실습을 주관하게 됐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려. 하지만 그쪽에서 하는 건 실습용 던전을 제공하는 것뿐이잖아.”
“정말 실습용 던전만 제공하는 게 다였다면 계속해서 리호 길드와 결탁했겠지. 그게 가장 쉽고 안전하니까.”
계속해서 의아해하던 김미솔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알겠어. 해월이 넌 이번 학기 현장 실습에도 지난 학기에 우리가 겪었던 사고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맞아.”
“지난 실습에서 우리가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서애란처럼 등급 높은 헌터가 하나 정도는 있는 게 훨씬 안전할 것 같기는 한데……. 설마 서애란을 데려오려는 이유가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나는 허리춤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늘어뜨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애란이 나를 먼저 찾아왔었어. 음, 그때 나한테 했던 얘기들이 좀 개인적인 것들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선배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번 생에서 새롭게 포섭한 이들 중에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것이 김미솔이었다. 상명하복 관계였던 부대원들에게는 명령만 하면 되었으나 김미솔은 아니었다.
모처럼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설명해야 하는데.
“지금 서애란이 겪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연민이라도 느낀 거야? 걔가 당하는 일들을 보다가 안쓰러워져서 데려오고 싶은 거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서애란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가?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어쨌든 네가 걔를 우리 동아리까지 데려오겠다고 결심한 이유 정도는 있을 거잖아. 솔직하게 얘기해 줄래? 이렇게 반대하는 나도 마음이 썩 편하진 않거든.”
이런 상황에서 김미솔을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해서 고심해 보았으나 그럴듯하게 둘러댈 만한 것이 없었다.
“몇 주 동안 서애란이 겪게 된 일들이 과거의 내가 겪었던 거랑 비슷하다고 느꼈어.”
그 말을 들은 김미솔이 다문 입술을 길게 늘렸다.
그건 그녀가 신중하게 대답하고자 말을 고를 때마다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쩌면……. 선배 말대로 내가 서애란에게 연민을 가진 걸 수도 있겠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김미솔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서애란에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정하기 어려웠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추측한 것뿐이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네가 그런 감정을 느낄 때도 있다니 의외네.”
이내 한숨을 쏟아내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인 김미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연민까지 느꼈다는 건 둘 사이에 그만한 사정이 더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래도 난 강효서랑 어울렸던 애는 믿고 싶지 않거든?”
이윽고 등받이에 손을 얹으며 비스듬하게 선 자세로 마저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동아리에 데려오고 싶은 거면 서애란한테 확실하게 얘기해. 강효서랑 완전히 갈라질 것 아니면 들어올 생각 말라고.”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던 김미솔은 내 팔목을 쥐었다가 놓으면서 문간을 넘어섰다.
“서애란은 안 믿어도 너는 믿으니까 수락하는 거야. 다른 애들 생각은 어떨지 모르니 따로 만나서 얘기해 봐. 나중에 보자.”
* * *
김미솔을 배웅한 뒤 교실 정리를 마치고 내가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공부하던 문제혁의 맞은편에 앉으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왔어? 생각보다 늦었네.”
천천히 물건을 꺼내던 나를 문제혁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할 말 있어?”
“형도 피곤해 보이는 것 같은데. 괜찮아? 잠깐 나가서 걷고 오자.”
문제혁과 나는 숨을 돌릴 겸 운동장을 느린 속도로 배회하기 시작했다.
차츰 서늘해지는 밤바람을 따라 호흡을 게우고 있으니 문제혁이 먼저 말했다.
“형한테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어. 아까 동아리 시간에 말할까 했는데 이건 형한테 먼저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뭔데?”
나는 비가 내릴 것인지 눅진해진 바람결에 날리던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대꾸했다.
“이번 학기부터 실습 규칙이 바뀌면서 조장이 지정될 거라고 했던 말 기억하지. 그 조장도 이미 선발된 상태래.”
거기까지 전한 문제혁은 입술을 달싹이면서 고민하더니 숨을 크게 골랐다.
“그렇게 선발된 조장 중에 형 이름도 있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