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57
57화. 설득과 포용 (3)
어느새 기말고사 기간이 되었다. 지난 시험과 달리 문제혁은 적응을 마친 듯했다.
공부는 여전히 어려워했으나 얼굴을 뒤덮었던 그늘이 한결 옅어진 것이 느껴졌다.
동아리를 없앨 거라며 딴지를 걸고 큰소리를 내던 차민훈도 잠잠해졌다.
일전에 부탁했던 대로 정건후가 손을 써 준 덕분이겠지. 잘 해결되어 다행이었다.
여름방학부터 소모임으로 시작한 동아리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어하던 이들도 하나둘씩 쓸 만한 정보를 가져왔다.
난이도가 가장 높은 과목들이 배정된 시험 둘째 날도 무사히 지나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과를 마친 내 목적지는 강준희가 있는 특별실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고요하기만 한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으니 밀린 피로가 몰려왔다.
닫혀 있는 특별실 앞에서 숨을 고른 나는 뒷목을 몇 번 주무르다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시험도 끝났는데 왜 여기 있어.”
평소와 달리 묘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묻자 강준희가 나를 돌아보았다.
창가와 마주 보게 놓인 책상에 걸터앉아 있다가 훌쩍 내려온 뒤 손짓했다.
“그래도 선생님들 퇴근하기 전까지는 여기 있는 게 편해서……. 시험은 잘 봤어? 지난 학기보다 더 어렵던데.”
“그럭저럭.”
활짝 열려 있던 창가로 다가간 나는 고개를 잠시 내밀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낮은 층수였으나 헌터 아카데미의 교정이 한눈에 담아 볼 수 있었다.
“여기 있으면 사람들이 뭐 하는지 다 보이거든……. 조용히 있으면 뭐라고 하는지 웬만한 건 다 들려.”
그 말을 듣고 잠시 동안 주변 소음을 듣기 위해 침묵했다.
그러자 오른쪽 벽면 너머로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3교시에 5학년……. 누구예요? 시험지가…… 것 같은데. 확인 좀…….”
좀 더 자세히 듣고 있으려니 교무실에서 나눌 법한 대화라는 걸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강준희는 매일 여기서 교무실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건가?
어떤 식으로 정보를 얻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그리고, 음, 그나저나 왜 보자고 했어? 혹시……. 그, 서애란 때문이야?”
나는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리다가 고개를 바르게 가누며 끄덕거렸다.
“지난번 동아리 모임 때 얘기했던 것처럼 서애란을 데려오고 싶어. 강준희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만나자고 한 거야.”
“그거야 뭐……. 이미 정해진 것 아닌가?”
“그게 무슨 의미야?”
창틀에 등허리를 기댄 채 강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준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아리장인 네가 추천하는 거니까……. 들어온다고 말했으니 다음 시간부터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설마 저게 전부인가? 그래도 둘이 있으니 무슨 생각인지 얘기할 줄 알았는데.
강준희에게 다른 의견이 있을까 싶어 기다려 보았으나 말끝을 흐린 뒤 계속 침묵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다른 사람들 의견까지 듣고 결정할 생각이었어. 네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어서 보자고 한 건데. 그게 전부야?”
강준희는 그 어떤 부정의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수긍했다. 말문을 맺고 난 뒤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부터 시선을 묘하게 어긋나게 두는 것 또한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것만 보면 평소의 강준희와 다를 게 없었으나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으나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오래된 예언이라는 거 있잖아. 거기서 뭐 더 찾은 거 있어?”
이미 지나간 얘기를 다시 묻는다고?
순간 의아했으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내다 보니 강준희는 자신이 의문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편이었다.
그 자리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기회를 노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내려 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일지도 몰랐다.
“그 얘기는 이미 한참 전에 정리된 것 같은데. 갑자기 왜 묻는 거야?”
공희찬이랑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뭔가 수상했어.
혹시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몰랐던 강준희의 성격인 걸까.
“응? 아, 그냥 물어본 거였어……. 지금까지 해월이 네가 여기저기서 정보를 많이 얻어 왔었잖아. 그런 너한테도 모르는 게 있다고 하니까 신기해서.”
하지만 공희찬을 대하던 것과 달리 나와 대화할 때는 달리 이상한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서애란이 동아리에 들어와도 괜찮은 거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면 뭐가 됐든 지금 말해.”
“물, 물론 괜찮아. 서애란처럼 B급인 애들은 얼마나 잘하는지 궁금했어. 같이 훈련하다 보면 배우는 것도 많아질 테니까…….”
혹여 내게 숨기는 게 있나 싶어 강준희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여느 때와 비슷했다.
이로써 동아리의 모든 구성원이 서애란이 들어오는 걸 수락했다. 김미솔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니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나마 염려했던 공희찬도 한숨이나 푹푹 내쉬더니 알아서 하라며 나를 돌려보냈다.
강준희까지도 동의했으니 서애란은 다음 동아리 시간부터 합류하게 될 터였다.
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문제혁이었다.
“그럼 가 볼게. 다음 동아리 모임 때 보자.”
* * *
강효서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고개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이유 없이 긴장한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 갔다.
눈길을 지면으로 떨어뜨린 채 화장실 타일 사이의 줄눈을 헤아렸다.
그 앞에 서서 작은 창 너머를 내다보는 차진명은 내내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삼십 분을 우뚝 서 있기만 했을까.
간신히 숨을 터뜨리며 심호흡을 한 강효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차진명이 눈길을 반쯤 틀면서 기척이 이는 곳을 돌아보았다.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아직도 갈피를 못 잡은 건가? 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는지 알아보라고 얘기한 지 한참 되지 않았나 싶은데.”
느릿하게 턱을 반쯤 치켜들던 차진명이 말을 맺으면서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머지않아 주머니에 꽂았던 손을 빼낸 뒤 강효서가 서 있던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거리를 조금씩 좁힐 때마다 강효서의 곧은 어깨가 알게 모르게 움찔거렸다.
이 상황에서 뭐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차진명이 끝내 화를 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분명 많았으나 차진명의 앞에 설 때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무엇이든 설파하고 싶었으나 닫힌 입속으로 말이 고였다.
사실상 강효서조차도 그가 부재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알지 못했다.
차진명과 함께 떠났다고 알려진 성민주에게 접촉하려 했으나 그녀 또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유학을 떠났던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정리했어야지.”
두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춘 차진명이 미간을 좁힌 채로 말했다.
일이 성가시게 되어 답답할 법도 했으나 그의 음성 자체는 평소처럼 나긋했다.
“어디서 툭 튀어나온 미꾸라지가 물 흐리는 걸 보고도 그냥 두니까 웃긴 얘기가 계속 돌잖아. 너도 들은 것 있으면 얘기해 봐.”
그렇게 말한 차진명은 강효서의 한쪽 어깨를 천천히 그러쥐었다.
“왜 또 대답이 없어. 자꾸 이럴 거야?”
머지않아 무슨 말이든 떠들어 보라는 것처럼 힘을 주어 주무르기 시작했다.
내리 침묵하던 강효서가 입술 밖으로 간신히 쏟아 낸 소리는 고통에 찬 신음이었다.
“그, 그러니까……. 윽!”
차진명은 분명 손끝으로 강효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살갗 아래로 입에 담기도 벅찬 수준의 통증이 번지고 있었다.
강효서는 그가 시키는 대로 서둘러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온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씨발, 더 늦기 전에 빨리 말해야 하는데. 왜 입술이 안 떨어지는 거냐고!’
강효서의 절박한 심정과는 달리 그의 몸은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분명 차진명의 짓이었다.
고통에 찬 신음마저 갉아먹는 통증이 전신을 지배할 즈음 얼굴도 하얗게 질려 갔다.
고개를 아예 옆으로 기울인 채 강효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차진명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서애란은 내치지 말라고. 내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왜 시끄럽게 만들고 그래.”
차진명은 계속해서 강효서를 재촉했으나 그의 입술에서는 꺽꺽거리는 신음만 쏟아졌다.
그의 말대로 작금의 학교는 날마다 별의별 소문이 퍼져 나가며 어수선해진 상태였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 소문들은 강효서가 차진명의 지시를 따라 퍼뜨린 것이었다.
모쪼록 서애란과 틀어지게 된 건 사소한 다툼 때문이었다. 강효서와 더불어 익명 커뮤니티의 관리자로 분하던 서애란은 어느 날 뜬금없는 화두를 입에 올렸다.
‘그 새끼가 뜬금없이 이유나 얘기만 안 했어도, 젠장!’
이따금 이유나가 생각난다는 말에 잔뜩 비웃으며 조롱한 건 강효서였다. 차진명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만큼은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했던 그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면서까지 서애란을 힐난하는 일에 열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이 차진명에게 알려진 다음에는…….
전신으로 전류가 퍼지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던 강효서가 끝내 지면에 두 무릎을 처박았다.
“이게 뭐, 무릎까지 꿇을 일인가? 그렇게 미안해?”
차진명의 발 앞에 납작 엎드린 채 고꾸라진 등을 들썩이던 강효서가 고개를 저었다.
계속해서 말을 하려 입을 벌렸으나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는 차진명은 이렇게 강하지 않아. 분명 나보다 못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진명이 한쪽 무릎을 굽히면서 강효서의 눈높이를 맞췄다.
목울대부터 관자놀이까지 핏발이 선 얼굴을 흘끔거리던 차진명이 손끝으로 턱을 쥐었다.
“얼마 전에 서애란이 도해월을 만났던데. 대체 언제까지 걔한테 밀릴 거야?”
탄식하듯 읊조리는 말에 강효서는 유례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가 도해월의 행보에 직접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건 여름방학부터였다.
도해월이 만든 소모임 일원들이 여름에 공략한 던전과 관련한 정보는 차진명의 수중에 있던 것이었다. 일부러 공략하지 않고 방치한 던전을 도해월과 그 패거리가 공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차진명은 처음으로 눈에 띄게 분개했다.
차진명이 도해월의 행보를 눈여겨 살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얼마 전 그가 차민훈을 움직여 도해월의 동아리를 건드린 것도 일종의 경고였다. 그간 차진명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이들이 한두 명 스쳐 지나간 것도 아니었으나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체 도해월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강효서는 차진명이 도해월에게만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전신을 옭아매다 못해 정신까지 짓누르는 고통이 한 꺼풀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허윽, 큽!”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뱉은 강효서가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차진명은 어느새 두어 걸음 물러선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획은 예정보다 앞당길 생각이야. 그렇게 알고 준비해.”
축 늘어진 채 숨을 몰아쉬는 강효서를 가로지른 차진명이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희게 내린 빛이 부서지면서 생긴 궤적이 둥글게 번지고 있었다.
관자놀이까지 핏대가 불거지며 헛숨을 힘겹게 게우던 강효서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차진명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직접 겪고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나보다 더 강해진 거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내가 풀어 둔 미꾸라지는 원하는 것 이상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차진명이 실제로 유학을 떠나지 않았다는 소문은 여러 갈래로 곁가지를 틔웠다.
몸이 아파서 요양한 거라는 가정은 차진명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으로 변모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차진명이 유학을 떠난 시점도 현장 실습 직전이고, 차정주 일가는 헌터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뭔가 숨기려고 한 게 아니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그 과정에서 서애란을 둘러싼 소문이 잠잠해졌다. 나에 대해 떠들던 얘기들도 차진명에게로 방향을 틀게 되었고. 이틀 전부터 불법 마석 가공물을 섭취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 속의 주인공은 차진명이 되어 있었다.
“자, 다들 조용. 수업 시작한 지 한참인데 누가 아직도 떠들어.”
평소보다 느지막하게 걸음을 들인 정건후가 눈가를 찡그리며 교탁에 다가섰다.
잠시 허공에 시선을 흘리는 채로 고민하던 그가 학생들을 내다보며 말했다.
“중요한 공지가 있으니 그것부터 안내하도록 하지. 이번 학기 현장 실습에서 헌터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실습용 던전을 제공하는 길드가 성문 길드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