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61
61화. 기회의 무늬를 두른 함정
마지막 훈련 이후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쉼 없이 내달리다 보니 현장 실습 당일이 되었다.
성문 길드 사무실로 이동하여 널찍한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는 2026년도 헌터 아카데미 동계 현장 실습 관련 안내를 맡은 던전관리팀 김종호 팀장입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원들과 한데 모여 앉아 있던 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가 드는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순간적으로 헷갈릴 뻔했으나 이전에 내가 마주했던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학생들을 가득 메운 드넓은 대형 회의실을 둘러보던 그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파일철을 펼치고 안쪽을 잠시 훑던 그가 이번 실습에 관한 안내 사항을 읊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고 계실 입장 던전 선점은 해당 안내를 마친 뒤 각 조장들을 소집하여 개별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곁을 돌아보자 조원들이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보던 나는 지시를 따라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현장 실습과 관련한 안내는 지난 학기와 비슷했다. 좀 더 간소해진 것도 같았다.
던전관리팀 팀장 김종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이번 학기 현장 실습 입장 던전은 지난 학기 실습에서 취득한 점수를 토대로 길드와 헌터 아카데미의 합의를 통해 임의로 배정하였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소란이 불거졌다. 몇몇은 지난 학기의 규칙과 달라지지 않았냐며 항의했으나 김종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 결정에 항의하는 학생은 현장 실습에 임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점수를 일부 삭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작정하고 빠져나갈 틈을 막았구나, 차진명.
이것도 차민훈 머리통에서 나온 생각이려나.
어쩌면 저기 있는 성문 길드 도련님의 고견일 수도 있고.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리던 나는 둘러 앉은 조장들의 모습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반응하지 않는 건 나와 강효서, 그리고 저 도련님, 정도윤이 전부였다.
정도윤은 이전 생에서 차진명의 측근으로 자리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성문 길드와 관련한 지저분한 소문이 돌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문 길드가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의 책임을 묻게 된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지고 말았다.
저 녀석에 대해 파고들다 보면 이번 생에서 성문 길드와 커뮤니티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성문이 어떻게 현장 실습을 주관하게 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되겠지.
상념을 잇는 동안 정도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덤덤한 태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소리 없이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불규칙한 간격으로 툭, 툭, 두드리는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관자놀이가 절로 욱신거렸다. 그러면서도 녀석의 손끝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 * *
2027년, 겨울이었나.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그나마 떠올릴 수 있었던 정건후는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에 휘말려 사망한 뒤인 그 해 겨울.
나는 교실 뒤쪽에 내몰려 발길질에 시달리는 채로 온몸을 웅크리며 정건후를 생각했다.
저학년이었을 무렵 그가 나를 염려할 때 그 관심에 순순히 응했다면 사정이 좀 달라졌을까.
무려 S급 헌터라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리다니. 이럴 수 있는 건가.
“씨발, 맷집 좋은 새끼.”
사지를 실컷 짓밟고 걷어차다가 한 걸음 물러서던 누군가가 툭 던지듯 뱉었다.
“야, 그만하고 가자. 수업 시작하곘다.”
저들끼리 무어라 떠들더니 나를 둘러싸고 버티던 무리가 차례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를 악물면서 참던 나도 그대로 늘어진 채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숨을 골랐다.
치솟는 갈증에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눈길을 무심히 틀자 근처에 자리한 누군가의 발목이 보였다. 의자를 절반쯤 당겨 놓고 느슨한 자세로 앉아 있는 정도윤의 것이었다.
먼지가 즐비한 구석에 처박힌 채 올려다보던 내 눈에 담긴 건 정도윤의 손끝이 책상을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소리도 없이 불규칙하게 두드리는 그 움직임에는 어떤 타격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도윤이 책상을 두드릴 때마다 두들겨 맞은 자리가 욱신거렸다.
크게 숨을 한번 고른 나는 뻐근한 고개를 틀고 정도윤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정도윤은 나를 비웃지도 얼굴을 굳히지 않고 담담해 보였다.
뒤늦게 온몸에 불티를 두른 것처럼 홧홧해지는 통증이 불거졌다.
나는 다시금 어금니를 악물면서 눈을 감고 정도윤의 모습을 지워 버렸다.
* * *
옛 기억에 휘둘릴 필요 없어. 이번 생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1학기의 현장 실습에서부터 나의 미래는 바뀌었다. 그건 이번 현장 실습의 이후부터니까……. 그래, 나만 잘하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다음으로 4조의 입장 던전 발표하겠습니다. D등급, 냉기 속성 지형 던전입니다.”
한차례 불거진 소란이 일단락되고도 희미하던 의식을 다잡은 건 김종호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마지막 조의 던전 등급과 속성까지 발표했다.
숨을 고르던 그가 장내를 크게 훑어보았다. 공정성을 위해 던전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는 설명이 뒤따랐으나 냉기 속성 던전은 우리 조에 배정된 곳이 유일했다.
보나 마나 우리가 들어가게 될 던전은 ‘멸절의 설산’이겠지.
사태가 이렇게 된 건 나를 설득하려던 차진명을 역으로 도발하며 미끼를 던진 것에 대한 그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또한 나는 이것이 차진명이 내게 언급한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전 생의 차진명은 손수 준비한 함정에 기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수중에 들지 못한 장기 말을 그곳에 빠뜨린 뒤 멀리서 반응을 지켜보았다.
사전적 의미의 기회는 함정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면 거머쥘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냐는 평가와 함께 망각되겠지.
“입장 던전 발표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실습용 던전 입장이 준비될 동안 마지막 작전 타임을 드릴 테니 각 팀에게 주어진 회의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다수의 조장이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내 시선이 멎은 곳에서는 강효서와 정도윤이 구석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억하기로 정도윤은 지난 현장 실습에서 강효서의 조원 중 하나였다.
강효서의 조원은 정도윤과 서애란이 조원에서 제외되고 다른 두 사람이 자리를 채운 것 외에는 지난 학기의 구성과 비슷했다.
그가 모아 둔 이들의 이름을 듣다가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강효서를 필두로 모인 그들은 커뮤니티 내에서도 특별히 눈여겨볼 만한 대상이 되는 이들이었다.
이번 실습에서 강효서와 정도윤은 차진명의 계획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불과 몇 시간 뒤에 들어갈 던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대체 성문 길드는 이번 사태에 어디까지 관여한 거지?
연이어 질문이 떠올랐으나 지금의 내게 중요한 건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막는 것이었다.
차진명이 계획한 대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수준이다. 이미 예고된 재난을 막아 내고 나면 그에 따른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그즈음에서 결론을 맺고 있으려니 강효서와 정도윤도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느지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조원들이 기다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어, 왔어? 어떻게 됐어?”
“이번에도 C등급 고른 건 아니지?”
“설마 또 C급?! 나 이번엔 못 들어가. 그냥 현장 실습 점수 안 받고 말지.”
곳곳에서 염려스러운 투로 설파하는 것이 들려 왔다. 문간을 넘어선 나는 완전히 들어서기 전 주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번 학기 실습부터는 규칙이 완전히 달라졌어. 조장이 직접 고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임의로 배정된 상태였다고 하더라. 공개된 건 던전 등급, 지형 특성이 전부야.”
순식간에 테이블 근처를 가로질러 스크린 앞에 선 나는 간신히 숨을 골랐다.
간결하게 떨어지는 설명을 경청하던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우리한테 배정된 던전은 D등급 냉기 속성 지형이야.”
내내 긴장하고 있던 강준희는 손끝이 차게 식은 건지 계속해서 주먹을 고쳐 쥐었다.
공희찬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흩뜨렸다.
“그리고 던전의 이름은 멸절의 설산.”
“방금 던전 이름은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네가 그것까지…….”
무심코 묻던 김미솔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이미 그 던전에…….”
“선배가 생각하는 게 맞아. 지난여름에 이미 들어가 본 적 있는 던전이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건지 입술을 벙긋대던 김미솔을 두고 설연호가 질의했다.
“우리랑 들어간 건 다른 던전이었잖아? 심지어 들어갔을 때 공략까지 끝냈고.”
뒤이어 긴장을 완화해 보려는 건지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숨을 고르던 강준희가 말했다.
“냉기 속성에 이름이 설산이면……. 설마 마지막으로 헀던 모의 테스트랑 비슷한 던전인 거야? 그런 거라면 진짜 들어가기 싫은데.”
“또 그 눈 더미에 갇혀 있으라고? 미친, 상상만 해도 존나 끔찍해!”
“그때 일부러 제일 어려운 지형을 골라서 들어간 것 아니었어? 생각만 해도 무릎이 후들거리는 기분이야. 최종 보스 공략할 때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니까.”
“심지어 이번에는 실제 던전에 들어가는 거잖아. 그렇게 위험한 곳에 들어다가 큰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손도 못 쓰고 조난되는 거 아냐?”
강준희의 질문이 도화선이 되어 회의실 장내가 소란으로 어지러워졌다.
다들 겁에 질린 건지 두서없이 말하는 소리가 뒤엉키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마지막 훈련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그때의 호흡만 잘 유지한다면 큰 어려움은 없을 거야. 시작하기도 전에 겁먹을 필요 없어.”
거기까지 말한 나는 검지를 입가에 잠시 올리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마저 얘기할 게 남았으니 잘 들어. 오늘 우리가 들어가게 될 던전의 게이트는 들판 한복판에 있어. 던전의 중심으로 가려면 반드시 산맥을 타고 올라야 해.”
이내 손을 떨구고는 상체를 반쯤 기울인 채 테이블에 벌린 뼘을 얹어 지탱했다.
“그 중심에는 S급 마석이 묻혀 있어. 허투루 하는 말 아니고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야. 마지막으로 본 게 여름이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마석의 영향력이 주변까지 미치고도 남았을 테지.”
그즈음에서 말을 멈춘 뒤 온몸을 타고 증식하는 두려움을 삼키고자 눈을 감았다.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틔우면서 눈앞에 있는 조원들과 차례로 시선을 맞췄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S급 마석의 영향력이 던전 바깥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최종 보스를 공략해서 게이트를 완전히 닫아 버리는 거야.”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내 말을 가로막던 홍원하가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가능성 자체를 원천 차단하자는 거지?”
나는 홍원하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