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63
63화. 첫 번째 대항 (2)
설원을 가로질러 나아온 지 두어 시간쯤 되었을까.
광활한 들판을 쉼 없이 전진하는 동안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눈보라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걷는 것도 이전보다 버거워진 탓이었다.
이번에도 지난 학기 실습과 마찬가지로 설연호와 강준희가 번갈아 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틈틈이 두 사람을 돌아보면서 허벅다리까지 쌓인 눈 더미를 헤집고 나아갔다.
“분명 들어왔을 때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왜 점점 길이 복잡해지는 것 같지.”
선두에서 걷던 홍원하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면을 내다보았다.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는 이렇게까지 극악은 아니었다고 했으니까. S급 마석의 영향력이 지형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걷던 김미솔이 입김을 흩뜨리며 답했다.
“뭐가 됐든 성문 그 개자식들이 이딴 미친 짓을 꾸몄다는 거잖아. 대체 어떻게 살길래 사람 대가리에서 이딴 발상이 나오는 거냐? 어? 존나 빡쳐, 진짜.”
홍원하와 선두에서 나아가던 공희찬이 분개하며 눈 더미를 힘껏 걷어찼다. 자신이 헌납한 마석의 쓰임새까지는 알지 못했던 탓인지 그의 분노는 극에 달한 듯했다.
“벌써 힘 빼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려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고 진작 말했을 텐데.”
냉기에 얼어붙는 손가락의 감각을 잃지 않고자 총을 고쳐 쥐던 내가 말했다.
마구잡이로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은근하게 느껴졌다.
사소한 도발에 반응해 줄 만큼 한가롭지 않았던 나는 계속해서 의식을 다잡았다. 미로처럼 복잡해지는 설원에서 길을 잃지 않고 최단 시간 내에 중심부까지 다다르려면 어떻게든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했다.
“그래도 한참 걸어온 것 같은데……. 아직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체력만 잡아먹는 것 같아서 걱정돼. 그리고 연호 선배, 이제 제가 할게요.”
그렇게 말하던 강준희는 설연호의 뒤를 이어 다시금 스킬을 사용해 풍랑을 조종했다.
침묵으로 응수하던 설연호가 방어막을 차츰 거두자 거세던 바람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전보다 느린 속도로 회전하며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서애란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서애란은 이런 극악의 지형에서도 기복 없이 전투가 가능했다.
크르릉.
탓. 탓. 탓. 탓.
그 순간 사람의 머리통만 한 눈 더미 여럿이 무리를 지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내가 지시하기도 전에 서애란이 눈을 감은 채 낮은 소리로 무어라 읊조렸다.
푸시식.
푹.
그것들은 나와 조원들의 시야에 제대로 잡히기도 전에 저들끼리 흩어져 사라졌다.
서애란이 처치한 건 눈 더미에서 구체로 빚어지며 증식하는 E급 스노우 몬스터였다.
분명 여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녀석들이었는데.
저것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서애란의 스킬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며 감탄하던 이들도 가벼운 눈인사만 건네고 말았다.
“지난번엔 해무더니 이번에는 눈보라네.”
반쯤 탄식하며 읊조리던 홍원하가 멀리서 다가오던 스노우 몬스터를 향해 물거품으로 만든 그물을 던져 처치했다. 자연스레 스킬을 구사하면서도 시야 확보가 버거운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눈송이에 독이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런 경우에는 던전 전체가 작정하고 정신력을 갉아먹으려고 들어서 문제지만.”
뒤이어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서애란이 그 너머에서 달려오던 몬스터까지 처치했다.
“서애란 말이 맞아. 계속해서 설연호 선배한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현혹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
서늘한 바람을 거듭 삼키고 있으니 호흡마저도 서서히 버거워졌다.
아직까지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걷는 이들을 돌아보며 말한 뒤 주먹을 말아 쥐었다.
동시에 그건 나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멸절은 눈송이처럼 내려앉아 소리 없이 사람을 짓누른다.
거동을 조금이라도 멈춘다면 그대로 무력해지면서 눈 더미에 파묻힐 것이다.
조원들에게 계속해서 버티라고 지시하고 있으나 나조차도 서서히 버거워지고 있었다.
딱딱한 총기를 다시금 고쳐 쥐던 나는 이 순간이 나에게 어떤 기회인지 되새겼다.
전생의 어느 날 인생을 다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마저도 단 한 번뿐이었고 스치듯 지나갔을 뿐이었으나 내가 무엇을 염원했는지 또렷하게 기억한다.
다시 살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어떤 때도 아닌 이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문제혁이 나에게 실망하지 않게 만들 것이고, 정건후가 사태에 휘말려 죽지 않도록 무엇이라도 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기점으로 내게 생긴 변화가 헛된 망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 입증했을 테다.
그즈음에서 고개를 젓고 시야를 다시 확보한 나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마지막으로 소형 몬스터가 나타난 타이밍과 지금 지나는 위치로 미루어 본다면…….
“잠깐 멈춰.”
정세를 가늠한 나는 무리에게 지시한 뒤 모두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이제 곧 중형 몬스터가 나타날 거야. 그 녀석을 처치한 다음부터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정상까지 달려야만 스킬로 확인된 시간 내에 최종 보스까지 처리할 수 있어.”
눈가를 찡그리며 조원들의 안색을 차례로 살핀 뒤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던전 브레이크를 발생시킬 거라고 작정하고 계획한 존재가 있는 이상 그게 아닌 미래에 다다를 수 있는 확률은 현저히 낮아. 그렇다고 해서 겁먹을 건 없어. 마지막 훈련에서 우리가 익힌 호흡만 유지하면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차분하게 설파하는 내 목소리를 듣던 강준희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 더미를 헤치며 나아가 그의 팔목을 그러쥔 채 다른 이들과 눈을 마주했다.
“지난 현장 실습에서 스킬라를 마주쳤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는 사람.”
강준희에게 순서를 이어받아 방어막을 유지하며 숨을 고르던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다시 예측할 수 있다고 했었지.”
기억을 더듬는 것인지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이들이 그 말을 들으면서 끄덕였다.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치는 와중에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이 살아서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예측하는 것.
이번 생에서의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어떤 실망도 안기지 않는 것.
비로소 전생에서 스치듯 바랐던 염원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과거의 기억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나는 차츰 떨림이 잦아드는 강준희의 팔을 천천히 놓으면서 총구를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중형 몬스터를 처치하고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의 행로를 계산한 설계 스킬을 시전할 거야. 언제나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설계를 그대로 구사하되, 만약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대로 행하면 돼.”
내가 가장 먼저 총구를 겨눈 건 김미솔이었다.
탕!
“선배는 지금부터 선두에 서서 길을 확보하는 데 힘을 써 줘. 이동 속도에서 발목이 잡히면 큰일이니까. 선배가 힘들어하는 지형이라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하던 대로 해.”
이어서 홍원하와 강준희에게 나란히 총구를 겨누었다.
탕!
탕!
“두 사람은 마지막 훈련에서 연습했던 것처럼 연합해서 공격해 줘. 방어는 설연호 선배랑 김미솔 선배가 맡을 테니까 강준희 너도 공격에만 집중해.”
차례를 기다리던 공희찬과 서애란에게도 총구를 겨눈 뒤 방아쇠를 당겼다.
“두 사람도 되도록 거리를 넓히지 말고 일정 거리를 확보한 채로 움직여 줘.”
그러자 평소 같았다면 서애란과 붙였다며 반발했을 공희찬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애란 또한 여느 때와 다름없는 기색으로 공희찬과 거리를 조금 더 좁혀서 섰다.
“마지막으로 설연호 선배.”
설연호가 선 쪽으로 총구를 틀고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탕!
“이번 전투는 선배한테 유난히 버거울 거야. 그래도 버텨 줘.”
설연호에게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를 파고든 레몬 빛 탄환에 담긴 설계 스킬이 서둘러 효력을 발하기를 기다렸다.
숨을 크게 고르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설계를 전부 읽은 설연호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그와 나누는 시선 너머로 소리 내서 하지 못한 말을 전했다.
절대로 죽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죽으면 안 돼.
쿠구궁.
쿵. 쿵.
쿵.
쿵.
이윽고 한가득 쌓인 눈 더미조차 덮지 못할 소음이 대지를 진동하며 나아오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썩은 나뭇가지를 기다랗게 뻗은 몬스터 무리가 떼를 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시간 삼십 분. 이 시간 내에 최종 보스까지 처치하면 전부 살아서 나갈 수 있어.”
나의 마지막 말이 신호탄이 되었다. 설산의 초입까지 이르렀을 즈음 전투가 시작됐다.
* * *
[설원의 파수꾼 예티(C)을 처치했습니다.] [설원의 파수꾼 예티(C)을 처치했습니다.] [설원의 파수꾼 예티(C)을 처치했습니다.] [설원의 파수꾼 예티(C)을 처치했습니다.]탕!
마지막으로 방아쇠를 당겨 내 발목을 옥죈 녀석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로써 산맥의 중반부에서 치른 전투까지 마무리되었다. 초반 전투까지만 해도 절반 이상이 멀쩡했으나 C급 몬스터를 처치한 이후부터 눈에 띄게 기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설연호 선배는 좀 어때.”
천리안 스킬을 통해 확인했던 대로 설연호는 이 전투에서 극심한 부상을 피하지 못했다.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걷던 그가 홍원하의 팔을 고쳐 잡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직 괜찮아.”
한층 강해진 설인 몬스터에 의해 습격당한 설연호의 안색이 희게 질려 있었다. 이전에 내다본 가장 잔혹한 미래와 달리 목숨은 잃지 않았으나 거동 자체는 버거운 상태였다.
체내의 마나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약한 쇼크 상태에 이른 설연호로 인해 방어막 또한 완전히 걷힌 상태였다. 강준희가 풍랑을 조종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렀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해. 잘만 하면 설연호 선배 도움 없이도 버틸 수 있겠지만 시간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어.”
신중하게 내뱉은 서애란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럼 설연호 선배만이라도 내보낼 수 없을까? 계속 부축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야, 귀환석 하나인데 만에 하나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리고 아까 도해월이 하는 말은 뭐 코로 들었냐? 여기다가 우리 들여보낸 놈들은 들어간 김에 죽어 버리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을 텐데 혼자 내보내서 퍽이나 좋은 꼴 나겠다.”
“공희찬, 너 여기까지 들어와서 말 그따위로 할래?”
다툼이 촉발된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이전 생의 나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설연호를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했겠지.
하지만 그건 전생의 지선일과 현재의 김미솔이 말했다시피 인간적인 처사가 아니다.
더는 판단을 유보할 수 없었다. 나는 비틀거리던 설연호 앞에 자세를 낮추고 앉았다.
“지금은 멈춰서 회복할 시간도 없으니 우선은 업혀. 이대로 정상까지 갈 거니까 다들 다음 전투부터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