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64
64화. 첫 번째 대항 (3)
설연호를 등에 업은 채로 이어진 전투도 간신히 끝을 맺었다.
내내 등에 업혀 있던 설연호의 숨소리가 점점 미약해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면서 설연호를 고쳐 업은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세우며 말했다.
두 손의 움직임이 막힌 나머지 눈을 제대로 뜨는 것조차 버거워지는 중이었다.
“웬만한 건 다 처리한 거야. 이제 최종 보스만 남았어.”
조원들에게 말하는 동시에 스스로 되새기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S급 마석에서 퍼져 나오는 마나의 힘이 살갗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디에든 눕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회복 물약 효과가 돌려면 아직이야?”
근처에서 걷던 김미솔이 걱정스레 묻더니 걸음을 좁히며 다가왔다. 설연호가 치명타를 입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아는 김미솔은 염려를 거두지 못했다.
그 순간 설연호가 위험에 처한 걸 구하지 않았다면 김미솔이 위험한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까지 가정해서 모두가 죽지 않을 수 있는 미래를 다다르기 위해 설계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쓸모없는 능력이군.’
일순 차진명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아니, 우린 여기서 모두 살아 나갈 것이다. 남몰래 입김 사이로 한숨을 퍼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따금 휘청이면서도 꾸준히 전진하던 김미솔이 곁눈질로 나와 설연호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두기만 해도 괜찮은 거야? 내가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뭔가 알고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김미솔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설연호 선배랑 선배가 다치지 않는 미래를 가정해서 설계를 구상한 거였어. 눈앞의 상황만 보고 선배를 구하려고 설계를 이탈하고 선배를 구한 건 오로지 설연호 선배 본인의 의지였고.”
그 이야기까지 듣고 난 김미솔은 침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마신 회복 물약의 효과가 뒤늦게 영향을 준 것인지 설연호가 움찔거렸다.
일전의 부상이 예상보다 더 큰 타격이었는지 보급품으로 주어진 회복 물약만으로는 회복이 쉽게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효력이 느리게 퍼지고 있는 건지 설연호는 여전히 버거워하는 상태였다.
축 늘어진 설연호를 고쳐 업은 나는 어깨 아래로 늘어진 팔을 몇 번 주물렀다.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틈틈이 주무르면서 맥박까지 확인해 보았으나 여전히 불안정했다.
머지않아 근처에서 설연호가 보관하던 보급품을 확인하던 홍원하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 실습은 난이도를 높일 거라느니 어쩌니 해도 안 믿었거든. 근데 진짜였나 봐. 우리가 쓸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남은 것들을 확인하던 공희찬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마저도 입꼬리만 달싹일 뿐 시원스레 웃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겨우 다잡았다.
“진짜네. 설마 정도윤 그 도련님 새끼가 들어간 던전에도 이것밖에 안 들려서 보냈을까? 다 알고 보니까 이 새끼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악질이라서 진절머리가 난다, 어휴.”
나로서는 그러는 공희찬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말하진 않았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우리 아빠한테 다 말해 버릴 거야. 이 새끼들이 지금 누구를 죽이려고 했는지 모르고 설쳤나 본데, 다 죽었어.”
비각성자인 공희찬의 아버지가 어디까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말이 실현된다면 나름의 승산은 있을 것이다. 괜히 국회의원 자리에서 떵떵거리는 게 아니겠지.
“현장 실습 길드가 성문 길드로 갑자기 변경된 건 강효서 선배도 관련이 있을걸.”
이를 악물면서 삽시에 쌓이는 눈더미를 가르던 서애란이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B급 헌터인 서애란조차도 지쳐 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정확히는 정도윤이랑 관련이 있다고 해야겠네. 지난 학기까지 강효서 선배 조에 속해 있던 정도윤이 이번 학기에는 조장으로 선발됐잖아.”
정확한 의중을 파악하고자 서애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곁에 서서 갸웃거리던 강준희가 질의했다.
“그, 그게 무슨 의미야? 강효서 선배가 조원을 정할 수 있었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조장 선발에도 개입한 거고?”
“너희 몰랐구나? 강효서 선배 스킬이 카드 써서 확률 조종하는 거잖아.”
서애란의 언급대로 강효서의 스킬은 트럼펫 카드를 다루는 것이었다. 그 또한 판을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기 위해 수를 썼으나 나와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전생의 나는 차진명이 대외적으로 내놓고 사용하는 패였지.
반면 강효서는 뒤에서 지저분한 일을 처리할 때 주로 꺼내는 패였고.
이제 나는 차진명의 곁에 서지 않을 테니 그는 이미 자신의 가장 중요한 수족 중 하나를 잃은 셈이다. 이번 기회로 성문을 처치한 뒤에는 내내 거슬리던 강효서도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원하 너, 내가 강효서랑 사이가 나빠진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불쑥 말문을 연 김미솔을 따라 고개를 돌린 홍원하가 수긍했다.
“네가 예전에 지나가듯 얘기했던 게 맞았어. 강효서가 나를 자기 조원으로 포섭한 것도 지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익명 커뮤니티 때문이었거든.”
“역시.”
“그리고 다음 학기에 포섭된 게 희찬이 쟤였을 거야.”
무릎 높이까지 오는 뱀 형태의 몬스터를 불길로 옥죄어 처치하던 공희찬이 돌아보았다.
“나 뭐. 뭔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숨통이 끊긴 뱀을 짓밟던 공희찬이 묻더니 이내 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커뮤니티 얘기하는 거였구나? 난 뭐 가진 게 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김미솔, 넌 왜 부른 거래?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네.”
“선배한테 없는 게 있어서 그런 거겠죠. 이를테면 인성이라든가…….”
멀찍이서 소형 몬스터를 내쫓아 나무에 처박히게 만든 강준희가 말했다. 그 또한 호흡이 버거워진 탓인지 말끝을 흐리는 것이 느껴졌다.
“근데 이 새끼, 아니다, 됐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뭘 더 하냐.”
그렇게 말한 공희찬은 숨이 턱 막힌 듯 심장 부근을 부여잡은 채 숨을 골랐다.
“네가 말했으면서 네가 발끈할 건 또 뭐야. 화를 내도 내가 내야지.”
여느 때와 달리 미묘하게 가라앉은 어투로 말하던 김미솔이 한숨을 쉬었다.
“강효서 선배와 관련한 건 뭐든 제가 아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건 나가서 마저 얘기하고 남은 시간부터 확인하죠.”
서애란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나눈 짧은 대화로 두려움을 억누르기에 눈앞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설연호를 고쳐 업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지마다 눈이 내려앉은 모양이 제각기 달랐으나 기억을 되짚다 보니 이곳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삼 분 정도 뒤에 몬스터가 다시 나타날 거야. 올라오는 길에 마주친 녀석이랑 종은 같지만 거처가 달라서 몸집이 훨씬 커졌을 테니까 조심해.”
“그것만 해치우고 나면 최종 보스까지 갈 수 있는 거지? 올라갈수록 체력이 더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아. 가만히 있어도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두 발을 질질 끌면서도 걷는 속도를 최대한 유지하던 강준희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 정말 힘들다 싶으면 나갈 수 있는 거죠? 아까 해월이가 밖에서 정건후 선생님이랑 다른 분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했는데…….”
설연호의 역할이 부재한 채로 나아가고 있으니 일찌감치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맞아. 우리가 여기서 나가면 믿을 수 있을 만한 어른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일단 해 보는 데까지 하고, 정 안 되면 귀환석 써서 돌아가자.”
일전에 안내한 사항이었으나 나는 동기를 부여할 겸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말문을 닫으면서 사라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으니 저마다 정신력을 다잡는 게 보였다.
“아까 도해월이 말했던 S급 마석의 영향력이 살갗으로 느껴지는 걸 보니까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도착할 때까지 뭐라도 해 봐야 하는 거라면 내가 움직여 볼게.”
“서애란 네가? 어떤 식으로?”
곧장 대답하는 홍원하의 눈동자에 의구심과 일말의 기대가 깃들어 있었다.
“커뮤니티 가입 조건으로 마석을 헌납한다는 건 나도 강효서 선배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전혀 몰랐고. 아마 차진명 선배 생각이겠지.”
취약해진 상태에서 그 이름을 듣고 있으려니 두통이 거세지는 듯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분명히 할게. 내가 가진 언령 스킬은 버프 계열도 아니고 힐이나 치유 스킬도 아니야.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그에 버금가는 효과를 흉내 낼 수는 있어. 지난 학기 현장 실습에서도 그렇게 해서 힐러 없이 버텼거든.”
남은 시간을 가늠하여 빠른 속도로 읊조리던 서애란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선에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나를 완전히 믿어야 해. 아주 조금의 의심도 있어선 안 돼.”
* * *
S급 마석이 던전에 미치는 영향력은 설산의 정상으로 향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일전의 전투를 끝으로 강준희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간신히 걸음만 옮기고 있었다.
“도해월, 아까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다고 했었지.”
건조하게 갈라진 어조로 내게 묻는 건 공희찬이었다. 나는 등에 업은 설연호의 무게가 점점 늘어나는 듯한 착각에 시달리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뭐든 해 보자. 이 상황에서 우리가 믿을 건 서로밖에 없어. 정말 이러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는지 어땠는지 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릴 수도 있겠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서애란한테 손 벌리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어쩔 수 없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기세를 다잡던 공희찬은 마지막 이르러 말끝을 흐렸다.
그 말을 듣던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공희찬이 웬일로 잘 말했네. 평범한 현장 실습이었다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이대로 포기해 버린 대가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살아서 나간다고 해도 멀쩡하게 살지 못할 거야.”
만신창이가 된 김미솔이 가까스로 호흡을 쏟으며 얘기했다.
그나마 회복 물약을 마신 덕에 기력을 조금씩 되찾고 있는 듯했다.
나는 함묵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잠잠히 시선을 틀었다.
전부 김미솔에 의견에 동의하는 건지 한층 결연해진 얼굴로 자세를 다잡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그 모습을 눈에 담던 서애란도 숨을 고르면서 동의했다.
“다들 동의했으니 시작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서애란이 눈을 감으면서 낯선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녀가 딛고 선 자리에서 붉은빛이 번지더니 이내 눈밭을 같은 빛으로 물들이면서 모두에게 퍼져 나갔다.
동시에 내가 업고 있던 설연호 또한 조금씩 몸을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잡념이 사라지더니 이 순간 가장 이루고 싶은 목적을 향한 염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시 해 보자. 우리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정신과 의지가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서 마지막으로 최종 보스를 처치하기 위한 전법을 구상했다.
총구에 설계 스킬을 중첩한 뒤 휘몰아치는 눈발 사이로 총구를 겨누었다.
그 순간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사위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거센 눈보라 사이로 어떤 기척도 남기지 않은 채 고요하게 다가온 그것은…….
“최종 보스는 형체를 자유자재로 감출 수 있는 녀석이야. 하지만 그림자만큼은 숨길 수 없으니 우리는 그걸 따라가면 돼.”
탕!
나는 정상으로 향하는 방향을 보고 선 조원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어둑해진 허공 사이로 레몬 빛 탄환 다섯 발이 유성우처럼 날아갔다.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버텨.”
뒤이어 자세를 굽힌 채로 설연호를 고쳐 업은 뒤 낮은 소리로 속살거렸다. 어느새 의식을 되찾은 건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그와 함께 번지는 미약한 온기를 동력 삼아 앞서 달려 나간 이들의 뒤를 이어 정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고지가 눈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