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65
65화. 천칭의 심판
정상으로 내달리는 나와 조원들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나아가든 그 녀석의 그림자가 집요하게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쿠궁―!
쿵!
몇 발자국 근처에서 난데없이 지면이 진동하며 둥근 모양으로 푹 꺼졌다.
사람을 손쉽게 묻어 버릴 수 있을 만한 눈 더미가 쏟아지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홍원하, 피해! 멀리 가지 말고 바로 받아쳐!”
내 말을 듣는 즉시 달음박질한 홍원하가 곧장 몸을 틀어 허공에 창을 꽂았다.
그러자 자극이 가해진 건지 그의 발치에서 일렁이던 그림자의 모양이 조금씩 변했다.
다음 공격은 한참 떨어져 있던 김미솔의 근처에서 시작될 텐데.
덩달아 어둠이 드리운 탓에 시야를 확보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그나마 색이 짙어지는 경계선을 찾아내 공격을 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탕!
탕!
설연호와 내 근처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다가오는 그림자를 확인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여느 때처럼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으나 타격이 가해진 건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공희찬 선배, 바로 뒤쪽이야!”
모두가 가까스로 그림자의 흔적을 따라서 타격한다고 해도 모든 공격이 먹히는 건 아니었다.
녀석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밤하늘을 지나는 구름처럼 느리게 흘러 다녔다.
그것의 그림자는 너울처럼 일렁이기도 하고 소나무처럼 솟아나기도 했다.
조원들은 공격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설계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설연호를 고쳐 업으면서 전투에 임하던 나는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때 축 늘어져 있던 설연호의 팔이 내 목덜미를 힘겹게 감싸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그림자를 잡아 두고자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총구에서 터져 나온 연노랑 빛이 닿을 때마다 형체가 나타날 법도 했으나 녀석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으로 모자라 울음소리도 내지 않으니 점점 답답하고 괴로워졌다.
그 순간 머릿속을 견고하게 채우던 염원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정말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에 반사적으로 서애란을 돌아보았다. 서애란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거동이 더뎌지면서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유능한 헌터여도 S급 헌터가 아닌 이상 보이지도 않는 보스를 혼자서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려면 주변에서 힘을 받쳐 줘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서애란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지 그녀에 의해 지속되던 기도가 효력을 잃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목뒤를 힘껏 움키는 듯한 통증과 함께 억눌렀던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만약 이대로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내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현장 실습을 나서기 전 문제혁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막혀 있던 댐을 터뜨린 것처럼 내리 억눌렀던 감정들이 거세게 부서지며 내리쳤다.
이건 분명 던전 내부에서 날리는 눈송이와 S급 마석에 응집된 마나 에너지를 흡수한 몬스터의 영향 때문이다. 계속해서 그림자를 쫓아가는 채로 입속에 되뇌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내가 내다보았던 미래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멈출 줄 모르고 몰아치는 눈송이와 눈으로 만든 무덤에 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살, 살려 주세, 크헉, 큽!”
내가 머뭇대는 사이 무형의 존재에 의해 목이 졸린 강준희가 눈밭에 처박혔다.
“강준희!”
“준희야!”
누군가 연이어 외쳤으나 그마저도 다가가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눈 더미를 헤치고 다가가려던 홍원하 또한 근처에 기생하던 그림자에게 당하고 말았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버텨! 조금만 더 버티면 나갈 수 있으니까!”
간신히 호흡을 추스르며 모두를 향해 외쳤으나 나 또한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바라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뒤로 두고 정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의 기억을 놓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나아가려 한다면 어디에도 닿을 수 없다.
수도 없이 되새겼으나 지난 생에서의 던전 브레이크의 장면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전생의 나는 수많은 던전 브레이크를 맞닥뜨렸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던전 안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잠시 멈춰서 내가 바라본 건 멸절이 도래하는 풍경이었다.
눈이 내리는 모습만큼은 고요하고 아름다웠으나 실상은 그저 참혹했다.
남은 이들이 전투에 몰두하는 사이 쓰러진 두 사람에게 다가가 팔을 쥐어 보았다.
힘껏 당겨 일으켜 보려 했으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탓에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어흑! 큽.”
머지않아 근처에서 김미솔까지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서둘러 다가가 부축하려 했으나 눈 더미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설연호를 업은 그대로 휘청거리고 말았다.
“해월아, 지금도 늦지 않았어. 우리 귀환석 쓰자.”
복부를 힘껏 움킨 김미솔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간신히 이야기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한숨을 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정건후 선생님이 불러온 헌터들도 있으니,
바로 다시 회복하고 던전에 입장하면 문제없을 거다.
귀환석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윽고 귀환석을 발동시켜 돌아가려 했으나…….
“씨발.”
어딘가 이상한 느낌과 함께 귀환석을 다시금 살피니 보통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니 불량품인 태가 났다.
차진명 이 거지 같은 새끼.
“이대로는 안 돼. 우리 더는 못 버텨. 밖에 헌터들도 대기하고 있다며,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김미솔이 애원하다 못해 절규하는 소리에 모두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설마 안 되는 거야? 진짜로?”
누군가 허망하게 묻는 사이 눈보라에 휘말려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문득 우리의 모습에 지난 현장 실습에서 뜨겁고 축축한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던 모습이 불현듯 겹쳐 보였다.
세상이 멸망하던 날 나의 부대원들도 저런 모습으로 죽어 가고 있었겠지.
살갗에 달라붙는 눈송이가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정신을 헤집는 걸 알고 있었으나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버거웠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 끄트머리가 새파랗게 질린 손끝으로 총을 거머쥐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예측은 틀리지 않았는데.
귀환석까지 건드리다니. 이따위 고루한 수도 예측하지 못해서 결국 이렇게…….
마지막까지 버티며 그림자에게 공격을 가하던 서애란까지 눈밭에 엎어지고 말았다.
아무도 막지 못한 그림자는 속력을 차츰 높이면서 점점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여기서 보스의 힘이 더욱 강해져 마나 에너지가 폭주하게 되면, 그대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다.
어떻게든 새로운 수를 예측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렸으나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미래를 내다보려 했으나 눈앞이 계속해서 어둡게만 보였다.
나는 도처에 늘어진 조원들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축 늘어진 채 간신히 매달려 있던 설연호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숨을 틔우는 소리가 귓가에 선연해지자 반사적으로 눈길을 틀었다.
“선배, 정신 차린 거야? 의식이 들어?”
내가 반사적으로 묻고 나니 설연호가 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던 설연호까지 의식을 되찾았으나 막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힘겹게 눈을 뜬 그에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장면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그가 깨어나게 되어 기쁜 것과 별개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자괴감이 나를 짓눌렀다.
당장 몸을 움직여 뭐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연이어 기침을 쏟아 낸 설연호가 숨을 크게 고르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다시 예측해.”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으나 귓가에 꽂히는 건 날카로운 바람 소리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면서 몸집을 불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밭을 구른 눈덩이의 몸집이 불어나는 것처럼 내달리는 중에도 나는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우리가…….
턱 밑까지 치밀었던 그 말을 설연호에게 꺼내려고 입술을 달싹일 무렵 설연호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윽고 나와 설연호를 구심점 삼아 푸른 빛이 둥근 궤적을 그리며 퍼져 나가더니 어두컴컴해진 눈밭을 환하게 밝혔다.
일렁이며 퍼져 나가는 그 빛을 고스란히 흡수한 눈밭이 이전보다 더 선명하고 환해진 빛을 반사하며 물결처럼 번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헉.”
나도 모르게 탄식 같은 한숨이 쏟아졌다. 놀랍도록 익숙한 빛이었다. 이때껏 보아 왔던 것보다 더 환한 빛을 내며 구역을 넓혀 나가는 행렬은 치유 필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
“미쳤어? 가뜩이나 만신창이가 된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는 차마 설연호를 떨구지 못하고 힘껏 움킨 채로 소리쳤다. 이건 지난 학기와 확연히 다른 상황이었다. 그때도 죽을 뻔한 건 매한가지였으나 지금은 훨씬 더 위험했다.
외에도 설연호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삽시에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는 푸른빛, 신의 가호처럼 신성하고 정결한 그 빛이 온몸에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하려고 의식을 차리고 나서도 계속 나한테 업힌 채로…….
그의 의중을 다 짐작하기도 전에 설연호가 내 어깨를 강하게 밀치면서 눈밭에 몸을 던졌다. 반동으로 인해 설연호에게서 떠밀리는 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을 만큼 힘을 얻는 즉시 스킬을 전개한 탓인지 기침을 계속해서 쏟아 내고 있었다. 나는 눈밭에서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설연호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독주를 마시고 눈을 감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생각해 왔다.
부대원들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저렇게 괴로워했을까.
상기하는 동안 말아 쥔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치유 필드 내에 퍼진 신성한 힘이 온몸을 타고 순환하면서 차츰 기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는 어느새 정산을 벗어나 산맥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당장 타격을 가하여 그 몸집부터 줄여야 하겠지만 내게는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연호가 퍼뜨린 푸른빛 사이에서 기침을 토하거나 헛숨을 터뜨리면서 깨어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귀환석도 망가진 마당에 여기서 나가려면 무조건 공략에 성공해야 하는 거잖아!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당장 저것부터 쫓아!”
어느새 내 등 뒤에 있던 설연호도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힘껏 소리쳤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두 발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다시 예측하면 돼.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
이곳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고 있으니 바깥에 있을 지선일과 문제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까지 살려야만 한다는 강한 열망과 염원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본능적으로 떠오른 가장 이상적인 수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이내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눈을 깊이 감았다 뜨자 눈앞으로 푸른 활자가 떠올랐다.
[사용자가 지정한 ‘공정한 판별자’ 스킬을 발동합니다.]나는 이 상황을 전복할 수 있는 미래를 내다보려는 간절함으로 주먹에 힘을 주었다.
[‘공정한 판별자’스킬의 부가 기능 ‘천칭의 심판’을 행하기 위한 특수 발동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그와 동시에 얼어붙은 손끝에서부터 온기가 번지더니 금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천칭의 심판’을 거행할 수 있게 됩니다.]어떻게 하면 심판을 행할 수 있는지 누구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무의식 저 깊은 곳에서부터 비롯된 의지대로 수를 놓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같은 과정을 반복한 사람처럼 손끝에 익은 전술이었다.
[지금부터 □□□ □□□의 의지에 따라 ‘천칭의 심판’이 거행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 □□□에게 품은 ‘악의’를 측정합니다.]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안내 문구였다. 손끝에서부터 터져 나온 금빛이 순식간에 칠흑 같은 상공을 밝히던 순간 내 시선이 향한 건 그림자가 아닌 조원들이었다.
이제 됐어. 전부 살아서 나갈 수 있게 된 거야.
들판과 산맥을 뒤덮은 눈밭에 쏟아진 빛이 허공에 반사되면서 어둠을 전복시켰다.
이제 남은 시간은 일 분. 그 안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데.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천칭의 심판’이 종료되었습니다.] [던전 의 최종 보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못내 기다리던 활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비로소 안도한 나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 * *
그 순간 누군가는 설원 속에 파묻혔던 고개를 가누며 간신히 눈을 떴다.
환해진 상공에 떠오른 활자 주위를 가득 메운 금빛이 사위로 번지고 있었다.
“저건 분명…….”
누군가의 눈동자에 깨달음이 깃들더니 탄식과 함께 입꼬리가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