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67
67화. 경계 너머의 약속 (2)
짧게 골몰하던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기립해 상담실로 향했다.
긴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시끄러워졌어. 우리가 소식을 한발 늦게 접한 건가 봐.”
계단을 부지런히 올라 상담실이 자리한 복도에 들어선 지선일이 말했다.
문제혁은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 끄덕이더니 걸음을 재촉하며 나아갔다.
복도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다다른 상담실 주변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본 두 사람은 가볍게 노크하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선생님 오늘 출근 안 하신 것 아니었어요? 무슨 일인데요?”
문제혁이 소리 없이 문을 닫는 사이 지선일이 성큼 다가가 정건후에게 질의했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정건후가 그늘진 얼굴로 돌아보면서 손짓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앉아라.”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에도 창가를 내다보던 정건후는 한숨을 길게 흩뜨렸다.
이어서 맞은편 의자에 착석하고 말을 고르던 그가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오전에는 일이 있어서 이제야 출근한 거야. 모쪼록 인터넷에 성문 길드 얘기가 올라온 건 이미 알고 있겠지.”
“네, 방금 보고 왔습니다.”
문제혁이 먼저 대꾸하자 지선일이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어떻게 마석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할 수가 있어요? 그걸로 모자라 등급이 높은 건 던전 내부에 고의로 묻어 뒀다니요. 그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일인가요?”
지선일은 예의 그 직설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묻고 있었으나 스스로 느끼는 혼란을 갈무리하기 어려운 듯했다. 문제혁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어 덧붙였다.
“심지어 게시글 제목도 성문 길드의 만행을 고발한다는 식이던데요. 작성자는 성문 길드 소속 헌터인 것처럼 보였어요.”
잠자코 경청하는 정건후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피로해 보였다.
항상 멀끔한 차림새를 유지하던 그의 행색이 어쩐지 흐트러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너희가 말한 대로 구색만 보면 이것도 내부 고발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필 헌터 아카데미 학생들이 현장 실습을 나간 날에 터뜨린 걸 보면 사태를 키우려고 작정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문제혁의 곁에서 잠시 휴대 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던 지선일이 말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다시 보니까……. 말씀하신 대로 헌터 아카데미 얘기도 언급되어 있어요. 현장 실습용으로 제공하는 던전 일부에도 높은 등급의 마석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대요. 그런데 정확히 어떤 던전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하는데요?”
지선일이 말끝을 흐리면서 정건후를 넘겨다보았다. 그는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제혁은 차갑게 식어 가는 손끝을 주먹으로 힘껏 말아 쥐었다.
“성문 길드가 예전부터 뒤가 구린 일을 자주 도맡았다는 건 너희도 알고 있겠지.”
한참의 침묵을 깨뜨린 정건후가 두 사람과 차례로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했다.
“놈들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인터넷이나 SNS에 글이 올라온 건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때마다 폭로의 진위를 증명할 길이 없어서 잠잠해졌지. 뒤에서 따로 손을 쓰기도 했겠지만.”
잠시 말문을 맺은 정건후는 정갈하게 묶여 있던 넥타이가 느슨해지도록 잡아당겼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저 그런 낭설에 불과한 채로 일단락되지 않을 거야. 내가 너희만 따로 부른 것도 이 일과 관련이 있어.”
“설마……. 선생님, 아니죠?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어지던 정건후의 말에 곧장 대꾸하던 지선일이 문제혁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두 사람 모두 정건후를 마주치는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상담실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아직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낸 건 문제혁이었다.
그 말은 정건후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가공되지 않은 마석을 왜 던전에 묻어 두는 거예요? 설마 일부러 던전 등급을 상승시키려는 건가요?”
“정확해. 마침 잘 얘기했다.”
문제혁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고개를 주억인 정건후가 설명을 보충했다.
“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문 길드가 현장 실습용으로 제공한 던전 중 하나에 높은 등급의 마석이 묻혀 있다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너희 동아리 선배들이 그 던전에 들어갔어.”
그에 지선일과 문제혁이 동시에 반문하려 하자 정건후는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미 필요한 조치를 끝내 뒀기 때문이니까 내 얘기부터 마저 듣도록.”
문제혁은 절로 섬뜩해진 탓에 저릿저릿한 팔뚝을 주무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도해월의 모습과 그의 약속을 상기하고 있으니 혼란이 배가되는 듯했다.
“너희가 우려하는 일이나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동아리원들이 도해월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는지도 알고 있어. 나도 그 녀석을 믿고 있어서 억지로 말리지 않고 들여보낸 거니까.”
결국 시선을 떨어뜨린 채 차분하게 숨을 고르던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앉은 지선일도 마찬가지로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이상, 던전 브레이크를 생각 안 할 순 없겠지. 거기서부터 촉발된 재난은 사람의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자연재해와도 같다. 내가 취했다는 조치도 만에 하나 도해월과 다른 학생들이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거다.”
창문 너머로 고개를 틀고 가만히 바라보던 정건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건후는 한낮의 빛이 쏟아지는 쪽으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려 했던 건 일찍부터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어. 이건 순전히 어른들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너희도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게 됐으니 우선은 조용히 기다리라는 당부를 하려고 부른 거야.”
차츰 멀어지는 정건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선일이 말했다.
“정말 저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도 되는 건가요?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선배들을 걱정하는 건 저희 말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언제까지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요. 이건 선생님을 믿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에요.”
이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문제혁이 말했다.
“학교 측에서는 현장 실습에 참여한 학생들이 전원 복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이 사태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차민훈 선생까지 성문 길드에 있으니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창문 가까이에 선 정건후가 내리쬐는 빛에 눈살을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내가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려하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 우선은 나가서 다른 학생들의 동향부터 파악해 보도록 해. 이건 너희에게만 할 수 있는 부탁이라서 여기까지 부른 거니까. 그리고 이 실습이 끝나면…….”
이윽고 창틀을 등지고 돌아선 그가 다시 한번 두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도해월이나 다른 조원들이 곤란해질 일이 이것저것 생길 거야. 성문 길드가 고의로 마석을 수집하고, 던전에 방치했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면 지난 학기보다 더 큰 관심이 쏠릴 거다. 당분간 고생할 테니 옆에서 지켜보다가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
지난 학기에 도해월이 여기저기서 시달렸던 일에 대해서라면 문제혁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와 비슷하거나 더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이만 돌아가 봐. 나도 다시 나가 봐야 할 것 같으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 * *
어느덧 오후 수업을 차례로 마치고 마지막 교시 하나만 남은 순간이 되었다.
슬슬 중도 퇴장하는 조의 소식 정도는 전해져야 했으나 아직도 잠잠하기만 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던 문제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앞자리에 있던 지선일이 먼저 다가와 문 바깥을 가리켜 보였다.
“이번 실습은 유난히 복귀가 늦는 것 같지.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자.”
선선히 수긍한 문제혁은 지선일을 따라 교실 바깥으로 나섰다.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은 그나마 인적이 드문 복도의 끄트머리로 향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럴 때일수록 무소식이 희소식이더라.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네.”
층계참에 먼저 걸터앉은 지선일이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서 난간을 그러쥔 문제혁은 긴장되는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성문 길드 얘기는 이미 전교생 사이에 퍼진 것 같아. 이런 발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걸까. 솔직히 난 글 올린 사람이 성문 길드 소속 헌터라는 걸 못 믿겠어.”
“그 사람 헌터 라이센스랑 성문 길드 출입증 같은 것도 같이 올리지 않았어? 다들 그거 보고 확신하는 것 같던데.”
“너 이번에 글 올라온 게 어딘지 몰라?”
평소 그쪽으로는 알고 있는 정보가 딱히 없는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간략하게만 설명하면 그 사이트는 누구든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곳이야. 이용자 대부분이 비각성자이고, 성향 자체가 각성자한테 적대적이라 이런 식으로 길드 비리 같은 게 터질 때마다 자기들끼리 축제 열리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돼.”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이해한 문제혁은 괜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인터넷에 접속해 보았다. 이 사태부터 진정되고 나면 혼자 조용히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게 정말 성문 길드 소속 헌터의 내부 고발인지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인지 생각해 봐야겠지. 사실 난 이 얘기 듣자마자…….”
잠시 말을 멈춘 지선일이 고개를 뻗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침묵하는 동안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말을 이었다.
“강효서 선배 짓이라고 생각했어. 정확히는 차진명 선배.”
“나도 그 이름부터 떠올리기는 했어. 차진명 선배가 이번 실습에서 그간의 곤욕을 다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다들 얘기하기도 했고, 또.”
문제혁이 이어서 말하려던 순간 멀리서부터 복도가 울리기 시작했다.
“야! 실습 나갔던 선배들 던전에서 나왔대!”
누군가 쩌렁쩌렁하게 외친 소리를 따라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강효서 선배네 조가 제일 먼저 나왔대. 듣기로는 차진명 선배가 엄청 다쳤다는데?”
문간을 넘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전해진 건 차진명의 소식이었다.
자신의 자리에 천천히 앉으면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차진명 선배가 다쳤다고? 얼마나 다쳤는데?”
차진명과 관련한 소식은 지금 문제혁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후로 문제혁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던 이름들이 속속들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장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진 건 마지막 수업을 마친 직후였다.
수업을 마치는 즉시 누군가 뒷문을 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집중! 도해월 선배 조도 드디어 나왔대! 근데 이번에도 저번 학기처럼 무슨 일 있었나 봐. 다들 학교로 못 돌아오고 바로 헌터 전문 병원으로 후송됐다는데?”
“뭐? 이번에도?”
“낮에 인터넷에 올라온 글 때문인가? 아니겠지?”
“야,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만 들어도 존나 섬뜩해.”
도해월의 이름이 언급되던 순간 자리에서 우뚝 일어선 문제혁은 반사적으로 지선일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간을 넘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