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72
72화. 태풍의 눈 (3)
면담을 마친 나는 병실에 다시 들어서기 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같은 생을 두 번째로 살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 있다.
언제가 되었든 차정주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순간이 그러했다.
그와 마주 보고 있으면 넘어설 수 없는 산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얼굴에 차진명이 겹쳐 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면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복도를 돌아보았다.
실내는 어김없이 고요했으나 바깥에서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돌고 있을 것이다.
차정주가 학생이 입원한 병원에 직접 행차했다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퍼지게 될까.
짧게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미닫이문을 천천히 열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 기척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곳곳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왔어? 이사장이 뭐라고 해?”
“그 인간은 왜 너만 보러 온 거래? 진짜 잘 보여야 할 사람이 누군데. 존나 어이없네?”
“선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괜찮아? 무섭진 않았어?”
대답을 유예하면서 널찍한 내부를 가로지른 나는 설연호가 앉아 있던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순순히 자리를 내주는 그의 곁에 착석했다.
“다들 상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특별할 건 없었고.”
등받이에 뒷덜미가 닿도록 고개를 젖힌 나는 기력을 잔뜩 소모한 채로 눈을 감았다.
“야, 아무리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S급 헌터를 봤으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지. 설마 그게 끝이냐? 저 자식 또 싱겁게 구는 것 봐.”
대놓고 혀를 끌끌 차는 공희찬을 무시하면서 깍지 낀 손을 허벅다리에 얹었다.
이번 일로 설연리와 차정주의 이목을 끌게 된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무려 그 두 사람이 아직 B급도 되지 않는 나에게 함께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건 헌터 사회에서 상징적인 지표로 남게 될 것이다.
정계까지 거머쥔 S급 헌터와 미래의 리호 길드 마스터가 동시에 손을 내밀다니.
이 두 사람의 제안을 통해 웬만한 길드 관계자들의 속내까지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나와 조원들이 서둘러 학교에 복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 6학년인 나에게도 이렇게 관심이 오는데 특히 졸업을 앞둔 7학년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심지어 김미솔은 달해 쪽으로 마음이 반쯤 기울어 있는 터라 다소간 걱정이었다.
“해월이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소리에 깊이 감았던 눈꺼풀을 차츰 들어 올리면서 시야를 확보했다.
“저거 봐. 내 말이 맞지? 쟤 지금 혼자 다른 생각 하고 있었다니까?”
“차정주 이사장이 뭐라고 했길래 저렇게 넋이 나간 걸까요.”
넋이 나간 게 아니라 방금 눈을 떠서 그런 거야.
나는 서애란의 오해를 구태여 정정하지 않고 등받이에 편한 자세로 기대었다.
날이 갈수록 예민하게 살필 것이 늘었으나 동료들과 있으면 마음만큼은 편안했다.
“이제 몸은 거의 다 회복된 것 같아. 누워서 오전 내내 쉬다 보면 오후에는 선일이랑 제혁이가 와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 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니까.”
“학교랑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무슨 얘기를 들어도 남의 일 같아서 마음이 무겁지도 않아. 이대로 조금만 더 쉬면 안 되나.”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지선일과 문제혁이 전해 주는 소식은 날마다 험악해졌으나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만큼은 그다지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태풍의 눈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복귀하는 날부터 다시 폭풍 속으로 걸어가게 되겠지.
“거기다 종일 같이 있으니까 동아리 활동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이런 사소한 즐거움도 졸업하게 되면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벌써 아쉬워져.”
못내 아쉬운 듯 고개를 반쯤 숙이는 김미솔을 지켜보던 설연호가 동조했다.
“그러게.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생각날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벌컥 열리면서 지선일과 문제혁이 나타났다.
“저희 왔어요. 설연호 선배는 뭐가 생각날 것 같은데요? 또 저희 없는 동안 재미있는 얘기 중이었죠.”
나란히 들어선 두 사람은 투덜거리면서도 두 손에 나눠서 들고 있던 간식을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며칠밖에 안 됐지만 계속 여기로 하교하니까 동아리 모임을 밖에서 하는 기분이에요.”
그 말을 듣던 문제혁은 내가 앉은 소파 근처에 간이 의자를 끌어 착석했다.
“그러게. 안 그래도 선배들한테 들려줄 얘기가 산더미였는데.”
* * *
“대체 우리 없는 사이에 일이 뭐 이렇게 많이 생긴 거야?”
문제혁의 설명에 따르면 현장 실습 이후 학교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특히 나와 동료들이 들어간 던전에 높은 등급의 마석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를 동정하는 여론이 지배적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선배들이 얘기했던 것처럼 이 동아리는 대체 뭐 하는 곳인가 싶어서 들어오고 싶다는 애들도 생각 이상으로 많아졌어요. 현장 실습 전에 일찌감치 막아 둬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이야기하던 지선일이 은근히 어깨를 들먹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적당한 타이밍에 동아리에 들어왔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그런 지선일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져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곁에 앉아 있던 문제혁을 잠시 돌아보니 그 또한 편안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이번 생에서는 두 사람을 무사히 포섭할 수 있어 어찌나 다행인지 몰라.
“그런데 우리 쪽으로 동정 여론이 너무 기울다 보니까 정도윤 선배는 작정하고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요새 계속 혼자 다니는 것 같던데요.”
“정도윤 선배도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방관하고 모른 척했으니 이렇게 된 게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어요. 그 선배도 자기 잘못을 아는 것 같기도 했고요.”
지선일과 문제혁의 말을 차분하게 경청하던 서애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마저도 그렇게 보이도록 누군가 작정하고 분위기를 조성해서 그런 거겠지. 학교에 내 소문이 돌았을 때도 느꼈겠지만 차진명 선배는 그런 식으로 소리 없이 사람을 짓누르는 데 특화되어 있거든.”
나는 서애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동의하는 뜻을 담아 선선히 주억였다.
“안 그래도 차진명 선배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다들 여기 있으면서 그 선배 마주친 적 있어요? 어제까지는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선일이 묻는 말에 병원에 남아 있었던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차정주에게 전했던 대로 차진명 또한 이곳에 입원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막상 그의 모습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차진명이 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기에는 의료진을 비롯한 병원 직원들의 반응이 너무도 잠잠했다. 아무리 우리 병실과 거리가 멀고 인적이 드문 곳에 있다 해도 이렇게 조용할 순 없었다.
“그 선배랑 같이 들어갔던 조원들은 뭐라고 해?”
침대 헤드에 느슨히 기댄 채 베개를 끌어안고 있던 홍원하가 물었다.
“하나같이 차진명 선배가 던전에 들어가서 몬스터랑 대치하다가 크게 다쳤다고 하던데요. 마침 실습 다음 날부터 학교에도 안 나오고 있어서 그 전부터 돌던 소문은 싹 들어간 것 같았어요. 대신 정도윤 선배만 강효서 선배 조를 배신한 몹쓸 놈이 되고 말았고요.”
웃기지도 않지. 다른 조원들을 대신 희생하느라 크게 다친 차진명이라니.
“그리고 다들 그 얘기는 들으셨죠? 정도윤 선배가 불법 마석 가공물 가지고 다니다가 걸려서 선생님들이 물건 다 압수했다는 거요.”
“그거 진짜였대? 아니, 근데 불법 마석 가공물이 대체 뭔데? 뭘 가공했길래 개나 소나 다 들고 다니는 거냐?”
문제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공희찬이 덮고 있던 이불을 펄럭이며 반문했다.
가만 보면 공희찬도 모르는 게 생각보다 많은 것 같은데.
그러면서 허세는 꺾일 기미가 없는 것 보면 나날이 신기하다니까.
“저희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정도윤 선배한테서 압수한 물건들 교무실에서 털어 보다가 뭔가 나오기는 했다던데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 아무도 몰라요. 하필 그때 수색하던 게 정건후 선생님 한 명밖에 없었다던데요?”
“뭐가 됐든 그 소문 때문에 해월이가 고생한 것 생각하면 이제라도 누명 벗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대신 소식 전해 줘서 고마워.”
지선일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새겨듣던 김미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손을 뻗은 김미솔이 어깨를 매만져 주자 지선일도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인터넷에 폭로 글 올렸다던 성문 길드 소속 헌터는 어떻게 됐어? 그때 같이 올라온 라이센스 보니까 B급인 것 같던데.”
오늘까지도 기력을 회복 중이었던 설연호가 침묵 끝에 나지막하게 질의했다.
“그러게. 그 사람 진짜 성문 길드 소속 헌터인 건 맞대? 그 길드 소문이 어떤지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그걸 알면서도 제 발로 성문에 들어간 사람이 내부 고발 같은 걸 했을까?”
“저도 김미솔 선배랑 같은 생각 중이었어요. 정건후 선생님도 다른 배후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던 걸 보면 이것도 작정하고 꾸민 연극일지도 몰라요.”
외에도 폭로 글을 작성한 사람이 다른 길드의 스파이였거나 애초에 비각성자 세력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이어졌다.
여러 추측이 오가는 사이 내가 떠올린 건 5년 전에 헌터 아카데미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B급 각성 헌터였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용산 던전 브레이크의 여파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전해졌다.
그다음으로 등장한 B급 각성 헌터인 서애란이 같은 사태에서 목숨을 잃은 이후 자연스레 그의 이름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거론되었던 것까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한층 수척해졌으나 검고 깊은 눈동자만큼은 여느 때처럼 또렷한 서애란에게 눈길을 두고 잠자코 바라보았다.
서애란이 용산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 죽지 않았으니 그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다.
폭로 글의 B급 헌터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확정할 수 없으니 아직은 이른 추측일까.
하지만 그 글에서 헌터 아카데미의 상황과 현장 실습의 규칙을 서술하는 모양새가 유난히 자세했던 걸 보면 의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정도윤과 성문 길드의 행보는 학교에 복귀하고 나면 보다 자세히 지켜볼 수 있겠지.
나와 동료들이 던전 멸절의 설산을 공략하고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온 이상 성문은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차진명이 정도윤의 입지부터 꺾어 버린 건 내가 성문을 건드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손을 쓰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차진명의 잔꾀에 순순히 넘어가지 않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정건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었다. 성문을 상대로 진행될 소송에서 던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전부 기억하는 나와 조원들의 증언은 강한 효력을 발휘할 테다.
차진명의 수작에 맞불을 놓았으니 이제는 결과를 기다릴 차례다.
“해월이랑 연호는 언제 퇴원한다고 했지? 우리는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김미솔의 말에 설연호가 곁에 있던 나를 잠시 돌아보았다.
“우리는 내일모레까지 있으면 된다고 했어.”
내내 베개를 끌어안고 있던 홍원하가 침상에서 내려와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우뚝 서 있는 남산타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짧지만 행복했던 평화도 이제 끝이네. 그래도 우리 손으로 던전 브레이크 같은 재난을 막았다고 생각하면 다행이면서도 뿌듯해.”
눈이 그치면서 쾌청해진 하늘빛이 남산타워를 한층 선명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그 아래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맹렬하게 흔들리는 쪽으로 눈길을 틀었다.
나는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다음으로 무엇을 몰고 올지 상상해 보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맞서 싸울 준비는 항상 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