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73
73화. 핫초코와 작당 모의
지난여름에는 젤라또더니. 이제는 날이 추워져서 핫초코인가.
나는 얄팍한 종잇장 사이로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컵을 내려다보았다.
고동색 액체가 절반쯤 넘게 채워진 것을 보고 있으니 달콤한 향이 슬슬 퍼졌다.
낡은 자판기 앞에서 플라스틱 버튼을 꾹꾹 누르던 설연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뜨거우니까 잘 불어서 마셔.”
며칠 동안 병원에서 보내면서 안색이 한층 밝아진 설연호가 당부했다.
충혈되었던 눈까지 가라앉으면서 평소처럼 온화한 눈매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자신의 몫으로 핫초코 한 잔을 더 뽑은 설연호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듣던 대로 탁 트여 있으면서도 한적한 공간은 최소한의 관리만 이루어지는 듯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찾은 거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입을 떼기도 전에 말해 주는 덕에 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설연호는 종이컵에 대고 입김을 불어 식히면서 내가 있던 창가에 등을 기대었다.
“며칠 잠깐 입원하는 건데 누나가 자꾸 찾아오는 게 번거롭더라고. 나는 너희보다 상태가 안 좋아서 아래층으로 자주 내려가는 게 어렵기도 했고. 혼자 있고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찾은 곳이야.”
나긋한 어조로 설파한 뒤 알맞게 식힌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신 설연호가 말을 이었다.
“누나가 너한테도 찾아갔다는 얘기는 들었어. 두 사람 일이니까 뭐라고 했는지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혹시 누나가 너한테 실수하거나 불편하게 한 건 없지?”
설연호는 자기 누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이렇게 말하는 거지?
둘의 사이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할 줄은 몰랐는데.
“지난 학기에 길드 사무실까지 같이 가 봐서 알겠지만, 우리 길드에서 내 입지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야.”
굳이 리호가 아니더라도 어느 길드에서든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게 보편적이었을 테다.
헌터 사회에서의 인식을 생각하면 설연리가 그를 어떻게 대할지 대강 그려지기도 했고.
“분위기가 그렇게 된 건 마스터님이랑 누나 때문일 거야. 누나는 내가 살생하지 못하는 헌터라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불만을 숨기는 일이 없었거든. 지금도 정도만 달라졌을 뿐 그때랑 비슷한 편이야. 한마디로 누나랑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는 뜻.”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짐작하는 것과 직접 이야기를 듣는 건 확연히 달랐다. 지면으로 눈길을 떨군 채 담담하게 읊조리는 설연호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환멸이 느껴졌다.
“내가 아는 누나라면 너만 따로 불렀을 때 리호로 오는 건 어떠냐고 했을 것 같은데. 당연히 거절했겠지?”
“거절할 걸 알면서도 어떤 반응인지 떠보려고 묻는 것 같긴 했어.”
내내 설연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핫초코를 조금씩 마시던 내가 답했다.
혀끝에 미지근한 단맛이 번지면서 서늘했던 것이 한층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설연호는 이렇게 단 걸 어떻게 그렇게 잘 먹는 거지?
나도 모르게 의문하고 있으니 흘긋 바라보던 설연호가 말문을 열었다.
“아무튼, 생전 내 안부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이 거절하는데도 굳이 찾아오는 걸 볼 때마다 어찌나 불편하던지. 그래도 퇴원하고 나면 한동안 잠잠할 거야.”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설연호의 기준으로 잠잠하다는 게 어떤 건지 고심해 보아야 했다.
지금처럼 세상이 떠들썩해질 만한 소란만 아니면 잠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두 사람 사이의 사정이니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으므로 생각을 거두었다.
이내 고개를 젓고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신 나는 다른 자세를 곧게 세웠다.
어느덧 2학기 현장 실습까지 마치고 방학식까지 앞둔 상황이 되었다.
내내 고심한 것처럼 설연호를 다른 길드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다른 애들도 다 무사히 퇴원했고, 상황도 얼추 정리됐으니까 우리끼리 실습 복기 해 볼까? 좀 늦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둘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음,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이번 학기 현장 실습은 복기를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는 건가? 이건 뭐, 답이 없네.”
현장 실습 담당 교사가 차민훈으로 바뀌면서 이때까지의 체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성문 길드와의 연관성을 추궁당하던 차민훈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대놓고 발뺌을 하더니 이제는 그와 관련한 업무는 꼭 필요한 것만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응, 어제 너 없을 때 애들한테 듣기로는 현장 실습 채점도 정건후 선생님한테 다시 돌아갔다고 하더라. 하지만 정건후 선생님도 다른 일로 이미 바빠서 복기까지는 어렵다고 했고.”
애꿎은 정건후만 차민훈이 만든 개판을 수습하게 된 꼴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연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깨어난 직후에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묻지 못했는데……. 이번에 발생할 수도 있었던 던전 브레이크를 막은 건 결국 네가 가진 그 검 때문인 거지? 던전 내부에 힘이 전부 미칠 정도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 같던데.”
나도 유스티티아의 검이 가진 영향력을 모르진 않았다. 어쩌면 이 물건이 차진명이 멸망을 감행하는 데 도움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위엄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선배 말이 맞아.”
간결하게 대답한 나는 한숨을 흩뜨리면서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혹시 그거 기억나? 우리 어릴 때, 2014년 정도였지. 그때 네가 가진 거랑 비슷한 물건이 사라진 적 있었잖아.”
설연호는 성물이라는 단어 자체는 언급을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기억나. 게니우스의 창을 말하는 거지.”
덤덤하게 뱉는 내 말에 설연호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끄덕거렸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해도 돼? 아무튼, 사라진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감감무소식인 걸 보면 사냥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손에 들어간 건가 싶어서. 너도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성물 사냥꾼을 거론하는 걸 보니 그가 지금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가 됐다. 무엇보다 검의 위력을 확인하게 되면서 게니우스의 창을 떠올린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게니우스의 창의 행방에 대한 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잠잠했다고 해서 영영 잊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물건이었다.
기껏 목숨을 바쳐 유스티티아의 검이 차진명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는데.
혹여 게니우스의 창을 차진명이 갖게 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때 그 물건을 습득한 사람은 젊은 편에 속하는 A급 헌터라고 언급하는 걸 뉴스에서 봤었어. 그러다 성물을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고 했었지.”
말문을 맺을 즈음 잠시 멈칫하던 설연호는 아차 싶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성물을 습득한 인물의 죽음을 언급한 것이 실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느새 빈 종이컵을 내려놓은 나는 멀찍한 곳에 선 자판기에 시선을 두었다.
나를 따라서 고개를 돌리던 설연호도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길게 이어지려던 침묵을 깨뜨리고 고개를 돌린 건 설연호였다.
“여름방학에 진행한 소모임도 잘 마무리되었고, 동아리까지 꾸렸으니 너의 진짜 목표라고 했던 커뮤니티는 어떻게 만들지 슬슬 고민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지난번에 김미솔 선배가 선뜻 얘기를 꺼내 줘서 다행이었지. 그 선배한테 따로 얘기한 건 없었는데도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방향을 제시해 준 것만으로 선방이라고 할 수 있고.”
내가 하는 말에 선선히 수긍하던 설연호가 말을 이었다.
“네가 얘기했던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타이밍이 됐네. 체스의 폰 같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싶다고 했던 생각은 여전한 거지?”
“여전해.”
“이번 현장 실습도 그렇고, 인터넷에 성문 길드에 대한 폭로가 계속 올라오면서 정도윤은 물론이고 강효서나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판도 나날이 떨어지고 있더라.”
차진명이 스스로 계획한 일이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꼬리를 빼고 도망간 일이 나에게 한층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정도윤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물먹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할 테니 강효서가 시키는 대로 했다가 제대로 뒤집어쓰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면서 설연호에게 대답했다.
“김미솔 선배도 그렇고 강효서 선배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다지 적은 것 같지도 않던데. 암암리에 알려져 있는 와중에도 비밀이 지켜졌던 건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불만을 안전하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창구가 없었다는 뜻일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설연호 사이에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이전 생의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용산 던전 브레이크까지 무사히 막아냈으니 다음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
“그럼 커뮤니티까지 만든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봤어? 우린 곧 졸업하고, 너도 커뮤니티 만들고 1년 뒤엔 졸업하게 될 텐데.”
커뮤니티를 계속 관리하고 화력을 꾸준하게 유지하기 위해선 학교 동아리 규모로 운영하는 것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게다가 방학이 지나가고 7학년이 졸업하는 건 그렇다 치고, 나 역시 일 년이 지나 졸업할 테니 그 너머까지 바라봐야겠지.
이때까지 나와 함께했던 설연호라면 전생과 같은 행보를 걷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처럼 상명하복이 아닌 조력자이자 같은 길드원의 관계로 진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지난번과 달리 결론보다 과정에 더 심혈을 기울이려 하니 고민이 많아졌다.
그대로 대답을 유예하던 나는 우선 생각나는 것들을 나열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재난은 우리가 막아 낸 것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참혹해진 형태로 반복될 거야. 그 모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수는 없어도 어떻게든 손을 뻗을 기회가 있다면 관여해 볼 생각이고.”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숨을 고르면서 설연호에게 눈길을 틀었다.
“내가 했던 말을 어떤 식으로 이행하는지 이번 일로 충분히 느꼈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 이제는 방금 한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거나 불가능한 가설이라고 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게.”
설연호의 반응을 기다리고자 입을 굳게 다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머지않아 시선을 지면에 내리깐 채 아랫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끄덕거렸다.
“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뒤에는 내 손으로 직접 운용할 수 있는 길드를 꾸릴 생각이야. 지금까지 학교라는 울타리가 우리를 지켜 준 것도 맞지만 그만큼 제약도 많았으니까.”
그즈음부터 설연호에게서 시선을 거둔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리호가 선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거긴 선배의 집이니까. 하지만 던전 공략에 매진하는 헌터로 활동하고 싶다는 목표는 나와 함께 있을 때 제대로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어.”
리호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움찔하던 설연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본래의 표정을 되찾은 그는 종이컵을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리호를 두고 돌아서서 앞으로 네가 만들 길드에 들어와 달라는 거지?”
나는 팔짱을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설연호의 표정이 한층 복잡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생각해 볼게.”
간결한 대답을 끝으로 나와 설연호는 각자의 병실로 흩어졌다. 학교에 돌아가는 날이 되어서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