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74
74화. 폭풍 속으로
학교에 복귀한 뒤 가장 먼저 나를 찾은 사람은 정도윤이었다.
나는 그가 언급한 시간보다 느지막하게 층계참을 밟으며 올라섰다.
약속 장소는 9층 화장실이었다. 이곳을 택한 건 순전히 우연이겠지.
그럼에도 이곳에서 정도윤을 만난다는 것 자체만으로 감회가 새로워졌다.
녀석과 단둘이 대거리하는 것은 이전 생에서도 없던 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매번 다른 놈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더니 처지가 달라지니 마음이 급해졌나 보네.
목적지에 다다른 나는 문손잡이를 느릿하게 밀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화장실 내부는 인적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느슨하게 꽂아 넣고서 구석진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전생의 내가 아닌 정도윤의 모습에 현재의 나를 겹쳐 보며 눈을 감았다.
그때도 정도윤은 제 손을 더럽히는 일이 없었지.
차진명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겨울날에도 마찬가지였고.
바닥에 쏟아진 찬물이 웅덩이를 만들고 그 위로 여러 발자국이 한데 얽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도윤은 자신의 신발 밑창에 물이 묻는 게 거슬린다며 바닥을 발로 걷어찼다.
정도윤이 일으킨 물살이 내 얼굴을 흠뻑 적셨다. 그러자 곁에 있던 놈들까지 낄낄거리면서 척척해진 바닥에 대고 발을 굴렀다.
락스 섞인 물을 뒤집어쓴 나머지 눈가와 코끝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나는…….
“미안. 내가 좀 늦었지.”
머지않아 묵직한 문이 앞뒤로 흔들리면서 정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뜨고 녀석을 돌아보니 바지 밑단이 서늘하게 젖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들어서자마자 말로만 사과를 전한 정도윤은 차분하게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어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맞은편에 선 나를 힐끔 쳐다봤다.
“아, 잠시만.”
이게 지금 부탁하려는 사람의 태도인가.
지난여름 이곳에서 마주했던 공희찬이 대놓고 으스대는 꼴을 보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정도윤은 자신의 위신이 어디까지 처박혔는지 실감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할 말 없으면 가도 되지.”
내가 간결하게 내뱉자 정도윤이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잠시 다급하게 휴대 전화를 집어넣고 간절한 얼굴로 청했다.
“너도 지금 우리 길드 상황이 어떤지 들어서 알지. 너희 때문에 우리 길드 망하게 생겼어. 제발 소송 들어가기 전에 네가 했던 증언 철회해 주라. 사람 하나 살린다 치고. 제발.”
“싫어.”
“어? 아, 그래도 좀 더 고민해 보고 대답해 봐. 사람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정도윤은 이어서도 무어라 떠들어 댔으나 나는 그의 말을 반쯤 흘려서 들었다.
“몇 번을 얘기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싫어.”
이내 나는 그가 일전에 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로 소맷단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너 내가 약속했던 것보다 늦게 와서 그래? 내 말부터 제대로 듣고 대답해. 어? 도해월, 너 내 말 안 들려?”
“싫다고.”
이어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도 한계에 다다른 건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젓던 정도윤은 어깨를 한껏 으스대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왜 거기서 안 죽고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서 애먼 사람한테 엿을 먹이냐.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등신 같은 짓은 안 해도 됐을 텐데.”
그래, 이렇게 나와야 정도윤이지.
이때까지 정도윤이 방관만 하면서 몸을 사렸던 건 유일하게 남은 직계 가족이자 성문 길드의 마스터인 A급 헌터 정도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수월하게 정리됐을 거야. 웬 버러지 같은 게 끼어들어서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곤란하게 됐어.”
그러다 난데없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정도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리한다는 건……. 혹시 서애란을 말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반쯤 기울이면서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정도윤은 차진명의 계획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우선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 같은 게이트 고아 새끼 하나 조지는 건 일도 아니야. 내 손 닿기도 전에 처리할 수 있다고.”
정도진이 성문 도련님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는 이유를 알겠네.
하도 곱게 자라서 그런가. 이렇게까지 철딱서니가 없어서야.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그 틈으로 대놓고 비웃는 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나마 등에 업었던 성문도 고꾸라질 판에 게이트 고아 같은 게 대수인가?”
한껏 우습게 여기는 걸 눈치챈 건지 무어라 반박하려는 정도윤의 말을 저지했다.
“그렇게 간절하면 부탁하는 태도부터 다시 배워. 도련님이라고 불리던 세월 동안 성문에서 배운 게 그따위 천박한 말버릇밖에 없는 건가 싶어지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젓고는 정도윤을 지나쳐 화장실을 벗어났다.
* * *
9층에서부터 천천히 층계참을 밟고 내려오던 나는 주위의 반응을 살폈다.
이전 학기와 달리 가까이 다가오거나 대놓고 말을 붙이는 이들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인파가 군집해 있는 쪽을 지나갈 때는 나서서 비켜 주기도 했다.
나는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교장이 미리 손을 썼나 본데.
잠자코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또 다른 이름이 떠올랐다. 어쩌면 교장의 뜻만 반영된 게 아니라 차정주가 교장에게 내린 지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해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정면 보고 똑바로 걸어야지. 그러다 넘어지겠다.”
복도의 오른편에 난 창가에 허리춤을 기대고 서 있던 홍원하가 말했다.
“오랜만에 학교 오니까 어때? 나는 처음 하루까지는 좀 어색했거든…….”
그 곁에 서서 손을 흔들어 보이던 강준희가 따라서 덧붙였다.
“나쁘지 않아. 그나저나 지선일이랑 문제혁이 전해 준 거랑 다르게 분위기가 생각보다 조용한 것 같은데. 나랑 설연호 선배 돌아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어?”
“아, 너랑 선배 오면 다시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그새 잊고 있었네. 애들 말로는 이사장이 교장 선생님한테 면학 분위기 제대로 조성하라고 했다더라. 우리야 편하고 좋지, 뭐.”
며칠 전의 나는 병원에 직접 찾아온 차정주의 제안에 완곡하게 거절했었다. 그러나 차정주는 아직 설득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지 계속 지켜보겠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 전해 오는 듯했다.
“그보다 차진명 선배는 아직도 학교에 안 돌아왔다며.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내 질문에 서로를 잠시 바라보던 두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이어 홍원하가 대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어차피 방학이 코앞이기도 하고, 다쳤다고도 했으니까 아예 일찍 귀가한 건 아니냐고 하더라.”
나는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리면서 수긍하고는 강준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애들한테 들은 게 있었거든……. 의외로 이번 실습에서 강효서 선배네 조가 부진했다고 하더라. 던전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을 안 해 준다고 했어…….”
자세한 정황은 파악할 수 없어도 그날 차진명과 관련하여 일이 생겼다는 건 분명했다.
강준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일전에 맞닥뜨린 정도윤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소송은 그대로 진행하는 것 같더라. 혹시라도 정도윤이 너희한테 찾아와서 증언 철회해 달라고 해도 그냥 무시해.”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수긍하는 모습을 본 뒤 각자의 교실로 흩어졌다.
* * *
별생각 없이 들어선 교실에서는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모든 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으나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지시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러는 게 더 부담스럽다니까.
제발 눈치 좀 그만 보라고 교내에 다 들리도록 방송이라도 하고 싶네.
숨을 쉬기만 해도 수백 개의 눈동자가 따라붙는 일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옷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나는 훌쩍 일어나 교실을 벗어났다.
고심한 끝에 내가 향한 곳은 동아리실이 자리한 별관이었다.
인적 하나 없이 고요한 복도를 거닐고 있으니 한층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수업이 마치려면 한참 남았으나 조금만 쉬고 갈 생각으로 동아리실에 들어섰다.
“해월이 네가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야?”
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서니 기척을 따라서 벌떡 일어난 설연호가 보였다.
“아, 너도 교실에 있다가 답답해져서 여기까지 왔구나. 잘 왔어.”
나긋한 어조로 혼자 묻고 답하던 설연호는 소파에 다시 착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맞은편에 놓인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몸은 좀 어때.”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어. 걱정 안 해도 돼.”
설연호의 대답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반쯤 열린 커튼 너머에서 하염없이 날리는 눈송이에 시선을 두었다.
“병원에서 해월이 네가 얘기했던 건 계속 생각해 봤어.”
나는 그제야 고개를 틀면서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아마 다른 동료들이 먼저 퇴원하고 나와 설연호만 남아 있던 날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음, 사실 여름에 소모임을 계획할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네가 길드를 만들겠다고 했던 말에 놀라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고.”
대답하는 대신 담담하게 읊조리는 설연호를 바라보면서 길게 내쉰 숨을 흩뜨렸다.
“바로 대답하지 않았던 건 너한테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래, 얘기해 봐.”
설연호의 말을 선선히 경청하던 나는 약간의 틈을 두고 대답했다.
내 대답까지 들은 설연호는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나랑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길드까지 창설하려고 하는 이유가 차진명 때문이야?”
역시 예리하다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바로 짚어 낼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그렇게 생각한 건데?”
반사적으로 묻는 내 말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설연호라고 해도 강효서도 아닌 차진명의 이름을 곧바로 거론할 줄은 몰랐으니까.
“혹시 걱정할까 봐 미리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을 거야. 나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거든. 음, 언젠가부터 네가 그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달라지는 게 느껴졌어.”
거기까지 듣던 나는 턱을 조금 치켜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설연호는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하다가도 금세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마다 찰나 동안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게 아니라는 건 금방 구별할 수 있겠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번째 생에서 만난 설연호와 내가 어떤 분기점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첫 번째 현장 실습이 끝난 뒤 설연호에게 자신했던 대로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냈고, 그는 나에게 부재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동료가 되었다.
앞으로도 그와 함께할 것을 결심하는 이상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설연호에 의해 간파당하는 속내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설연호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눈앞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설연호였기에 더욱 신중히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으니 설연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름에 젤라또를 먹으면서 약속했던 것 기억하지. 내가 했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게 되면 가장 먼저 알려 준다고 했었잖아.”
“그랬었지. 기억나.”
그때의 기억을 되짚고 있으니 불편하게 고여 있던 숨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네가 가진 그 검으로 어떻게 재난을 막을 건지에 대한 건 이번에 던전을 공략하면서 충분히 들었으니 이번에는 질문을 바꿔 볼게.”
“그래.”
“앞으로 네가 뭘 하려는 건지, 네가 차진명한테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 대답해 줘. 물론 이것도 네가 스스로 확언할 수 있을 만한 답을 찾은 이후를 가정하는 거야.”
올곧은 자세로 나를 바라보면서 설파하는 설연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되 내가 느끼는 곤란한 심정을 배려하는 모습은 지난여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번에도 답을 찾게 되면 나한테 가장 먼저 알려 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네가 창설할 길드에 가입할게. 그게 내가 생각한 가입 조건이야.”
그 순간 설연호와 나 사이에 새로운 분기점이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