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75
75화. 방학식
“한 학기가 생각보다 빨리 끝난 기분이야.”
이른 아침,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던 물을 마시던 문제혁이 말했다.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정돈하던 나는 그 모습을 돌아보았다.
“새로운 곳에서 한 학기를 끝낸 소감이 어떤지 궁금하네.”
소감이라니. 내가 묻고 있었지만 어쩐지 낯간지러운 단어였다.
그러면서도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오면 어쩌나 싶어 내심 긴장되었다.
“음.”
물을 몇 모금 더 마신 문제혁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형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평소와 다름없는 손길로 교복을 정돈하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방금 그건 전생의 문제혁에게도 들어 본 적 있었던 말이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타이밍인 듯했다.
이전에는 내가 묻기도 전에 넌지시 꺼낸 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문제혁은 매사 무던하고 감정 표현 자체가 적은 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속내를 선뜻 전하는 일 또한 흔하지 않았다.
한때는 눈앞의 일이 전생과 다르게 흘러가는 걸 마주할 때마다 당황스러워했었다.
그래서인지 생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한 것들의 존재를 실감하게 되면 내심 안도하게 된다.
그즈음에서 나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 창문을 내다보았다.
“오늘 아침에도 폭로 글 올라왔더라. 확인해 봤어?”
“응, 벌써 네 번째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게 보이더라.”
나와 동료들이 학교에 복귀한 뒤 현장 실습 결과 채점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넷에 성문 길드와 관련한 폭로가 연이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학교 내의 여론은 폭로의 내용대로 선동되었고 언론에서도 성문 길드의 입지가 점점 추락하는 과정을 집중해서 다뤘다.
그런 와중에 성문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머지 그들에 관하여 떠도는 말들의 수위가 점점 신랄해지는 중이었다.
반면 예상대로 성문을 제외한 다른 길드에서는 나와 동료들의 행방을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졸업이 예정된 7학년을 유심히 보고 있다는 얘기가 계속 들려왔다. 그러다 리호의 설연리와 설연호 사이의 불화설도 불거지더니 뭇 길드 관계자들이 설연호와 마주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오늘 방학식에 참여하는 외부 길드 인사 중에 달해 길드장도 있대. 듣기로는 그쪽에서 오는 건 처음이라고 하던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제혁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형,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얘기해”
“혹시 달해 길드에 있는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어? 그 얘기만 나오면 반응이 별로인 것 같아서.”
굳이 묻지 않아도 이건 문제혁만 아는 변화일 것이다.
문제혁은 이따금 내가 인지하지 못한 감정의 결까지 읽어 내고는 했으니까.
나는 문제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잠시 고민했다.
전생을 떠올릴 때마다 두고두고 아쉬웠던 것이 문제혁과의 관계였다.
이번 생에서는 관계가 틀어졌던 사건의 뿌리를 뽑아 버렸으니 달라질 수 있겠지.
선배들의 졸업을 기점으로 새로운 세력을 확립할 계획 중인 지금은 가장 가까운 조력자의 도움이 절실하기도 하다. 그러니 이제는 문제혁과 계획을 공유하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달해 길드가 여름방학부터 김미솔 선배랑 컨택 중이라고 하더라.”
“아,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어. 여름방학부터 꾸준히 컨택이 오는 건 흔하지 않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그쪽에서는 마음을 굳힌 것 같던데.”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 잠시 기다렸다. 문제혁이라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내 말의 저의를 수월하게 짐작해 낼 것이다.
“혹시 김미솔 선배가 달해 길드에 입사할까 봐 걱정되는 거야?”
조심스럽게 묻던 문제혁이 이내 침묵했다. 그대로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언가 더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김미솔 선배가 졸업한 뒤에도 같이 활동하고 싶어서 그런 거구나.”
역시 명쾌하다. 나는 문제혁과 눈을 마주치면서 수긍했다.
“내가 졸업하는 대로 바로 활동할 수 있도록 길드를 만들 생각이야. 이번 현장 실습에서 함께한 동료들을 전부 데려오는 게 목표고.”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짧게 감탄하던 문제혁의 입가에 깨달음의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형이 달해 길드 얘기만 나오면 예민해졌구나. 이제 이해가 되네.”
이어서 문제혁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두 사람 모두 아침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터라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다.
“김미솔 선배라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 같은데.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자고 먼저 얘기한 것도 그 선배였잖아. 또 동아리 활동에 가장 애정을 가진 것도 그 선배니까.”
정확한 분석이었다. 나는 그에 동조하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길드에 들어온다는 건 단순히 학창 시절의 즐거운 기억만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네 말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야.”
넥타이를 단정하게 정돈한 문제혁은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창가를 한차례 내다본 뒤 마저 이야기했다.
“학생일 때는 학교가 울타리였지만 졸업한 뒤에는 자기가 속한 길드의 이름이 또 다른 울타리가 될 거야. 그러니 보여 줘야겠지. 내가 세울 길드를 기꺼이 선택해도 좋다는걸.”
말문을 맺으면서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내가 했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동료들이 나와의 동행을 결심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객관적일 수 있기를 바랐다.
* * *
“지금부터 2026학년도 2학기 동계 방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나긋한 어조의 학생회장의 사회를 따라 식순이 차례로 진행되었다.
무대 중앙에 놓인 단상 좌측에는 내빈을 위한 좌석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지난 학기와 달리 차정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게 더 자연스러운 그림이다.
대신 이번 방학식에는 내빈석의 자리한 외부 길드 마스터의 수가 이전보다 늘어 있었다.
“이번에는 이사장님 안 와서 아쉬워. 진명 선배 때문인가?”
“아쉬울 게 뭐가 있냐. 이사장이 여기까지 오는 게 말이 안 되는 건데. 그나저나 길드 마스터들이 이렇게 많이 온 것도 처음인 것 같지?”
근처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한숨과 함께 흩뜨리면서 단상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식순의 첫 순서를 마치고 평소보다 긴장한 듯한 교장의 연설이 이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드넓은 강당을 빼곡하게 채운 행렬을 살피고자 고개를 틀었다.
머지않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동료들의 얼굴을 하나씩 찾아낼 수 있었다.
“지난 학기에 이어 너무나도 송구스러운 말씀을 다시 전하고자 합니다. 이번 학기에도 우리 헌터 아카데미의 현장 실습에서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이 발생했었지요. 그럼에도 우리 학생들이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여 더 큰 사태를 막아 준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해당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심심한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렇게나 길게 설파하는 걸 보니 교장은 지금 길드 마스터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거다.
성문 길드의 일을 계기로 다른 길드들의 반응 또한 좋지 않은 것을 의식하는 거겠지.
자연스레 정면으로 가누었던 고개를 틀고 길드 마스터들의 행색을 천천히 살폈다.
리호 길드의 설연진 마스터는 언제나처럼 꼿꼿한 기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곁에는 정건후가 도움을 요청했다던 취우 길드의 김희준 마스터 눈에 띄었다.
당연하게도 매번 참석하던 성문 길드의 정도진 마스터는 부재한 상태였다.
듣기로는 정도윤도 며칠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교장이 단상에서 물러선 다음의 식순은 대체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번 학기는 최우수 조장 선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덕분이었다.
“이상으로 2026학년도 2학기 동계 방학식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학생회장의 마지막 안내를 따라 식순의 모든 과정이 종료되었다.
최우수 조장을 선정하지 않은 탓에 장내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다.
곳곳에서 아쉬워하거나 의문을 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새겨듣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지난 학기의 내가 올라갔던 무대의 중앙을 올려다보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지난 학기에 내가 올랐던 자리에는 눈이 부실 만큼 밝고 환한 조명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곳에서 맞은편을 내다보면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히 어둡고 흐릿하게 보일 터였다.
지난 학기의 나는 그들 중에서 아직 찾지 못한 부대원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 순간 내가 딛고 선 무대의 경계선이 새로운 출발처럼 느껴졌었지.
출발선 너머로 내달려 마침내 되찾은 이름을 곱씹고 있으니 감회가 다시금 새로워졌다.
“잠깐 나 좀 보자.”
학생회장의 안내를 끝으로 소란한 인파 사이를 헤집고 나타난 정건후가 손짓했다.
이윽고 인파가 몰리지 않는 구석진 자리로 나를 데려간 정건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예의 주시 할 수 없을 테니 특별히 더 조심하도록 해. 이번 학기에도 기숙사에 남는다고 들었는데. 맞지?”
나는 정건후를 따라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틀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이번 방학에는 취우 길드장을 만나 보는 게 어떤가 싶은데. 물론 사적으로 중개 같은 걸 하려는 목적은 아니야. 지난번 일과 관련해서 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더라.”
취우 길드의 마스터인 김희준은 정건후와 사이가 막역한 A급 헌터였다.
그런 그에게 정건후가 믿고 손을 내밀었다고 했으니 고민해 보는 게 좋겠지.
“그쪽에서도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하니 생각해 보고 얘기해라.”
무엇보다 후일에 길드를 창설하고 이끌기 위해서는 다른 길드 마스터들과 안면을 트고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만나 봐서 나쁠 건 없을 거다.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건후는 이어서 대답하는 대신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 강당을 빠져나갔다.
소란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던 나도 뒤이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어, 해월이 왔네. 얼른 들어와.”
동아리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미솔이 가장 먼저 손을 흔들었다.
“우리 지금 인터넷에 기사 올라온 거 보고 있었어. 너도 와서 봐.”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면서 몸을 들이자 홍원하가 나에게 손짓했다.
“지난 학기에는 기사에서 분명 우리가 어떻게 그 던전을 빠져나왔는지 초점을 맞췄던 거 기억나지? 근데 이번에는 성문 길드가 무조건 잘못했다는 쪽으로 몰아가더라……. 아예 작정하고 이러는 건가 싶어서 보고 얘기하고 있었어.”
이어지는 강준희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내미는 휴대 전화를 받아 들었다.
화면에 뜬 기사를 훑어보니 말해 준 그대로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강효서 선배 쪽에서 손을 쓰고 있는 거겠지. 언론 조작하는 건 그쪽 집안 전문이니까.”
칠판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아 조용하게 있던 서애란이 입을 열었다.
나는 서애란의 말에 동조하며 손뼉을 맞부딪힌 뒤 시선을 한데 모았다.
“서애란 말대로 당분간은 비슷한 논지의 기사만 올라올 거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만한 소식이 있으면 전해 줄게. 그럼 이번 방학에는 어떻게 할지 얘기해 볼까.”
“너희 뭐, 커뮤니티? 그런 거 만든다고 하지 않았냐? 어떻게 할 건데?”
의자에 반쯤 늘어져 있던 공희찬이 자세를 세우면서 기지개를 켰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 닫혀 있던 동아리 교실의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