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76
76화. 또 다른 분기점
“이 시간에 누구지? 우리 말고 올 사람 더 있어?”
홍원하가 반사적으로 일어나더니 문가를 향해 다가가면서 물었다.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저으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얻는 것이 보였다.
“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 봐라. 방학식 날까지 모이는 극성 동아리가 우리 말고 누가 있겠냐? 빨리 열어 보기나 해. 여기까지 누가, 대체 왜 온 건지 궁금하니까.”
언제나처럼 다리를 꼰 자세로 발목을 까딱거리던 공희찬이 고갯짓했다.
“오늘까지 시간 내서 기껏 모였는데 사기 꺾을 거면 그냥 돌아가도 돼요…….”
강준희가 넌지시 중얼거리는 소리에 팔을 내밀어 저지하던 나도 홍원하에게 눈짓했다.
그 소리에 공희찬이 눈을 흘기자 강준희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문앞에 사람 세워 두고 싸울 생각 아니면 그만해. 얼른 열어 봐.”
서로를 바라보며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서애란과 지선일도 문간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김미솔을 바라보던 홍원하가 천천히 문을 열자 낯선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잠깐 들어가도 되지?”
어깨선까지 내린 단발머리에 흰 얼굴을 가진 여학생이 문간을 넘어섰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약속했던 건 며칠 뒤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잘 왔어.”
어느새 홍원하의 근처로 다가선 김미솔이 여학생과 익숙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까지 보고 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금세 감이 잡혔다.
“오늘 아침에도 인터넷에 글 올라왔던데. 그것까지 보고 나니까 너희는 어떻게 있을지 궁금해져서.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온 건 미안.”
여학생이 똑 부러지는 어조로 이야기하는 동안 반듯하게 잘린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렸다. 말문을 맺으면서 시원스레 웃음 짓는 입가에 잠시 눈을 두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곁에 있으니 한층 작아 보이는 김미솔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고심했다.
이내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의식한 건지 고개를 저으면서 모여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너희한테 인사부터 하는 게 먼저겠지. 현장 실습 전에 모여서 잠깐 얘기했던 것처럼 커뮤니티를 만들게 된다면 서버랑 홈페이지를 전문적으로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았어. 그래서 얘기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정인이었어. 그쪽으로는 전문이라고 들었거든.”
여학생과 나란히 선 김미솔이 설명을 잇자 다른 이들이 그제야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자신의 소개를 하려던 여학생을 막은 건 공희찬이었다.
“아, 나 쟤 알아! 쟤 걔잖아, 고정인. 이번 학기 중간고사에서 부정행위 했다가 걸려서 한국마력연구소 취업은 완전히 막혔다는 애.”
그것까지 듣고 보니 지난 동아리 모임에서 김미솔이 스치듯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해서 대강 넘겼던 걸로 기억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들어오자마자 꺼낼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마 그때 걸린 부정행위로 한국마력연구소 취업은 어렵게 됐다고 했었지.
좀 지난 일이기는 해도 주눅 들지도 않고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오다니. 신기하네.
게다가 선하게 웃는 얼굴로 공희찬과 맞서는 모습을 보니 어떤 성미를 지녔는지 어느 정도 읽히는 듯했다. 혹시 부정행위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 잘못을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내막까지 알고 보면 덮어 놓고 욕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서인지 시험이 끝난 이후로 학교에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을 때도 지켜보는 동안 마음이 유난히 편치 않았어.”
고정인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나와 서애란을 차례로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너희 동아리를 유심히 지켜보게 된 것도 내가 겪었던 고충을 비슷하게 겪는 것 같아서 눈길이 가더라.”
잠시 말문을 맺으면서 다문 입술이 습관적으로 호선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시종일관 웃고 있는 와중에 안광까지 선명한 나머지 속내가 읽히지 않았다.
앞으로 고정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거라면 검증은 분명히 해야 했다.
나는 다른 이들의 이목이 고정인에게 머물러 있는 사이 잠시 눈을 감았다.
[스킬 ‘공정한 판별자’가 발동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지닌 악의를 측정합니다.]그대로 눈을 뜨면서 시야를 다잡고 있으니 뒤이어 푸른 활자가 다시 떠올랐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는 ‘0%’입니다.]다행히 맑은 눈으로 어딘가 뒤틀린 헛소리를 설파하는 쪽은 아닌가 보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감정’은 ‘강한 호기심’,‘지극한 감사’, ‘보답의 욕구’입니다.]전자는 그렇다고 쳐도. 지극한 감사와 보답의 욕구? 무슨 의미지?
나는 전생에서도 만나 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인 고정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런 나와 달리 색이 밝은 홍원하의 눈동자가 여기저기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까 고정인이 자기가 겪은 고충을 말하면서 서애란이랑 날 쳐다봤었지.
혹시 우리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종류를 말하는 거였나?
“솔직히 잘못의 경중만 따지면 나보다 강효서랑 그 패거리가 먼저 잡혔어야 한다고 생각해. 정말 간절한 마음뿐이었던 나를 골로 보낼 게 아니라.”
“말씀 중에 죄송한데, 그게 무슨 의미예요?”
깍지 낀 손을 허공에 띄운 채 차분하게 말을 잇던 고정인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선일이 긴 머리카락을 넘기며 곧바로 되묻자 대답이 이어졌다.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강효서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지 않잖아? 다른 애들도 서애란을 받아들인 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효서도 이유 중 하나 아니야?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고정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고 담백하게 털어놓았다.
“그때는 그냥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확 죽어 버릴까 싶었는데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 그러다 서애란이 이 동아리에 합류했다는 걸 보면서 어쩌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런 말에도 서애란은 언제나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고정인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F급은 좀 아니지 않냐? 쟤 데리고 던전까지 같이 들어갈 건 아니잖아? 이번 방학에는 좀 더 난이도 높은 던전에 들어가 보자며. 여기서 쟤까지 받아 주면 어쩌려고?”
헛소리를 길게도 설파하는 공희찬을 제지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작 나를 지켜보던 김미솔이 입술을 길게 다물고 고개를 저는 모습을 먼저 발견한 탓이었다.
이제는 김미솔의 단호해진 얼굴을 보기만 해도 싸우지 말라는 말이나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라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래, 마침 말 잘했어. 미솔이가 날 부른 건 같이 던전 나가서 보스나 때려잡자는 이유는 아니었어. 나도 징그러운 거 싫어해.”
말문을 맺으면서 눈살을 찌푸리던 고정인이 거만하게 앉은 공희찬을 보면서 말했다.
“난 여기 머리 쓰려고 온 거지 몸 쓰려고 온 게 아니거든. 다들 강효서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에 무슨 글이 올라오는지 알고 싶지 않아?”
확실히 김미솔이 인재를 엄선한 게 느껴지네.
고정인의 한마디를 시작으로 저마다 낮은 소리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선일도 곁에 있던 서애란에게 고개를 기울이면서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커뮤니티는 보안이 상당히 철저해요. 강효서 선배네 부모님 기업의 도움을 받아서 운영하고 있으니 접근 시도만 해도 발각될 테고요. 그런 와중에 선배가 뭘 할 수 있는데요?”
그에 고정인은 대답을 늦추면서 김미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야 발언권이 나한테 돌아오는구나. 그건 내가 설명해 줄게.”
고정인의 곁에서 팔짱을 끼우고 서 있던 김미솔이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말했다.
“본인이 직접 밝혔다시피 정인이는 해킹을 아주 잘해. 각성하기 전에는 관련 대회 같은 데 나가서 상도 받았다더라. 연구소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것도 그쪽 재능을 살리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고.”
“그런데 한국마력연구소는 F급 각성자가 들어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야. 그나마 성적을 아주 잘 받는 게 방법인데 그때 내가 너무……. 아무튼, 그렇게 됐어.”
김미솔의 말애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던 고정인이 간단하게 덧붙였다.
이어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설연호가 이어서 이야기했다.
“우리가 동아리 시간마다 모여서 공유했던 정보도 전부 유용했지만, 강효서가 관리하는 커뮤니티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걸 다들 알 거야. 그러니 고정인이 말한 대로 그쪽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어느 쪽으로든 우리한테 유리해지겠지.”
칠판 근처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한눈에 담아 보던 내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듣다 보니까 궁금한 게 생겼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정인이 끄덕거리면서 눈짓해 보였다.
“그 정도로 해킹을 잘하는데 F급이라면 졸업한 뒤에 비각성자 회사에 입사하면 되는 것 아니야? 능력만 입증한다면 입사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낮잡아 보는 건 아니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야.”
나와 고정인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곰곰이 듣던 홍원하도 동조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그러네. 그쪽으로 진로를 틀게 되면 선배가 이루고 싶었던 꿈도 되찾는 거잖아요. 방학만 지나면 졸업할 사람이 왜 우리 동아리에 나서서 시간을 할애하려고 해요?”
“음, 이것까지는 민망해서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홍원하의 물음에 머뭇거리면서 입을 뗀 고정인이 나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미솔이한테 얘기를 듣고 선뜻 내가 돕고 싶다고 한 건 도해월 때문이었어. 이번 실습에서의 활약상도 익히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 정확히는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고 싶었어.”
나한테 고맙다고? 그 말만 듣고서는 짚이는 바가 없는 탓에 고개를 기울였다.
“알려진 대로 너희가 들어갔던 던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면 그때 우리 가족은 전부 죽었을 거야. 집이 그 근처거든.”
그 말을 듣던 나는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리면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전생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의 여파로 비교적 근처에 있던 주택 단지 일대가 모조리 눈 더미에 파묻혔다는 뉴스를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게이트 사태 때 가족을 잃을 뻔했던 나는 아직도 뉴스에 던전 브레이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야. 실습을 마치고 나와서 너희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그즈음에서 말문을 맺는 고정인의 표정만으로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느릿하게 내쉬는 한숨에 치미는 감정을 게운 듯한 고정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도해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답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내 시간을 기꺼이 들여서 돕고 싶을 만큼 진심이라서.”
그렇게 말하는 고정인의 생기 어린 눈동자가 모두와 차례대로 시선을 맞췄다.
내부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관조하고 있으니 어딘가 미묘한 느낌이 일었다.
회귀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전생에서의 재난을 바로잡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과 차진명에게 복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고정인의 인사를 듣고 나니 모든 일이 끝난 다음을 문득 그려 보게 된다.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 미래를 넘어, 그다음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렴풋하게.
그러다 긴 침묵을 깨뜨리면서 손을 든 건 서애란이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건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거죠? 전 찬성해요. 저 선배랑 앞으로 함께하고 싶어요.”
차분하게 모두를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나에게서 멎었다.
그 짧은 마주침만으로 서애란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