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77
77화. 겨울방학 동아리 모임
결국 고정인이 마지막 일원으로 합류하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그다음 모임부터는 커뮤니티의 기틀을 잡는 일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고정인은 모이는 날마다 상당히 크고 묵직한 노트북을 들고 나타났다.
외에도 자리에 앉는 순간 가방에서 꺼내 놓는 부속품의 수만 해도 셀 수 없었다.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던 고정인은 다시 보니 학교의 관찰자 같은 존재였다.
F급은 등한시되는 교내의 분위기에도 휩쓸리지 않고 꿋꿋한 것이 질긴 풀뿌리 같았다.
고정인한테는 주위를 그토록 집요하게 관찰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생존 전략인가 보네.
전생의 내가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무작정 달려 나갔던 거랑 비슷한 심정이려나.
그즈음에서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의 볕에 눈이 시린 듯해 고개를 틀었다.
소맷단을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약속한 시간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찍이 동아리실로 내려와 내부를 정돈하고 있으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에 다가갈 즈음 입구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형, 왜 혼자 내려갔어. 먼저 나간 줄도 몰랐네.”
“피곤해 보여서 일부러 안 깨웠어.”
나는 문제혁을 돌아보지 않고 칠판 앞에 서서 대답했다. 방학을 맞이한 문제혁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자 체력 단련과 훈련에 매진한 상태였다.
칠판에 오늘 모임에서 해야 할 일을 간단히 적어 내린 뒤 문제혁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자리를 꿰차고 앉은 문제혁이 숨을 고르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문제혁은 물기가 약간 남은 검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털면서 입을 열었다.
창가 근처에 앉은 나머지 정오의 볕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가 한층 선명하게 보였다.
“고정인 선배까지 합류하니까 진전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라진 것 같아. 옆에서 잠깐 보니까 구색은 거의 다 갖췄더라. 김미솔 선배가 잘 데려왔다고 생각해.”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 보드 마커를 내려놓고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고정인까지 합류하니까 동아리 전체적인 체계가 잡힌 게 느껴지지. 그대로 우리랑 뜻이 맞아서 졸업 이후로도 같이 활동해 주면 좋을 텐데.”
“그것도 그렇고 지내다 보니까 그 선배 같은 사람을 한 명 정도는 더 받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고정인 선배 같은 사람? 예를 들면?”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던 문제혁이 이어서 말했다.
“형이 길드 창설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 혼자서 좀 더 알아봤거든. 다른 길드를 보니까 등급이 높거나 전투력 좋은 헌터들을 데려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무 업무를 처리할 사람도 중요한 것 같았어.”
묻지도 않은 새에 그런 것까지 알아봤다니.
나는 문제혁을 기특하게 여기는 내색은 특별히 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솟구치려는 한쪽 입꼬리를 감추고자 시선은 비스듬하게 틀어 두었다.
“고정인 선배도 훌륭하지만 모든 걸 다 맡길 수는 없을 테니 주력 인물을 학교에서 하나 정도 더 찾아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형 생각은 어때?”
“그건 나도 동의해. 이왕이면 고정인만큼 빠릿빠릿하면 좋을 텐데.”
막역한 사이까지는 아니어도 김미솔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고 하더니.
김미솔은 어쩌면 자신과 닮을 사람을 분별해 내는 재주가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 우리 왔어.”
“오늘 진짜 춥다. 나랑 미솔 누나 오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란히 등장한 김미솔과 홍원하에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오다가 다른 사람들은 못 봤어?”
전날부터 눈이 많이 내린 탓인지 한 시 정각이 넘었으나 기척이 드물었다.
김미솔과 홍원하가 짐을 푸는 동안 창문을 다시 내다보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와, 진짜 춥다……. 안녕하세요. 해월이랑 제혁이도 안녕.”
손끝을 마주 비비적대며 등장한 강준희의 안경에 김이 서려 있었다.
뒤이어 반쯤 열린 문을 마저 열면서 공희찬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으휴, 고작 그 정도로 엄살은.”
불 속성인 나머지 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공희찬은 언제나처럼 얇은 옷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안녕.”
“우리 별로 안 늦었죠? 어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막혔어요.”
방학이 되고 나서 이전보다 더 자주 붙어 다니는 듯한 서애란과 지선일도 모습을 보였다.
“천천히 움직여도 돼. 지금 안 온 게 고정인밖에 없지? 오면서 본 사람 없어?”
차례로 눈인사를 건넨 뒤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나는 문가를 돌아보았다.
문이 닫히고 난 뒤에도 한참 잠잠한 것을 확인한 뒤 시선을 틀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오늘 온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따로 연락 받은 사람?”
장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자리에 앉던 김미솔이 질의했다.
누군가 대답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복도가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오나 본데.”
긴 생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은 뒤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서애란이 말했다.
“이거 던전에서 몬스터 나타날 때 들리는 소리 아니냐? 뭔 학교에서 이런 소리가…….”
공희찬이 말문을 채 맺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렸다.
“아, 그만 쫓아오라고! 집에 가라니까!”
“싫다고. 왜 누나 혼자만 재미있는 거 하는데!”
음, 지난 반년 동안 털이 보송한 병아리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여러 악몽이 떠오르네.
공희찬도 이제 겨우 날뛰는 걸 진정시키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게 했는데.
어쩐지 또 다른 종류의 악몽을 마주하게 되리라는 직감으로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 늦어서 미안. 집에서부터 쫓아오는 걸 진작 떨궈야 했는데 자꾸 따라와서.”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걸 느낀 고정인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 곁에서 고정인보다 키가 크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남학생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덩달아 머쓱해진 건지 어느새 건장한 자세로 인사한 남학생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던 공희찬이 말했다.
“여기가 뭐 놀이터냐? 데려오고 싶은 사람 아무나 데려오게? 이러지 말고 눈 펑펑 내리는 날 어디 지하철역에 가서 자선 행사라도 하든가.”
“여기가 그런 것도 하는 동아리였어요? 그건 몰랐는데.”
잔뜩 껴입은 채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슬그머니 빼내던 남학생이 곧장 받아쳤다.
그 소리에 곳곳에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누나한테 얼핏 들어 보니까 여기서 재미있는 걸 하는 것 같아서요. 바깥에서 들었던 얘기까지 종합해서 고민해 보니까 저도 여기서 활동하고 싶어졌거든요. 앞으로 다른 기회가 더 없을 것 같아서 따라왔어요. 아무쪼록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해도 되죠?”
말하는 것도 고정인이랑 똑같은 게 영락없는 남매다.
“닮은 것 보니까 선배 동생인 것 같은데. 일단 들어와.”
* * *
“그러니까 여기 있는 고예성까지 받고 인원 모집은 정말 마무리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 생각도 다 같은 거면 이제 무르기 없는 거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고예성과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눠 본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얘기하는 걸 들어 보니 아침에 문제혁과 말했던 기준에 상응하는 인물인 듯했다.
지휘관의 기준으로 판별한 고예성은 고정인만큼 눈치가 빠르고 굳셌지만 같은 자리에서 오래 버텨야 하는 제 누나와 달리 움직임이 좀 더 날랜 게 느껴졌다.
각성자 등급이 E급인 고예성은 던전 공략이라는 목표는 애초에 포기한 상태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헌터 아카데미도 부모님의 권유로 억지로 입학한 것이라고 했다.
두 남매 모두 헌터 아카데미에서 어떻게든 버텼으나 삶의 낙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고예성은 얼마 전부터 활기를 되찾은 누나를 보면서 혼자만 재미있는 일을 꾸리는 걸 참을 수 없어졌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 동아리 사람들과 이미 친분이 있는 상태였다. 김미솔과 비슷하게 발이 넓고 등급이 높은 학생뿐 아니라 E, F급과도 두루 친하다니.
이대로 잘 키운다면 훗날 길드의 행동 대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만한 패였다.
“나도 동의해. 다른 건 몰라도 두 사람 다 실행력이 남달라서 좋네.”
김미솔의 말을 마지막으로 동아리 일원들 전부가 동의했다. 고정인에 이어 고예성까지 주먹구구로 사람을 들이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7학년이 졸업할 것까지 고려하면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그즈음에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칠판 근처로 다가가면서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지난번에 얘기했던 대로 방학 계획을 세워 보자. 2월에는 선배들 졸업식도 있으니까 그것까지 고려해서 세우면 돼.”
이어서 이런저런 의견이 나오는 대로 칠판에 목록을 쭉 적어 보았다.
대부분 던전 공략을 한 번쯤 더 하자는 얘기를 꺼냈다.
더불어 인원 충원은 마무리했으니 커뮤니티를 완성하는 데 열중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다음 학기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먼저 배포하자는 의견에 고정인도 동의했다.
나 또한 이번 이들과 의견이 상응했다. 전생에는 차진명이 내게 손을 내밀었던 7학년 2학기부터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가진 정보를 밑천 삼아 성장을 이루어야 했다.
헌터 아카데미에서 한 해를 보내는 동안 길드의 기틀을 만드는 일까지 병행하려면 겨울방학 계획을 잘 세워 두어야겠지.
마지막 의견을 끝으로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지선일이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7학년 선배들이랑은 훈련도 몇 번 못 해 봤는데 더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아쉬워요. 졸업한 뒤에 어떻게 지낼지 생각해 보셨어요?”
지선일이 답을 구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함께 쏟아졌다.
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공희찬이었다. 그는 다리를 반대로 꼬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야 뭐. 요새 우리 아버지가 슬슬 눈치를 주는 것도 있고……. 아마 내년 총선 준비만 해도 바쁠 것 같은데. 그다음은 다 끝나고 생각하지, 뭐.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못 갈 리 없기도 하고?”
“아, 네.”
지선일이 간단하게 대답한 것에 이어 모두가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럼 설연호 선배는요?”
이어서 설연호를 지칭하자 테이블 위에 깍지로 얽은 손을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음, 나는 다른 사람들 예상이랑 조금 다르게 갈 것 같아.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 대답을 듣고 사뭇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뭐, 그게 연호 너의 선택이라면 그럴 수 있지. 언제가 됐든 힘든 일 있으면 우리한테 얘기해 주고. 그럼 다음은 내가 얘기하면 되지?”
자연스레 이어지려던 적막을 깨뜨린 김미솔이 자신에게로 이목을 모이게 했다.
“나는 아직 고민 중이야. 조만간 달해 사무실로 다시 가서 얘기 나눠 볼 거긴 한데.”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누나는 그 좋은 자리를 두고 왜 고민하는 거야?”
곁에 앉아서 김미솔을 지켜보던 홍원하가 물었다.
김미솔도 그쪽으로 시선을 틀면서 대답했다.
“달해는 결속력이 좋은 만큼 어느 정도 폐쇄적인 분위기인 것 같더라고. 거기 들어가서 그쪽 사람들이랑 합 맞추고 일 배우다 보면 당분간 너희랑 연락하는 것도 힘들어질 거야. 그런데 사실 이것도 미팅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라 계속 고민하던 거였어. 나는 좀 자유롭게 활동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우리 동아리처럼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게 펼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서 보니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정장 차림이더라.”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미솔을 어떤 식으로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왕이면 늦지 않은 시기에 날을 잡아서 따로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설연호와 문제혁은 부대원이었으니 설득할 때 심정적으로 편한 점도 분명히 있었다.
전생에서도 나와 함께했던 만큼 이번에도 다시 함께하리라는 무언의 확신도 있기도 했고.
그런 걸 생각하면 이번 생에서 처음 교류한 김미솔에게 어떤 조건을 걸고 제안해야 할지 점점 고민되었다. 이왕이면 김미솔이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충족해 주고 싶었다.
“벌써 어두워졌네요.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할까요?”
나지막하게 묻는 문제혁의 목소리를 따라 모두가 창밖을 보았다. 여름과 달리 어슴푸레한 빛이 금세 잦아드는 겨울인 터라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래,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잘 가.”
그 말을 끝으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의자를 뒤로 끄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자 휴대전화를 꺼냈다.
[취우 길드에서 잠깐 보고 싶다는 소식을 전해 왔어.] [생각 있으면 연락해라.]메시지의 발신자는 정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