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취우
이틀 뒤, 광화문.
취우 길드 사무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마스터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공손한 자세로 응접실 안쪽까지 안내한 남자가 내게 자리를 권했다.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고갯짓하곤 의자에 앉으니 남자가 인사한 뒤 물러났다.
나는 채도가 짙은 녹색과 고동색의 엔틱 가구들로 꾸린 내부를 둘러보았다.
게이트 사태 당시에 창설된 취우(翠雨)는 나름의 전통을 자랑하는 길드였다.
리호 길드가 이때까지 헌터 아카데미와의 결속으로 잇속을 채우며 성장했다면 이곳은 지나온 세월을 따라 입지 또한 자연스럽게 단단해진 축에 속했다.
십여 년 넘게 광화문에 터를 두고 있는 취우 길드의 사무실은 몇 년 전 건물 자체를 리모델링한 덕분인지 내부의 전경이 꽤 말끔했다.
아마도 정건후가 취우의 유일한 S급 헌터였지. 동시에 부길드장이었고.
그와 달리 마스터인 한도일은 A급 헌터라는 점이 의아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더불어 한도일은 길드 설립 초창기 멤버인 동시에 취우에서 두 번째로 추대된 마스터였다는 사실까지 기억해 낸 뒤 자세를 가다듬었다.
“실례합니다.”
이윽고 문이 다시 열리면서 내게 응접실을 안내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차기를 비롯한 여러 음료를 준비한 쟁반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마스터께서 잠시 휴식하시면서 대기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원하시는 음료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나는 눈앞에 놓인 쟁반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페퍼민트 티를 골랐다.
그러자 남자가 일사불란하게 찻주전자와 찻잔을 세팅한 뒤 응접실을 나섰다.
금빛 테두리와 매끄러운 상아색 표면이 두드러지는 찻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찻물이 쏟아지면서 페퍼민트 특유의 향해 코끝까지 화하게 번져 나갔다.
느린 손놀림으로 찻잔을 쥐어 몇 번 식힌 후 천천히 마시면서 상념을 이었다.
정건후가 말을 어떻게 전했는지 몰라도 대접이 극진하네.
나는 차게 식었던 손끝이 서서히 열감을 되찾는 것을 느끼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어서 여기까지 오기까지 두어 번 더 진행되었던 동아리 모임의 기억을 되짚었다.
이번 방학도 지난 소모임처럼 던전을 공략한 뒤 각자 얻은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이번에는 어떤 패를 꺼내는 게 좋을지 좀 더 고심해 봐야겠어.
찻잔을 조심스레 들고 몇 모금 들이켠 뒤 내려놓으면서 김미솔을 떠올렸다.
김미솔은 내일 낮에 달해와 마지막 컨택을 진행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김미솔을 설득할 수 있는 적기는 오늘 저녁이겠네.
잠시 휴대전화를 꺼내 김미솔에게 메시지를 보내 둔 뒤 숨을 골랐다. 오랜만에 문제혁도 없이 혼자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 씨 남매는 확실히 잘 데려온 패라고 생각해.
전생에서는 다뤄 본 적 없지만 예상대로만 움직여 줘도 충분한 몫을 하겠지.
그렇다면 이다음은……. 아, 무기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난 현장 실습에서 내구도를 완전한 백색 권총은 더는 쓰지 못하게 되었다.
애초에 임시로 사용하던 것인 만큼 큰 미련은 없었지만 어쩐지 허전했다.
다음 무기는 길드 활동을 하면서도 쭉 사용할 요량으로 투자해 볼 생각이었다.
마침 이번 현장 실습도 명목만 장학금일 뿐이지 S급 던전이 묻힌 던전에서 살아서 돌아온 일에 대한 생명 수당을 지급한다고 했으니 그걸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다.
이런 식으로 손쉽게 학생들 입을 닫아 버리는 처사는 누구 머리통에서 나왔으려나.
곰곰이 고심하고 있으니 문가 너머에서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응접실의 문이 열리면서 낯선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취우 길드 마스터 한도일입니다.”
자신을 한도일이라고 지칭한 남자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를 발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테이블 근처로 나와 그가 내민 것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나와 눈높이가 비슷할 만큼 키가 큰 한도일은 이국적인 외모에 머리카락 색도 캐러멜처럼 밝은 편이었다. 그 빛깔을 고스란히 닮은 눈동자가 매끄럽게 빛났다.
말끔한 검정색 정장에 같은 색의 목폴라 차림의 그가 부드럽게 손을 놓으면서 내가 앉았던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그가 정건후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추정하기로는 삼십 대 후반 정도인 듯했다.
“우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죠. 지난번 소식을 전해 준 것이 학생이라고 듣고 정건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 뒤 만남을 청했습니다. 선뜻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그의 낮고 부드러운 미성을 경청하면서 선선히 주억였다.
“마다할 이유도 달리 없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히 응수하자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찻잔을 가져간 한도일이 능숙하게 차를 따랐다.
“제가 도해월 학생을 여기까지 초대한 이유는 짐작하고 계시겠죠. 지난 현장 실습은 무사히 마무리되어서 천만다행입니다만, 어째서 그 던전에 S급 마석이 묻혀 있었는지는 저희 쪽에서도 알아보는 중입니다.”
이미 인터넷과 언론에서는 성문의 소행이라고 못을 박고 있던데.
취우는 수사의 확답을 내리기 전까지 움직임을 신중히 하려는 생각이나 보네.
“실습 직후부터 지금까지 성문의 이름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반쯤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느릿하게 들이켜던 한도일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길만 치켜 바라보는 나머지 눈썹이 솟아오르는 모양까지 고스란히 담겼다.
이어서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렇죠. 이제 헌터 아카데미도 방학이 되었으니 예정대로 소송 절차를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문을 주시하던 이능단속관리본부까지 움직인다면 이전의 광휘는 되찾기 어려울 겁니다.”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나서게 되면 차정주의 직접적인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나 성문 길드 소속 B급 헌터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움직여 준 덕분에 성문은 손쉽게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대체 누구였을까.
모쪼록 성문 길드는 남의 손을 빌려서 기세를 꺾었으니 다음은 내 손으로 처리해야지.
동시에 내가 아는 개새끼 중에 성질이 제일 고약한 놈을 떠올리며 차를 마셨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차민훈은 지금 속이 많이 탈 거야.
“도해월 학생을 부른 건 궁금한 걸 묻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던전에서 어떤 식으로 빠져나온 건지 정확히 알려진 게 없더군요.”
“공략 막바지에는 내부에 몰아치던 눈보라로 인해 조원 전원이 일부 기억을 잃었다는 것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나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곧바로 받아치자 턱을 느릿하게 가눈 한도일이 얇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듣던 대로 처세술이 상당하네요. 도해월 학생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했으니 저도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그로부터 드넓은 응접실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내내 혀끝에서 맴돌던 질문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던전 브레이크가 인간의 의지만으로 벌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이 말이 된다고 보시나요?”
몸소 겪은 일이었어도 한 번쯤은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은 논제였다.
내 질문을 들은 한도일은 눈에 띄게 입술을 달싹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믿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믿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2014년에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틈을 두고 되물었다.
“2014년에 벌어진 게니우스의 창 실종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죠? 아마 그때 도해월 학생은 지금보다 더 어렸을 테니 기억이 희미하겠지만, 그래도 듣고 싶군요.”
2014년에 벌어졌던 게니우스의 창 도난 사건.
병원에서 설연호와 스치듯 나누었던 것처럼 내게는 시간적 거리감이 상당한 사건이다.
마지막 성물이 발견되고 십여 년 만에, 그것도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성물이 발견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소지한 헌터는 익명의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아도 그 사태로 나라가 떠들썩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또 뉴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성물을 빼앗긴 헌터가 사망했다는 것까지도요. 이건 어릴 때 어른들을 통해 스치듯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망한 헌터가 취우의 이전 길드 마스터였다는 사실은 과거 이능청에 입사한 뒤에 알게 된 정보였다.
차분하게 설파하는 것을 듣고 있던 한도일은 말문을 맺을 즈음 미간을 좁혔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던 것도 잠시 평소처럼 기색을 가다듬은 그가 대답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듯하네요.”
예상대로 한도일은 한결 편안해진 자세로 말을 이었다. 이전까지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지 정도를 확인해 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시 뉴스와 언론에는 익명의 세력이라고 알려진 성물 사냥꾼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이지. 놈들은 실제로 성물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가졌다고 추정되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갈취하는 악질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입술을 축이면서 대답했다.
“그렇다면 대화가 한층 수월해지겠네요. 모쪼록 그때부터 저는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건후 선생님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취우의 인력을 준비하면서도 도해월 학생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한도일은 그즈음에서 눈길을 틀어 응접실 벽면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곗바늘이 오후 네 시 정각을 가리키기까지 일 분 남짓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가 시계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 나머지 대화에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고요하던 그는 네 시 정각이 되자 입을 열었다.
“네 시네요. 제가 정건후 선생님과 미리 합의한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눈가를 찡그렸다.
“이제부터는 도해월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걸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한도일의 눈빛은 이전보다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앞으로도 서로 돕게 될지도 모르는 형국에 잠깐 시간을 내는 것 정도야.
“이번 일을 기점으로 도해월 학생의 졸업 후 진로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듯한데. 제 예측이 맞습니까?”
“네.”
숨을 나른하게 흩뜨리는 채로 짧게 대꾸하자 한도일의 눈동자에 흥미가 동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학생과 접촉한 건 지난 실습에서부터 도해월 학생을 지켜보던 사람들이었겠죠. 제가 예상하기로는 헌터 아카데미의 이사장 혹은 그 학교와 줄곧 협업해 왔던 리호 길드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맞나요?”
나는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한 번 주억였다.
“리호가 온갖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계속해서 헌터 아카데미와 협업해 왔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겁니다. 취우나 리호처럼 규모가 큰 길드일수록 괜찮은 인재 영업에 혈안이 되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건 허울뿐인 이사장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것까지 듣고 보니 난데없었던 설연리의 제안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더불어 자세히 알고 있는 걸 보니 정건후가 취우 길드에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나에 대한 정보가 한도일한테 넘어간 듯했다.
헌터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면 처음부터 그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정해 두어야만 한다. 한도일은 어떤 대가를 요구했을까.
아마도 한동안 뉴스에서 떠들어댄 것처럼 나와 조원들이 A급 던전에서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에 대한 걸 물어봤을 듯한데. 그렇다면 나의 공개 스킬인 천리안에 대한 정보가 넘어갔을 가능성이 농후하겠어.
정건후라면 스킬 이름까지는 아니어도 기능에 대한 것 정도는 설명했을 듯한데.
“앞으로 도해월 학생을 탐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지금까지는 학생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손을 내밀었다면 7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남을 청해 올 겁니다.”
잠잠히 경청하던 나는 턱을 미묘하게 기울이면서 되물었다.
“취우도 저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하게 될 거라고 우회해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의 어떤 부분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희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저희 쪽에서는 이미 도해월 학생의 자질이라면 직접 길드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선선히 수긍하면서 자세를 조금 고쳐 앉은 그가 나에게서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도해월 학생에게서 무엇을 봤냐고 묻는다면…….”
이윽고 한도일의 나와 다시 눈을 맞추면서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보았다기보다 도해월 학생이 보게 될 미래를 믿는다고 하는 게 적합할 겁니다. 다른 헌터들이 탐내는 것도 미래를 보는 그 눈일 테니까요.”
예측이 확답으로 돌아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차진명의 이름을 떠올렸다. 전생의 내가 그와 손을 잡은 건 그때의 내가 다른 가능성 같은 건 생각할 겨를 없이 절박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약 지금처럼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면…….
“모쪼록 저희의 예상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훗날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생각이 길어지기도 전에 한도일이 마저 치고 들어왔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던 사람들과 다르게 일종의 협업 관계를 제안하고 있었다.
한도일의 의중을 해석한다면 내가 길드를 세울 때도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그 너머의 속마음을 헤아리고자 시선을 자연스레 떨어뜨린 뒤 눈을 감았다.
[스킬 ‘공정한 판별자’가 발동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지닌 악의를 측정합니다.]이어서 눈앞으로 푸른 활자가 떠올랐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는 ‘0%’입니다.]정건후와 따로 협의까지 했다는 걸 보면 다른 속마음이 있어서 그런 걸 텐데.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감정’은 ‘호기심’,‘기대’, ‘특정 대상을 향한 강렬한 그리움’입니다.]짐작만 했던 게 사실인가 보네.
한도일은 지금 사망한 이전 마스터의 모습을 나에게서 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정건후가 한도일에게 내가 성물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렸을 리 없다.
대체 어떤 부분을 보고 전 길드 마스터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네. 성격이 비슷한 건가.
그럼에도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