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81
81화. 첫 번째 악의와 보이지 않는 청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지 어느덧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중간고사까지 사흘 남은 교정은 꽃이 지는 동시에 한껏 푸릇해지고 있었다.
새로 창설할 길드에 합류한 세 명은 졸업식을 기점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길드 등록과 관련한 서류를 제출하기 이전의 밑 작업에 있어 품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사무실 매물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규모는 차츰 늘려갈 것이었으므로 간소한 인원을 수용할 만한 곳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백방으로 움직이며 터를 잡고 온갖 정보를 선점하면서 몸집을 불리는 것.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취우가 설립되고 성장한 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 한도일이 나한테 선뜻 도움을 주겠다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나.
당시는 게이트 사태를 기점으로 각성자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니 길드의 성장이 수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대규모 길드가 다수 존재하고 그들 사이의 살벌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지금은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한 경쟁을 강제로 중단시키고 수많은 길드가 서로의 이익과 지위를 지키고자 연합하게 된 계기도 내가 속해 있던 헌터 정예 부대 때문이었지.
이제는 이능청의 바깥에서 차진명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뜻에 반하여 맞설 결심을 되새기니 약간은 긴장되는 듯했다. 동시에 실낱같은 고양감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에 이런 배경은 좀 아니지 않나.
차민훈 그 개새끼는 인생을 두 번 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라니까.
나는 길게 쏟아 내는 숨에 탄식을 섞으면서 밀대를 손에 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전부터 물에 적신 걸레로 바닥을 닦았으나 화장실 청소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중간고사 전에 마지막으로 모이는 거라 얼른 가 봐야 하는데.
이게 다 차민훈 그 개새끼 때문에. 됐다, 말을 말자.
7학년에 진학하여 나의 담임이 된 차민훈은 온갖 방식으로 나를 괴롭혔다.
이제는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걸 넘어 진심으로 나를 얄미워하는 게 느껴졌다.
전생과 달리 차민훈이 담임이 된 건 누군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아마 서애란까지 나와 같은 반으로 묶은 걸 보면 차정주의 뜻은 아닌 듯한데.
반면 강현욱은 이전 생과 마찬가지로 나와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교실에서 그를 마주칠 때마다 성질머리가 조금 누그러든 강효서를 보는 듯해 매번 기분이 더러웠다.
이처럼 차진명은 모습을 감춘 뒤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겨 두는 것에 능통했다.
자신이 부재하더라도 언제든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조치해 두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칸마다 구석구석 밀대로 밀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쏟아졌다. 체력적으로 버겁진 않았으나 기분이 영 불쾌했다. 차민훈도 이런 걸 노리고 청소를 떠맡겼을 테지.
“안녕. 아직 집에 안 갔네.”
다음 칸으로 밀대를 옮기려는 순간 문을 열고 나타난 건 강현욱이었다.
소매의 단추를 풀면서 걷어 올린 강현욱은 곧장 세면대 앞으로 향했다.
“보다시피 담임이 시킨 게 있어서.”
“그렇구나.”
거울 너머로 언뜻 비친 강현욱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핏기가 돌지 않고 창백했다.
이목구비를 뜯어보면 다르지만 강효서와 분위기는 사뭇 비슷한 그 얼굴을 흘긋거렸다.
“아, 난 시험 스터디 때문에. 너도 늦지 않게 마무리하고 집에 가. 네가 고생이 많다, 여러모로.”
전생의 강현욱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나 이번 생에서는 언제나 친절을 가장했다.
단순히 학생회장의 의무를 다하는 걸 넘어 인간적인 호감을 품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 그래야지.”
나는 흘려 내듯이 대꾸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밀대를 마저 움직여 바닥을 닦았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욱은 그대로 멈춰 있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요새 담임 선생님이 예민하신가 봐. 성문 길드랑 선생님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얼마 전에 겨우 해명하셨으니까. 네가 마음 넓게 이해해 줘.”
굳이 묻지도 않은 걸 떠드는 건 강효서와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성가시고 거슬린다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자 눈길을 떨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차진명이 의도적으로 내 곁에 배치한 장기 말은 어떤 모양일까.
먼저 속내를 들춰 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강현욱의 말에 의도적으로 대답을 유예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는 듯 미간을 좁히면서 남몰래 스킬을 시전했다.
[스킬 ‘공정한 판별자’가 발동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지닌 악의를 측정합니다.]푸른 활자 너머로 강현욱의 모습을 보았으나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는 ‘11%’입니다.]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은 수치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감정’은 ‘경멸’, ‘하찮음’, ‘성가심’입니다.]그것까지 확인한 나는 밀대를 고쳐 잡으면서 강현욱에게 문가를 고갯짓했다.
“말해 준 것들은 참고할게.”
“그래. 그것 말고도 지내면서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얘기해.”
강현욱은 소매의 단추를 도로 채우면서 눈인사를 건네고 화장실을 벗어났다.
나는 이윽고 고개를 돌린 뒤 헛숨을 터뜨리면서 닫힌 문을 넘겨다보았다.
스킬을 통해 악의를 판별하고 나니 그가 품은 감정이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고 느리게 호흡했다.
전생의 차진명이 유스티티아의 검을 활용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11%라는 수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나와는 직접적인 연결점도 없던 강현욱은 왜 저렇게 수치가 높게 나오는 거지.
이전에 차진명과 우연히 마주쳤던 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악의의 수치가 일정 수준 이상이면 나에게서 감정의 동요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차진명의 앞에서 알게 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나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가 펼치면서 심호흡을 이었다. 체내의 마나 흐름이 요동쳤다. 스킬 부작용인가. 아직은 최대한 사용을 자제해야 할 듯싶었다.
얼마 뒤 자리를 정돈한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감돌던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불쾌하던 감각이 한층 가라앉는 듯했다.
* * *
“늦어서 미안.”
닫힌 문을 열면서 양해를 구한 뒤 동아리실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테이블에 모여 있던 이들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며 반겼다.
“왔어?”
“아냐. 누나도 방금 막 끝냈대. 마침 잘 왔어.”
“안녕. 얼른 와서 앉아…….”
“오늘도 화장실 청소야? 그 쌤도 진짜 지독하다.”
하나의 모니터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던 7학년 네 사람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었다.
차례로 열거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끌어 착석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둘러보니 지선일과 문제혁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금방 올 거야. 잠깐 음료수 사러 간다고 했어.”
고예성의 대답이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선배 왔어요? 음료수 사 왔으니까 마시면서 해요.”
“형, 생각보다 일찍 왔네.”
지선일과 문제혁까지 합류한 뒤 음료수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즈음 창문 너머를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뮤니티의 얼개는 갖춰졌으니 시작점을 어디로 삼을지 이야기해 볼까.”
자연스레 칠판 근처로 걸음을 옮긴 나는 테이블을 한눈에 담아 보았다.
군데군데 비어 있는 자리가 어쩐지 허전했으나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우리 커뮤니티에서 원하는 사람은 체스의 폰 같은 사람이라고 했었던 걸로 기억해. 그렇다면 정석대로 E, F급 학생들을 위주로 퍼뜨리는 게 어떨까 싶어.”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의견을 낸 건 고예성이었다. 나는 마저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입학했을 때부터 E, F급은 대놓고 등한시되더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선생님들도 꽤 많았고. 그마저도 연구소나 길드 사무직 취직을 목표로 삼은 상위권이 아니라면 머릿수 채우려고 데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 했지.”
고예성은 노트북에서 손을 거둔 채 모두와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그들의 처지를 청해 듣는 건 고 남매를 통한 것이 처음이었으므로 신중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우리한테 거는 기대가 없어서인지 종종 게임에 있는 엔피씨처럼 여길 때가 있어. 뻔히 듣고 있는 걸 알면서도 해당 사항이 없다는 이유로 별의별 얘기를 다 하더라. 그건 학생이든 선생이든 가릴 게 없었어.”
나는 턱을 느릿하게 까딱이면서 고예성의 음성에 집중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담아 둔 것인지 차분하게 얘기하는 목소리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 의견에는 저도 동의해요. 문제혁이랑 같이 정보를 얻게 될 때마다 가장 결정적인 힌트를 쥐고 있는 건 대부분 E, F급 무리였거든요.”
고예성이 앉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연신 끄덕이던 지선일이 말했다.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 있는 걸 보면……. 그 애들은 마땅히 말할 만한 창구가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는 이야기 아닐까.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라 아닐 수도 있지만…….”
이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강준희에게로 시선을 두었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마다 생각할 거리가 생긴 건지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생각을 마무리하는 대로 모두의 이목을 모았다.
“정확해, 강준희. 우리가 커뮤니티를 운영하려는 목적이 바로 창구를 만드는 거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E, F급 학생들 위주로 범위를 넓히자는 고예성의 의견도 좋았고.”
나는 가볍게 얽었던 손깍지를 느슨하게 떨어뜨리면서 테이블 위에 손 하나를 얹었다.
그러자 혼자서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서애란이 모두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 강효서 선배랑 그 주위 사람들은 자기 처지에 나란히 견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엄선해서 데려갔어. 당연하게도 E, F급은 대부분 후보에서 제외됐지. 그나마 그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 E급인 성민주 선배 하나야.”
서애란이 말을 덧붙이자 곁에서 흘긋거리던 지선일도 입술을 달싹이는 게 보였다.
“지선일,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얘기해. 뭐든 괜찮아.”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커뮤니티는 이때까지 강효서 선배가 관리하던 커뮤니티의 지향성에서 완전히 반대로 나간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역시 내가 부대원을 고르는 안목 하나는 탁월하다니까.
“보이지 않는 청자.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사람들을 앞으로 이렇게 부르는 건 어때요. E, F급이라고 지칭해서 부르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은데.”
내내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문제혁을 보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같던 녀석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났구나.
“모두의 의견이 같은 쪽으로 수렴된 것 같지.”
조금은 뿌듯한 속내를 추스르면서 다시금 모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링크를 한번 주변에만 조금 뿌려 보는 건 어때? 초반이니까 시범 운영하는 느낌으로. 그 정도면 3, 40명 정도는 수월하게 들어올 것 같은데.”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홍원하도 마지막으로 의견을 더했다. 나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말문을 이었다.
“홍원하 말대로 시범 운영을 하면서 감을 잡아 보고 관련해서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조율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면 될 것 같다. 인원 포섭은 고예성이 맡아서 진행해 줬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당연하지.”
흔쾌히 수락하는 고예성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번 모임은 여기서 마치는 걸로 하자. 다들 고생 많았어. 꼭 알아야 하는 소식 있으면 연락할 테니까 당분간은 공부에만 열중해. 그럼 이만 해산.”
* * *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문제혁까지 되돌아간 뒤 숨을 골랐다.
한적해진 동아리실 내부를 정리하고 있으니 창문 너머로 노을이 쏟아졌다.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와중에 동아리 모임이라니. 도해월, 이번 시험 자신 있나 봐?”
대뜸 문간에 기대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정건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복도를 내다본 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번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