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84
84화. 파문 (2)
보이지 않는 청자의 주장대로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교정에 리호의 사람이 나타났다.
나의 예측 또한 빗나가지 않았다. 설연리와 동행한 두 사람 역시 익숙한 이들이었다.
“어, 저 사람들 예전에 본 적 있지 않나? 리무진에 우리랑 같이 타고 안내까지 해 줬던 윤해리 헌터랑 던전 공략관리팀 배정민 팀장인 것 같은데. 가운데서 오는 사람은 누구지?”
복도 창가에 서서 음료수를 몇 모금 마시던 홍원하가 그쪽에서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그들을 마중 나간 교감은 세 사람과 함께 건물 입구까지의 길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기억력 좋네, 홍원하. 가운데는 설연리 헌터야.”
“그야 당연, 어? 진짜?”
홍원하를 따라 시선을 거둔 뒤 나지막하게 덧붙이니 홍원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힘껏 구긴 그는 창문에 대고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 실습 끝나고 단체로 병원 실려 갔을 때 설연리 헌터도 왔었다며. 그때도 연호 선배만 보고 갔다고 해서 내심 아쉬웠거든. 범람에서 누가 리호 길드 사람 온다고 올린 것 보고도 반만 믿고 반은 안 믿었는데 진짜 오는 거였네?”
창틀에 손바닥을 짚은 홍원하는 모여서 걷던 이들이 건물 안쪽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러다 복도 끄트머리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애들 반응 보이지. 저렇게 놀라는 애들 사이에 범람에 글 올린 애도 있을까.”
멀리서부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도 미묘한 진동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저마다 높아진 목소리가 한데 얽히면서 순식간에 소란으로 번졌다.
“있어도 모른 척하고 있겠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참 떨어진 곳에서 홍원하와 가만히 관조하던 나는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저들 사이에서 유난히 태연해 보이는 사람을 찾고 있었으나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봐도 안 보일걸. 보이지 않는 청자라는 이름이 괜히 붙었겠어?”
나를 따라서 상체를 비스듬하게 꺾은 뒤 어깨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던 홍원하가 말했다.
그런 그에게서 슬그머니 발을 물린 채 팔짱을 끼운 나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전날 범람에 올라온 정보 중에 내가 더 알아야 하는 건 없어?”
“어제? 생각을 좀 해 봐야 하는데. 음, 어디 보자…….”
이어서도 음, 하면서 말소리를 끌던 홍원하는 난데없이 눈을 빛내더니 손뼉을 쳤다.
“생각나는 것 있어?”
“아니, 전혀.”
“생각나는 것도 없으면서 박수는 왜 치는 건데?”
“그냥. 너 놀리고 싶어서.”
잠시 눈을 감은 나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다.
애초에 홍원하에게 묻는 게 아니었나 싶어 잠시 후회하는 채로 한숨을 흩뜨렸다.
“근데 진짜 왜 여기까지 왔을까? 듣기로 설연리 헌터는 작년까지 외국에 있었다고 하던데. 이제 그냥 한국에 들어온 건가?”
내 반응은 그다지 개의치 않다는 듯 몇 걸음 앞선 홍원하가 물었다. 맞은편에 모여 웅성거리던 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저마다 리호 길드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지난 학기에 담당 길드가 성문으로 바뀐 일이 리호 입장에서는 불명예스러웠겠지. 헌터 아카데미가 개교한 뒤로 쭉 협업해 왔다가 갑작스럽게 통보받았다고 하니까.”
“담당 길드가 다시 리호로 교체된 건 진작 알려진 사실이잖아. 그런 와중에 여기까지 행차한 것 보면 일부러 보여 주려고 저러는 건가?”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현장 실습 일을 계기로 헌터 아카데미는 리호에게 일종의 빚을 진 셈이었다.
하지만 설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그 이유뿐만은 아니겠지.
그것까지 생각하고 보니 설연리와 설연호의 성격은 참 다르다는 감상이 남았다.
“설연리 헌터 지금 교장실 들어갔대! 같이 구경 갈 사람!”
이윽고 누군가 복도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소리쳤다.
절로 인상을 찡그리던 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걸음을 틀었다.
“애들 진짜 신났나 보다. 난 저기 쫓아가는 애들 구경해야겠어. 같이 갈래?”
돌아서려던 나를 홍원하가 붙잡고 물었다. 얕은 한숨을 흩뜨리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힘이 스르륵 풀리는 게 느껴졌다.
“알았으니까 화내지 마. 그럼 나중에 보자.”
커다란 손바닥을 두어 번 흔든 홍원하는 맞은편으로 향했다. 길고 탄탄한 사지가 허공을 가르며 내달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젓고 교실로 돌아갔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오후 수업이 마무리될 즈음 서애란이 내가 앉아 있는 책상 모서리를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던 나는 한숨을 삼키면서 서애란에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무슨 일이야?”
“담임이 교무실로 오라더라. 뭐 사고 친 건 아니지?”
내가 전교 1등을 차지한 일이 차민훈 입장에서는 사고처럼 느껴지려나.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나머지 고개를 저으면서 일어섰다.
“전해 줘서 고마워.”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문간을 넘어서서 복도를 가로지르던 나를 서애란이 붙잡았다.
뒤따라나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끝으로 입가를 가린 채 속닥거렸다.
“종일 가라앉아 있던데. 내가 얘기했던 것 때문에 이러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난 뒤 잠시 고민하다가 부정하지 않고 수긍했다.
“짚이는 구석이 있다면 설연호 선배랑 먼저 얘기해 봐. 난 뒤늦게 들어와서 그간의 사정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니까. 차진명 선배라면 너랑 같이 학교에 남아 있는 사람을 건드릴 생각일 테니 그것도 참고하고.”
힌트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서애란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교무실에 다다르니 삐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차민훈이 보였다.
“넌 인마 걸음이 느려 터졌어. 선생이 부르면 재깍재깍 뛰어도 모자랄 판에, 쯧. 아니면 뭐, 전교 1등 한 번 했다고 내 앞에서 유세 떠는 거야?”
멋대로 짐작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모자라 결론까지 내리는 건 강현욱이랑 똑같네.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차민훈의 앞에서 대놓고 귀를 털어 버릴 수도 없는 탓에 시선만 비스듬히 두었다.
“도해월, 넌 선생이 말하는데 대답하는 꼬락서니가 그게 뭐야?”
그 소리에 느릿하게 감았다 뜨면서 고개를 틀고 있으니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마다 한 번씩 흘긋거리고 마는 것을 보니 이런 소란에도 어느새 적응한 듯했다.
“이딴 예의 없는 자식이 뭐라고 다들 좋다고 찾는 건지…….”
예의 없는 자식을 찾고 싶으면 거울을 먼저 보면 될 것 같은데.
“됐다. 여기 말고 1층으로 다시 내려가서 교장실로 가 봐.”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들면서 교무실을 벗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문간을 벗어나면서 손끝으로 귓가를 털었다.
* * *
누군가 조치를 취한 건지 1층 복도는 인적 없이 고요했다.
그대로 교장실로 들어서자 나를 달갑게 반긴 교장이 안쪽을 가리켰다.
“그래, 이쪽으로 들어가라. 교장실은 비워 둘 테니까 잘 뵙고 오고.”
그가 가리키는 쪽에 마련된 문을 넘어서니 그와 이어지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교장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나는 소리 없이 문을 닫으면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우리 오랜만이죠?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기 전에 다시 보니 반갑네요.”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오셔서 저를 부를 줄 몰랐습니다.”
흰 셔츠에 채도 낮은 갈색 정장 바지 차림을 한 설연리가 고개를 한 차례 까딱였다.
그녀에게도 인사한 나는 근처에 놓인 소파에 천천히 앉으면서 물었다.
“성문 길드를 상대로 진행한 소송에 리호 길드의 도움이 필수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오늘은 그 얘기도 하고, 이번 학기 실습에 관해서도 협의할 것이 있어서 직접 방문했답니다.”
설연리의 어조는 언제나처럼 나긋했다. 이런 부분은 설연호와 닮은 것도 같았다.
“연호 소식은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지금쯤 사무실 터를 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제 예상이 맞나요?”
“네, 설연호 선배가 리호를 이탈한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는 것까지 어느 정도 전해 들었습니다.”
곧바로 대답하는 내 모습을 골똘한 눈으로 바라보던 설연리가 말을 이었다.
“연호를 비롯한 세 사람의 움직임은 진작 길드 관계자들 눈에 띄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지 궁금하네요. 연호가 리호를 이탈한 것도 그렇고, 김미솔 헌터가 달해의 스카우트를 거절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으니 당분간 행동거지를 유의하는 게 좋을 겁니다.”
상체를 기울여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쥔 설연리를 잠시 지켜보았다.
“저희를 도와주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설연호 선배가 전해 주더군요.”
“맞아요. 오늘은 도해월 학생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우회하여 말하던 한도일과 달리 설연리는 단도직입적이었다.
“지난 학기 실습 과정에서 도해월 학생이 사용하던 무기의 내구도가 전부 소모되었다고 전해 들었어요. 고로 리호에서는 학생에게 한 가지 조건을 걸고 오랫동안 쓸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할까 합니다.”
이런 식의 전개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속내를 알아내고자 곧바로 대답했다.
“우선 조건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 * *
설연리가 내게 제안한 것은 한 가지였다. 작년 2학기 현장 실습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추후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가능성을 인지하게 된다면 리호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알릴 것.
성문 길드의 이름이 언론에 연이어 언급되면서 던전 브레이크를 고의로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이론적 가설 또한 정설이 되어 갔다. 성문의 탈세 의혹까지 불거진 이후 언론의 관심사는 ‘누군가 고의로 발생시킨 던전 브레이크’라는 화두로 기울어졌다.
동시에 관련 연구자들은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고의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와 우연에 의해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애초에 구분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에 헌터 아카데미와 오랜 시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가 가진 천리안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짐작한 설연리는 다른 길드보다 먼저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내게 손을 내민 듯했다.
‘취우의 한도일 마스터와 접촉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리호 내에서의 협의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제야 찾아온 거지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당분간 행동거지를 유의하라는 설연리의 당부에 담긴 의미를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각성자 등급이 높을수록 서로를 경계하고 주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언제가 됐든 변하지 않았다.
지잉―
설연리와 나눈 대화를 복기해 보던 나는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야?”
발신자는 설연호였다.
설연호가 전해 오는 소식을 묵묵히 전해 듣던 나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설연리 헌터 만나서 협의했어. 그것 말고도 선배들이랑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주말에 잠깐 만나자. 다들 시간 괜찮은지 물어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