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85
85화. 파문 (3)
토요일 아침, 부지런히 길을 나선 내가 향한 곳은 용산구의 한 건물이었다.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곁에서 걷던 김미솔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주는 내내 여기 있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해월이 너까지 여기 데려오려고 하니까 설레서 잠이 안 오던 것 있지. 아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할 거야.”
이윽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부터 잠잠하던 김미솔은 공연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흘긋 쳐다본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 고개를 젖혔다.
“솔직히 달해 길드 사무실까지 가서 거절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지막지하게 후회했거든. 그 번듯하고 근사한 곳을 두고 널 따라서 맨바닥에서 시작하려고 하니까 좀 무서웠어.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도 사람 마음이 괜히 그렇잖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텅 비어 있는 복도를 걸어가던 김미솔이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선선히 수긍하면서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말았다.
“한도일 마스터는 대체 언제 만난 거야? 연호랑 정인이랑 같이 취우 길드에서 나온 사람들 만나서 얘기 듣는 동안 얼마나 놀랐는데. 그런 게 있으면 우리한테도 얘기를 했어야지.”
“미안. 다음부터 바로 얘기할게.”
잠시 나를 흘겨보던 김미솔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용산에 길드의 터를 잡자고 한 건 한도일 마스터 생각이라고 하던데. 그것까지 취우 길드 사무실에서 얘기했던 거야?”
“그건 아니었어.”
“그렇구나. 모쪼록 우리 세 사람 다 한도일 마스터 생각에 동의해서 여기로 결정한 거야. 취우 길드 건물이 있는 광화문이랑 가깝기도 하고, 지난 실습을 계기로 용산이 우리한테 나름대로 의미 있는 공간이 됐으니까.”
말문을 맺으면서 가볍게 웃어 보인 김미솔이 닫혀 있던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먼저 들어선 그녀는 정면으로 팔을 뻗으면서 나를 안내했다.
“들어와. 다들 기다리고 있어.”
고개를 한 차례 까딱이면서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탁 트인 내부를 둘러보았다.
층 하나를 전부 사무실로 꾸민 뒤 불투명한 유리 벽으로 공간을 분리해 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안쪽을 둘러보니 어색하기는 해도 구색이 얼추 갖춰져 있었다.
그 곁에서 속도를 맞추던 김미솔은 곳곳을 가리키면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쪽은 사무직 헌터들이 근무할 곳이라고 보면 돼.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당분간은 어수선하겠지만 금방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연호랑 정인이가 기다리는 회의실은 저쪽.”
한도일의 지원으로 채워진 공간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하나씩 들여다볼 때마다 단순히 대가를 바라는 호의에서 한 걸음 나아간 마음이 보태진 것이 느껴졌다.
“이쪽은 다 확인했지? 이제 회의실로 가자. 가 보면 우리가 왜 이 건물을 골랐는지 바로 이해할 거야.”
나는 다시금 걸음을 서둘러 나아가는 김미솔의 뒤를 따라갔다. 한도일이 더한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전생의 차진명이 내게 베푼 것들은 마땅한 성과를 대가로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만큼의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을 때 끝없이 좌절하던 날들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왜 또 멈춰 있어. 얼른 들어가자.”
깊어지려던 상념에서 나를 깨운 건 김미솔의 명료한 한마디였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팔목이 붙잡힌 채 회의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해월이 안녕. 회의실에 온 걸 환영해!”
“어서 와.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기는 고정인과 설연호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숨을 골랐다.
회의실 오른편에 자리한 커다란 창 너머로 바깥의 전경이 한눈에 담겼다.
“어때. 여기서 보면 남산타워도 잘 보이지.”
어느새 내 곁에 서서 팔짱을 끼운 채 창밖을 내다보던 설연호가 말했다. 나는 꽃이 지고 녹음의 색감이 나날이 짙어지는 늦봄의 풍경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이 건물을 골랐는지 알겠네.”
느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간결히 덧붙이자 김미솔이 뿌듯하게 웃음 지었다.
“역시 그렇지? 매일같이 창문 밖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하루를 시작하자는 뜻이야.”
홀가분하고 벅찬 듯한 숨을 쏟아 내던 고정인이 그 곁에서 덧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근처에 있던 세 사람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무실의 남은 공간을 확인하고 잠시 휴식한 뒤 첫 회의를 시작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지도를 가리키며 지리적 이점을 파악한 나는 거둔 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지금까지 설명했다시피 성문 길드가 용산 일대의 던전을 대부분 관리하고 있었어. 헌터 아카데미에 꾸준히 실습용 던전을 제공했던 리호와 비슷한 수를 보유했다고 하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나?”
잠시 숨을 고르면서 설연호를 바라보자 그가 수긍하면서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작년에 그 일 있고 이번 학기부터 다시 협업하게 되면서 현장 실습용 던전만 관리하는 팀이 따로 창설됐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작은 소리로 감탄하던 고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무쪼록 헌터 아카데미에서 성문 길드를 상대로 건 소송의 결과가 우리 학교 쪽에 유리하게 나오면 위태롭던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버릴 거야. 그렇게 되면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도 성문 길드가 맡았던 다수의 던전을 포기하게 만들겠지.”
“나라도 그런 무서운 일을 꾸민 길드를 더는 못 믿을 것 같아.”
“그래, 그거야.”
김미솔의 말에 곧장 대답한 나는 지도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전생의 기억을 되짚으면서 성문 길드가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길드를 차례로 가리켰다.
“가장 먼저 관리 권한을 포기하게 되는 건 이런 식으로 등급이 높거나 혹은 지형적 특성이 험악한 던전이 될 거야. 음, 멸절의 설산이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겠네.”
그 말을 끝으로 손길을 거두는 동안 설연호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성문 길드가 관리 권한을 포기하게 되면 이능단속관리본부는 그 던전들을 관리해 줄 만한 길드를 다시 찾을 거야. 해월이 넌 그 던전의 관리 권한을 우리가 선점했으면 하는 거지.”
설연호는 참 유능해.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송이 완전히 마무리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성문 쪽에서도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반박할 테니까. 최소 일 년 정도는 소요될 것 같은데 그 기간 동안 성문이 포기한 던전을 선점할 수 있도록 규모를 넓혀 보자.”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운 채 휙휙 돌리던 김미솔이 고개를 들었다.
“길드를 정식으로 창설하는 건 해월이 네가 졸업하고 난 뒤라고 가정할 때 전반적인 길드 운영이나 관리는 누가 맡을지도 잠깐 애기했었어. 마침 왔으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정하고 가자.”
회의실에 자리한 이들과 차례로 눈을 맞추던 김미솔은 펜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잠시 고민하며 다문 입술을 늘리고 있으니 설연호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건 내가 할게. 사실 5학년 때부터 방학마다 길드 운영에 관한 수업을 듣고 있었거든. 마스터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누나랑 내가 자연스럽게 경쟁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
“저런……. 고생했겠다.”
고정인의 말에 그쪽을 잠시 돌아보던 설연호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누나가 미국으로 갔던 것도 불필요한 경쟁이 싫어서 그런 거였대. 내가 리호를 이탈하고 얼마 안 지나서 얘기해 주더라고. 해월이 너 작년 여름방학에 나랑 만났던 날 기억나?”
“물론.”
“그때 내가 기숙사에 남았던 것도 마스터님 등쌀에 떠밀리기 싫어서였어.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후련하네.”
느릿하게 눈꺼풀을 여닫던 나는 설연호가 언급한 날을 잠시 상기했다.
그때 기숙사에서 통화를 마치고 나왔을 때 표정이 안 좋았던 것도 그래서였나 보네.
“음, 그나저나 조금 걱정되는 부분도 하나 있었어.”
침묵이 길어지려던 찰나 고정인이 자세를 바르게 세우면서 말했다.
“보통 길드의 규모를 결정하는 건 마스터의 등급 아니야? 그 등급에 따라서 길드의 수준도 나뉘는 것 같던데.”
“맞는 말이야. 졸업한 뒤에 내가 마스터로 활동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겠지. 손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테니까 믿고 기다려 줘.”
김미솔과 설연호도 내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염려할 만한 부분이었다.
말마디마다 힘을 주어 말하던 나는 숨을 고르면서 모두와 시선을 나누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얼굴을 차례로 살피고 있으니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다 나를 보며 엷은 미소를 짓던 설연호가 이목을 모으면서 화두를 돌렸다.
“다음 안건으로 바로 넘어가자. 학교에 남아 있는 동아리 애들도 전부 다 우리 길드로 데려올 거지? 이제 7학년이 된 애들은 겨울방학에 따로 만나서 얘기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희찬이도 그때 만나면 되겠어.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드문드문 연락 남기더니 이제는 정말 바쁜 건지 소식이 없더라고.”
설연호와 김미솔이 연이어 설파하던 것을 차분하게 경청하던 내가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선배들한테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중요한 거야.”
* * *
“그 예측이 빗나갈 확률은 얼마나 돼?”
창문 너머로 어스름이 짙어질 무렵 한숨을 삼킨 김미솔이 말했다.
적막을 깨뜨리는 음성을 따라서 설연호와 고정인도 시선을 틀었다.
차진명이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 움직인다면 예측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현저히 낮다고 봐.”
고심하여 꺼낸 대답을 듣던 세 사람이 저마다 한숨을 쉬거나 탄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효서 옆에 있었던 애란이가 얘기했고, 해월이 너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면 우리도 대비하는 게 좋겠지. 사실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 말이라서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누군가 우리를 배신할 가정 자체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읊조리던 김미솔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곁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정인은 근처에 있던 생수를 몇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이 얘기를 졸업한 뒤에 들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이 사실을 알고도 계속 학교에서 지내야 했다면 도통 못 견디고 다른 사람들을 계속 의심했을 것 같아.”
“해월이도 그것까지 고려해서 말한 거겠지. 우리 세 사람은 당분간 동아리 애들 마주칠 일 없을 테니까 중요한 연락은 개인적으로 주고받으면서 지내자.”
고정인의 말에 곧장 대꾸하던 설연호의 눈동자가 차츰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혹시 모르니까 고정인 선배는 당분간 범람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유심히 지켜봐 줘. 의심되거나 수상한 게 있다면 나한테 바로 알려 주고.”
“그럴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구태여 반박하지 않고 수긍한 나는 숨을 길게 흩뜨리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긴 회의를 마치고 헌터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 * *
사무실에서 세 사람과 나눴던 이야기는 문제혁에게 따로 전달하지 않았다.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상상하다 보니 마음이 한층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잉―
지잉―
지잉―
밤이 깊어진 와중에도 책상에 앉아 상념을 잇던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방금 무슨 글이 올라왔다가 지워졌어] [일단 너도 봐야 할 것 같아서] [바로 지워져서 아이피는 못 잡았는데 일단 캡처는 했어]발신인은 고정인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어서 보낸 커뮤니티의 캡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7학년에 성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대]제법이네, 차진명. 짤막하게 적힌 활자를 보고 있으니 조소가 터져 나왔다.